<수정증보판>김영중의 내가 보는 제주4.3사건
7. 인민항쟁(민중항쟁)의 허구
당시 폭동 주동자 및 북한이나 좌파의 주장은 일관되게 '인민(민중)항쟁설'이지만 이를 부인한다.
가. 폭동 주동자들의 목표
4.3주동자들이 당시 폭동을 일으키는 데 명분으로 내건 관료들의 부패와 3.1절 발포사건(사망 6명, 부상 6+2명), 서북청년단의 횡포, 상식을 초월한 인권침해(1948년 3월 6일 조천지서에서 김용철 22세가 고문으로 사망하여 관련 경찰관 5명이 구속되었고, 3월 14일에는 대정지서에서 양은하 27세가 고문으로 사망하여 관련 경찰관 2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함) 등이 폭동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는 것은 절대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희생되거나 곤욕을 치른 선량한 사람들의 억울함은 설명이 필요 없다. 그 수가 1만 명을 넘었다는 데서 통탄할 일이다.
참고로 김달삼 해주연설문에 의하면 김용철은 “박헌영 절대지지, 인민공화국 사수”를 외쳤다고 나와 있다. 또한 정부보고서에 의하면 양은하는 “조국이 분단되었기 때문에 단독선거를 반대해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폭동 주동자들의 근본적인 의도는 이미 수립된 김일성 정권의 노선에 따른 공산통일을 추구하였고,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기 위해 5.10선거를 파탄 내려는 것이었다. 공산전제정치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 순박한 도민들을 선전, 선동으로 기만하고 협박, 강제하면서 이반된 민심을 교묘히 이용하여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남한 공산화를 위해 4.3을 일으킨 것이다.
좌파가 일관되게 4.3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경찰과 서청탄압에 대한 항쟁'이라면 그 대상은 경찰이나 서청에 국한되어야 하고, 그들의 주장은 인권침해와 비리척결에 대한 책임추궁에 한정되어야 한다.
이와 전혀 무관한 양민을 살해하고, 국제공산당가(歌)인 적기가를 부르며, 인공기를 게양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는 것은 4.3주동자들이 경찰과 서청의 탄압을 명분으로 이용한 것이고, 근본 의도는 소련과 북한(정권)을 등에 업은 북한식 공산통일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를 '괴뢰정부', '적', '원쑤'라 칭하고 대한민국에 대해 '선전포고문'을 광포하고 친소련, 친북한적(的) 삐라를 살포하였다.
제주도 1호 목사이며 기독교 불모지인 제주도에서 16년간 10개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 군자금모금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는 독립운동가 이도종(李道宗) 목사를 1948년 6월 16일 남제주군 대정읍 신평리 인향동 인근 중산간 도로에서 무장유격대들이 납치 생매장하였다.
경찰과 서청 탄압에 항쟁하고 친일파를 배척한다는 사람들이 왜 독립 운동가이며 성직자인 목사를 생매장했겠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칼 마르크스는「헤겔 법철학 비판」서문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했으며, 박헌영도 1925년에 “적극적인 반종교운동의 필요성”을 제창하고, 반기독교대회에서 이를 역설하였으며, 이에 대한 글도 썼다.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증오하는 기독교 목사이고(기독교 신자들이 다수 희생되었음), 비협조자였기 때문에 생매장하였다.
그들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남로당에 가입하지 않은 자, 5.10선거에 참여하려는 자, 선거관리위원, 지하선거 비협조자, 그들의 비밀을 아는 자, 식량이나 물건을 지원하지 않은 자나 심지어 이도종 목사처럼 순수 중립적인 인사와 그들 가족이라면 모두 반동으로 죽여야 할 대상일 뿐이지 독립운동가이든, 친족이든, 목사이든, 이웃이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1,764명(3,200명이라는 기록도 있음)을 살해했다. 이러한 일련의 폭력은 폭동이지 항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 땅에 살고 있다. 그런데 무력으로 대한민국 건국을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수립 후에도 대한민국을 상대로 전투를 자행하고, 6.25 때 남침한 북한인민군과 합세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기도했다는 사실은 항쟁이 아니고 반란이 분명하다.
