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증보판>김영중의 내가 보는 제주4.3사건
6. 남로당중앙당 및 전남도당의 지령과 배후 세력
무장반격전을 최종 결정한 소위 신촌회의(2월회의 또는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이삼룡은 “당시 중앙당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오르그(조직원)는 늘 왔으며, 김두봉의 집(신촌리 동수동에 위치)이 본거지였다”는 증언 등을 근거로 정부보고서나 좌파들은 4.3을 일으키라는 중앙당 지령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의 위성국화 전략과 북한 정권 수립과정에 대한 소련측 자료를 비롯해서 4.3관련 자료는 그동안 북한 자료를 제외하고 거의 발굴되었으며, 이 가운데 남로당중앙당 및 전남도당의 지령이 있었다는 근거는 분명히 존재한다. 남로당은 그 전신인 조선공산당 때부터 공산주의 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하였고, 대한민국 건국에 적대적이었다. 남로당이 이 노선을 변경, 수정한 사실은 없다.
남로당은 그 실현을 위해 공개, 비공개, 합법, 반(半)합법, 비합법, 시기와 장소를 불문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하였다. 약점이 보이거나 방비가 허술한 곳이면 어김없이 찾아가 선동하고 투쟁했다. 남로당제주도당은 이런 남로당 노선에서 이탈하거나 반기를 든 일이 없다. 그 수단과 방법에서도 일치했다. 이런 투쟁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제주4.3사건인 것이다.
이럴진대 4.3의 주체가 제주도당이면 전남도당 및 중앙당이 공동 연대하여 일으킨 사건으로서 책임 또한 공동 연대해 질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령의 유무(있고, 없고)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지령이 분명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없다고 고집하는 숨은 이유가 있다. 그래서 부득이 이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일개 군(郡)단위에 불과한 섬, 도당(島黨)에서 수백 명의 무장유격대원과 이를 지원하는 수많은 비무장 지원세력, 또 그들 가족들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대한 무장반격전을 결정함에 있어서, 그것도 막강했던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미군(정)을 상대로 상급당의 지시나 승인 없이 단독으로 무장투쟁을 결정하였다고 보지 않는다.
가. 남로당중앙당과 전남도당의 지령
(1)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
4.3주동자가 직접 작성한 극비문서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 가운데 중앙당과 전남도당의 지령 내용을 살펴본다. (아래 쪽수는「한라산은 알고 있다」문창송 1995.8.15.)
① '3.1투쟁 직후 도당(道黨=전남도당)의 지시에 의하여 각면(各面)에 조직부(面黨) 직속 자위대(自衛隊)를 조직하게...(중략)' - 17쪽
이는 1947년 3.1사건 직후, 그러니까 4.3사건 1년 1개월 전에 앞으로 전개될 무장반격전을 대비하기 위하여 면단위로 자위대를 조직하라는 전남도당의 지령을 받았다. 남로당이 자위대를 조직하려는 궁극적인 의도는 폭력적 혁명을 위한 기초 작업인 것이다.
② '본도 3.1 및 3.1투쟁 직후 때마침 본도 주둔 제9연대가 신설되어 제1차 모병이 있음으로 이에 대정(大靜) 출신 4동무(고승옥(高升玉), 문덕오(文德五), 정두만(鄭斗萬), 류경대(柳京大)를 프락치로 입대시켰음' - 75쪽
3.1사건과 3.10총파업 직후에 무장반격전을 기획하고, 유사시 국방경비대까지 동원하려는 치밀한 계획 하에 군부대에 4명의 푸락치를 미리 심어 놓은 등 만반의 무장투쟁 준비를 한 것이다.
③ 그 후 (1947년)5월에 내도(來導)한 중앙 '올구' 이명장(李明章) 동무에게 이것을(9연대에 푸락치 4명 침투시킨 사실) 보고하여 지도문제와 활동방침을 남도(南道=전라남도)에 가서 지시하여 주도록 요청한 바 있었으나 그 후 아무런 지시도 없었고 내도(來島)한 올구를 통해서 재삼,재사 프락치 지도에 관한 시급한 지시를 요청...(중략)'하였다. - 75쪽
4.3사건 11개월 전인 5월부터 군 병력을 동원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여 중앙당 올구에게 보고했고, 그 지도문제와 활동방침을 요청한 것이다. 보고받은 중앙 올구는 이를 중앙당에 보고했고, 중앙당에서는 제주도당의 건의를 받고 향후 어떻게 조치할 것인가를 신중히 검토했다.
군대까지 동원한 대대적 무장반격전을 전제할 때 중앙당은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는 등 신중했고, 제주도당은 조급하게 서두른 것이 역력하다.
남로당제주도당은 3.1사건 4일 후인 3월 5일 3.1사건대책남로당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우선 중앙당의 지침이 내려올 때까지 3.1사건투쟁방침을 정하고 하부조직에 하달하고 실행했는데, 이 방침은 어디까지나 자체적이고 임시적 조치였다. 이는 중앙당 지침이 내려오면 그에 따른다는 뜻이다. (이런 가운데)5월에 내도한 중앙당 올구 이명장(李明章)은 중앙당 지침을 가지고 내려왔으며 3.1사건 이후의 투쟁경과와 도내 제반 사항을 점검하려 내려온 것이다. - 75쪽
☞ 올구란? - 올구의 임무와 권한
올구란 영어 ‘Organizer'의 준말이다. 남로당제주도당 조작부 연락책 김생민은 “올구는 상급당에서 하급당에 파견되는 조직지도책으로서 상급당을 대리하고 현실문제에 자문, 보고, 결정하며 상급당의 승인을 받지 못할 긴박한 상황에서는 단독으로 선(先)결정, 후(後)보고하고 그 결정은 상급당의 결정으로 간주했다”라고 증언했다. 즉, 올구는 하급당의 조직과 당원을 감시, 지도, 감독, 조종하는 임무와 권한이 있다.
④ '3.1투쟁 직전(편자는 각주에 '3.1투쟁 직전의 오기(誤記)가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해석)에 내도한 도(道, 전남도) 올구 이(李) 동무의 상도편(上道便)에...(중략), 이(李) 