“당신은 어느 나라 국민이냐?”라는 질문에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라고 답변했을 때, 그러면 대한민국 건국을 파탄내려는 무장폭력행위를 항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런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할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덧붙여 4.3주동자들은 “조국을 미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러면 해방되었다는 북한의 실상은 어떤가를 생각해 보면 결론은 자명해 진다.
당시 그들의 구호나 주장이 얼마나 공허하고 위장되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나. 체험자 증언
(1) 제주 미술계에서 활동한 강용택씨(1932년생)는 한때 좌익 활동에 직접 참여했던 체험자로서 자서전 '꿈을 간직하고 살아온 화가‘에서 4.3의 성격을 진솔하게 밝히고 있다.
“필자가 재학하던 제주농업학교에는 통칭 P원, M원, 콩클럽 등 3개 조직체가 있었는데, P원은 남조선노동당 정당원 약칭이고, M원은 민애청(민주애국청년동맹)원이고, 콩클럽은 2학년 이하 공산소년단 단원의 약칭이다. 둘째 형님은 P원으로 3학년 축산과 위원장이다”라는 점으로 보아, 당시 학원가에 남로당 세력이 얼마나 깊숙이 침투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어서 1947년 8월 15일 정오 사이렌 소리에 맞춰 관덕정 광장에서 소위 '벼락시위'에 직접 참가했던 사실을 밝히면서 “4.3사건을 민주시민항쟁이라고 고집할 수 있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필자의 결론은 좌.우의 이념 분쟁이었음이 분명하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제주읍사무소 국기게양대에도, 어느 송신소 나무 안테나에도 펄럭이는 오각별 인공기를 봤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했다.
(2) 당시 남로당 (남제주군)대정면책(대정면책)이었던 이운방(이운방, 1909년생)도 “주도자는 빨갱이로 봐야지, 최종 목적은 공산주의니까. 그들의 우선 목적은 통일조국 건설이고, 그 과정에서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지”라고 증언하였다. 4.3의 역사는 김달삼, 이덕구, 이운방 같은 그 시대 사람들이 만든 것이지 그때와 한참 시간적 거리를 둔 요즘 젊은이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다. 남로당인민해방군 창설
1947년 3.1투쟁과 3.10파업투쟁, 6.6사건 연루자들은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도피하거나 월북하게 되자 '1947년 8월 남로당제주위원회는 군사체제로 돌입하여 남로당인민해방군을 창설'했다. 바로 무장투쟁을 계획하고 전투태세에 돌입한 것이다.
이 남로당인민해방군계도를 보면 남로당전남도위원회 밑의 남로당제주도(島)위원회(위원장 김류환, 부위원장 조몽구, 조직부장 김달삼, 선전부장 김용관, 간부부장 현두길, 농민부장 겸 노동부장 이종우, 청년부장 겸 재정부장 김광진)가 있고, 그 직속으로 인민해방군 본부를 두어 사령관 김달삼, 기동대장 겸 조천면 사령관 이덕구, 전투부대 25부대(40명씩), 직속부대 25부대를 두었다.
그 산하에는 제주읍, 조천면, 남원면, 한림면, 애월면에 유격중대를 두었고, 그 외에 한림면과 애월면에는 자위대를 운영하였다.(별표-4. 남로당인민해방군계도 참조) 이는 새로 건국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무력으로 방해하려는 의도된 군사행동이지 항쟁이 아니다.
라. 지하선거와 주동자들의 월북
정부보고서는 '김달삼의 월북이 제주4.3사건 발발 때의 기본적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이라고 주동자의 행위를 변호했으나, 이는 궤변 중의 궤변이다.
1948년 8월 2일 4.3주동자 김달삼 일행(일행 중 안세훈은 다른 경로로 월북했다는 설도 있음)은 제주도를 몰래 탈출, 목포를 경유하여 해주에 도착한 후 8월 21일에 개최하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20대 청년 김달삼은 35명의 주석단 선거에서 박헌영, 허 헌, 홍명희 등과 함께 선출되었으며,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투표에 앞서 행한 소위 '김달삼 해주연설'을 통해 박헌영에 대한 지지를 밝힌 후...(중략),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치며 연설을 마쳤다.
이것은 김달삼이 4.3을 일으킨 진짜 의도가 처음부터 소련 노선에 따라 공산통일과 북한 정권 수립 지원 투쟁이었음을 증명한다. 김달삼이 경찰과 서청의 비리에 항쟁하다 단순히 체포를 면탈할 목적으로 피신하려 했다면 일본도 있고, 연고지 대구도 있다. 또 지하선거 결과를 북한으로 가져갈 필요도 없다. 이는 바로 제주도에서 김달삼이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 조선민주주의공화국 만세로 시작하여 평양에서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만세로 이어진 사건임을 웅변한다.
김달삼은 안세훈, 강규찬, 고진희, 이정숙, 문등용 등과 함께 북조선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국회의원)이 되었으며, 그밖에 제주도 출신으로 대의원에 피선된 사람은 김달삼의 장인 강문석, 고경흠, 송성철 등이 있다. 인구비례로 보아 남한출신에 할당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 중에 제주출신이 9명이나 선출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 - 김남식의「남로당 연구」1권 부록2(330~331쪽)에는
“1948년 8월 25일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36명)이 있다. 이 명단을 보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하나는 김달삼 일행과 같이 제주를 탈출, 해주대회에 참석하고 대의원에 피선되었다는 문등용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실제 인물인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가명인 듯 하다. 다른 하나는 이 책 537쪽 고경흠의 이력에는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분명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가나다 순으로 수록한 '남로당 연구 1권 부록2‘에 게재된 대의원 360명 명단에는 고경인이란 비슷한 이름은 있으나 고경흠의 이름은 없다.
☞ - 지하선거
북한은 ‘북조선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기 위해 남한에서도 선거를 치렀다는 물증을 남길 속셈'으로, 다시 말해서 ‘북조선최고인민회의는 남북조선의 총선거에 의해 구성됐다' 또는 '남북조선 전체 인민의 진정한 총의를 대표한다'라고 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한에서 지하선거를 실시한 것이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수는 인구 5만 명 당 대의원 1인으로 정했다. 남한 인구를 1,800만 명으로 추정, 대의원 정수를 360명으로 정하고, 북한은 212명으로 하여 모두 572명으로 결정하였다.
문제는 남한에서 공공연히 대의원 선거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1차로 대의원 선거를 위한 선거인단으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구성할 대표를 선거하고, 2차로 이 대표들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소집해 거기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하기로 했다. 남한에 할당된 대의원 360명의 3배인 1,080명의 '남조선인민대표'를 뽑기 위한 선거가 바로 지하선거였다.
이 지하선거는 박헌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최고인민회의남조선대의원선거지도위원회'가 주도하고 북조선이 개입하여, 이른바 강동정치학원 출신 200여 명이 1948년 7월 10일 경부터 남한에 파송되어 실시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8월 10일 끝났다고 발표했으나 8월 20일~22일까지 계속되었다. 남로당은 산하조직인 민민전 등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백지에 날인 받는 방식을 동원하는 등 무리를 범했으며, 속임수와 회유 및 협박이 자행됐다.
제주도 지하선거 결과는 김달삼이 월북하면서 가져간 것(52,350명 분)으로 볼 때 8월 2일 이전까지 실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주한미육군사령부일일정보보고(1948년 8월 24일~8월 25일 에 의하면, “8월 19일 무장폭도 20명을 포함한 폭도 40명이 세화리에 침입하여 주민들에게 북한 선거를 지지할 것을 강요하며, 백지투표 용지에 강제로 서명토록 했다”는 점으로 보아 김달삼 월북 후에도 (지하선거는)계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한미국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일일보고서 1948년 8월 13일자에는, “이미 보도된 대로 북조선선거감시위원회 회원이 동 투표를 감시하게 될 것이다. 제주도는 '인민해방군구'로 불리워지고 3개선거구로 분구될 것이다. 소규모의 폭도집단이 보도된 대로 밤에 제주도의 소촌락에 침투하여 북조선선거와 통일정부에 동의하며 남조선정부에 반대하는 청원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바로 제주도에도 북한 강동정치학원 출신들이 파송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북한의 주장처럼 북조선최고인민회의는 정통성이 있는가?
여기에 대하여 김학준 박사는 “남한에서의 지하선거는 정상적 선거로 볼 수 없고, 그런 방식으로 선출된 남한인민대표에게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북한 선거에 대해서도 “사실상 북로당이 지명했거나 동의한 단일후보에 대한 확인투표에 의해 그나마도 (북한삭)흑백함(흑백함)을 사용한 공개적 투표이기 때문에 의문이 많다. 설령 북한(식) 선거에 대해서도 이해한다고 해도 최고인민회의 전체의석의 62%를 조금 넘는 남한 대의원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북조선최고인민회의가 남북조선을 대표한다는 북측 주장은 허구”라고 설명하고 있다.
☞ -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해주대회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는 1948년 7월 30일 스티코프가 평양에 머물 때 김일성 및 박헌영과 함께 이 대회에 대한 진행 계획을 수립했다. 이 대회는 1948년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해주시 인민회당에서 개최되었고, 김일성도 참석했다. 노동신문 1948년 6월 11일 2면에는 ‘(김일성...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달삼이 22살에 최고인민회의대의원으로 선거된) 김달삼 동지를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선출해 주시는 높은 신임을 베푸시었다'고 보도했다. 이를 역산하면 김달삼은 1926년생이라는 결론이 나오며, 이는 평양에 있는 김달삼의 묘비(가묘)에도 그렇게 새겨져 있다.
☞ - 김달삼이 연설에서 극구 찬양한 소련군은 과연 해방군(解放軍)인가?
① “소련군이 철수할 때 심지어 38선의 경계를 위해 세웠던 목재 보호막(초소 비슷한 것)까지 걷어갔다”, “소련은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거두어 갔다. 풍작이었던 그해 생산된 많은 양의 양곡과 당시 세계적인 규모였다는 수풍발전소의 독일제 발전기 5대(도합 50만KW 성능)와 더불어 흥남비료공장 일부 시설과 대유동광산의 금석, 철산광산의 모나즈 광석 등을 전쟁배상금 명목으로 규정하여 대거 실어갔다”
② 스티코프 비망록에는
“나는 북조선에서 많은 비료를 가져가는 것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이 사용하기에도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중략), 조선인을 속여서는 안된다(1946.12.18.)”, “군용열차에서 우리 군인들이 하차해 주민들에게 난폭하게 굴고, 약탈행위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살인까지 범한 사건이 발생한다(12.26.)”, “북조선주민들에게 대한 우리 측 병사들의 무례한 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제25군 명령서에 서명했다(12.30.)”, “북조선에서 살인 및 강도혐의로 고소된 니꿀린 대위의 재심요청을 기각하다(1947.1.9.)”라고 기록되어 있다.
③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한 직후에 자신이 점령한 만주와 몽골에 그랬듯이 자신의 유지비를 북한의 인민위원회들로부터 징수했다.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재정부장이었던 김병연(金柄淵)은 소련점령군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도내(道內) 은행의 총예금액 중 반분(半分)인 3천만 엔을 도 재정의 파탄을 초래할 줄 뻔히 알면서도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④ 1945년 9월 소련 국방부가 구성하고 11월 초까지 활동한 '조선그룹'의 보고서를 보면 “북조선의 공업설비들을 소련으로 가져가도록 건의했다”
⑤ 1945년 12월 소련 외무부의 극동 제2국 참사관 수즈달레프(S.F. Sudzdalef)가 작성한 '조선에서의 일본의 군비와 중공업에 관한 보고서'에 의하면,
- 조선에서의 일본 군수중공업은 일본의 침략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생겨났으며 실제로 그러한 목적 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던 만큼 그것들을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탈취해야 한다.
- 북조선에 위치한 일본의 모든 군수중공업공장들은 붉은군대에 대항해 싸운 일본군을 위해 봉사했 고, 또 붉은군대의 엄청난 희생의 결과로 쟁취됐음으로 붉은군대의 전리품들로 봐야 한다.
- 북조선에 위치한 일본의 모든 군수중공업공장들은 이 전쟁 배상의 일부로 또 소비에트 러시아가 출발한 이후 현재까지 일본이 소련에 끼친 엄청난 손해에 대한 보상으로 소련으로 이송돼야 한다. 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1945년 말까지 소련이 북한으로부터 빼앗아 간 물품들은 미화로 약 7억 달러와 8억 달러 사이였다는 보고서도 있다.
이 외에도 소련군이 강간, 약탈 등 각종 패악이 자행됐다는 증언이 있으며, 이런 소련의 의도와 행동을 보면 공포통치시대의 개막이지 해방군이라고 찬양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미군은 남한에 있는 어떤 공장 시설이나 물품을 미국으로 가져간 일이 없고 많은 원조물자를 우리에게 제공했을 뿐이다.
마. 불온 삐라
스티코프 비망록 1946년 12월 12일자에 의하면 “애국자라는 명칭의 비합법적 비밀조직들을 조직해 파괴활동과 삐라를 통한 선동 작업을 전개해야 한다”라고 되었다. 소련군정이 파괴활동과 삐라 살포 시 그 명의까지 구체적으로 지령한 사실은 놀라운 일이지만, (제주)도내에도 어떤 사안이 있을 때 마다 엄청난 삐라가 살포되었다.
1948년 4월 21일 제2구(서귀포)경찰서 강순현 순경과 이강호 순경이 절단된 전화선 수리 정비하기 위해 출장 중 모슬포지서 관내 보성리에서 모슬포 쪽으로 약 800m 지점 소나무 밭에서 습득한 삐라(-포고령, 인민해방군 제5연대 명의 단기 4281년(1948년)4월 10일)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투쟁한다”고 되어 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민중항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바. 깃발 노래 및 구호
유격대들은 항상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부르던 적기가(赤旗歌)와 인민 항쟁가(빨치산가)를 불렀다.
(불가강은 '러시아의 축'이라 일컬어 질만큼 러시아 중심부를 흐르는 큰 강이며, 이 노래는 1933년~34년 경부터 야학소에서 배워 불렀다고 한다)
위 가사 중 붉은 깃발, 시체, 전사(戰死), 전사(戰士), 불가강, 무산군중이라는 의미를 되새겨보면 그들의 지향점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인공기를 게양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와 '스탈린 대원수 만세!’ '김일성 만세!‘ '박헌영 만세!’ 그리고 적기가와 인민 항쟁가를 불렀고, 대한민국을 반대하고, 북한을 찬양 동조하는 불온 삐라를 살포하였으니 항쟁이라 할 수 없다.(스탈린 숭배는 계속되어 6.25남침 1개월 후인 1950년 7월 28일「조선인민보」사진을 보면 서울 중앙청에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을 걸고 그 밑에 '스탈린 대원수 만세!'라고 적혀있다.)
사. 군대조직과 훈련
그들은 소대, 중대, 제1,2,3연대, 3.1지대, 3.10지대, 2.7지대, 4.3지대, 5.10지대, 제3, 제8, 제12, 제23군단과 인민유격대, 자위대, 세포자위대, 부락인민자위대, 특별경비대, 특무대, 기동대, 도(島)사령부, 면사령부, 훈련소, 특공대, 작전교육부, 총사령관, 군사부총책, 인민군사령관 등이란 군대 조직과 부대명칭을 갖추고 무장훈련을 했다.
그리고 도당(島黨) 및 12개 면당(面黨) 사령부를 두고 대한민국을 '괴뢰정부', '적', '원쑤'로, 대한민국 경찰을 '검은 개', 대한민국 국군을 '노랑 개'라 부르면서 자신들이 인명 살상한 실적을 전과(戰果)라 하였다. 특히 경찰관을 살해했을 때 '순경은 1만원, 경사는 1만 5천원, 경위급 이상은 2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이는 바로 대한민국과 무력으로 맞섰다는 증거이니 항쟁이 아니고 반란인 것이다.
아. 남조선노동당의 태생적 한계
경찰은 1947년 3.1사건 직후 주동자인 포고령 위반자 김완배(남로당제주도당 농민부장, 1948. 8.25. 남로당제주도당이 구국투쟁위원회로 개편된 때는 상임위원)를 검거하고 그가 소지한 문건 중 '남조선노동당강령'을 입수하였다.
자. 희생자 심사에서 주동자 제외
4.3이 항쟁이라면 그 주동자 김달삼과 이덕구는 4.3특위에서 희생자의 첫 머리에 등재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희생자 명단에 그들 이름이 없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면, 4.3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인 180여 명과 경찰 153명이 전사하였다. 이들은 민중항쟁을 탄압한 역적이 아니고, 대한민국 건국유공자이기 때문에 현재 충혼묘지(제주도에는 국립묘지가 없기 때문에 제주시 충혼묘지에 전사경찰관 153명 중 140기가 안장되어 있음)에 묻혀 있고, 매년 현충일에는 도지사와 도의회의장, 제주시장 등이 참석하여 건국영령에 대한 추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그곳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대한민국을, 인공기가 아닌 태극기를, 적기가가 아닌 애국가를 부르고, 김달삼이 아닌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에 대한 묵념을 올리고 있다. 반면 북한은 김달삼과 이덕구를 평양 신미동 혁명열사 묘역에 가묘를 만들었고, 국기훈장 2급과 3급을 각각 수여했다. 바로 이와 같은 분명한 사실이 4.3은 항쟁이 아니고 북한식 (김일성식)공산통일을 획책한 반(反)대한민국 폭동이며 반란임을 4.3특위 위원들도 인정한 것이다.
2009년 3월 김연아 선수는 미국 LA에서 2009년 ISU세계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사상 207.71점이라는 세계 최초 최고 득점으로 우승하였다. 김연아의 승리는 대한민국 국민의 시각에서 보았기 때문에 전 국민이 환호 열광하였고, 일본 아사다 마오의 패배는 일본 국민을 망연자실케 했다.
제주4.3사건도 엄연한 남북 분단 상황에서 북한의 입장을 바라보지 말고 대한민국 입장에서 봐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선거를 저지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해 지하선거를 실시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무장공격을 한 행위를 항쟁이라고 한다면 이는 북한의 시각과 같고 실제 북한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1998년 4월 2일 조선노동당 외곽단체인 민민전 평양대표부 이상철 대표 명의 성명서에 의하면,
“지난 48년 4월 3일 일어난 제주4.3항쟁은 5.10남한 단독선거에 항거하여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정당한 반미투쟁이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경찰과 서청에 대한 항쟁이란 말이 없다. 해방이란 말은 정말 달콤한 말이다. 그렇게 해방된 북한의 현실은 어떤가? 탈북자가 10여 명이라면 짜고 하는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2만 명을 훌쩍 넘었으니 그들을 직접 만나 들어 보면 알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정권 입장을 옹호하는)종북주의자들은 “북한은 폐쇄적 사회이기 때문에 정확한 실상을 알지 못하여 북한 인권에 대해 의견을 말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말장난을 하고 있다.
앞으로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겠지만, 만에 하나 사회가 극도의 혼란기(전쟁 등)에 처할 때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대한민국 헌법 가치에 정면 도전하거나 인공기를 들고 적기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 만세!‘를 부른다면 그것이 항쟁일 수 없는 것과 똑같다.
사실, 4.3주동자들은 1947년 3.1투쟁과 3.10파업에 도민의 호응도를 보고 자신감을 가진데다가 발포사건, 고문치사 등 상황은 점차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남로당원은 3.1사건 당시 1천~3청명에서 1년 사이에 5천~6천명으로 급증하자 이를 최적의 기회로 판단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4.3의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
4.3을 일으키면 -3개월 내지 6개월이면 끝장날 것이라든지, -본토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호응해 올 것이라는 기대(남로당 제주읍당 세포 김시종 증언), -무장투쟁을 주장한 신진세력은 제주도에서 봉기하면 기폭제가 되어 전국적 봉기를 유발시켜 제주도에 진압병력을 추가로 내려 보내지 못할 것으로 파악 한 것, -도내에 있는 경비대는 중립을 지킬 것이라는 기대, -미국은 국제문제로 비화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할 것으로 인식(남로당 대정면책 이운방 증언), -조금만 버티면 (1949년에)북한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기대, -남북에서 양군이 철수하면 국내문제가 되는데, 남로당 세력이 강력한 상태에서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이북에는 팔로군이 들어와 있어서 국제정세나 국내정세 모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남로당제주도당 조직부 연락책으로 있다가 전향, 경찰생활했던 김생민 증언)
이들(4.3주동자들)의 지향하는 바에 서청과 경찰의 탄압을 시정하자는 내용은 없다. 오직 북한과 동일한 남로당 노선에 따른 공산통일을 추구하고, 거기에 전국 봉기와 군대 반란과 북한 세력의 지원 내지 승리를 기대했을 뿐이다. 이런 사실들로 볼 때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실시하는 5.10선거를 저지할 목적으로 무장투쟁을 단행한 것이 분명하니 제주4.3사건은 반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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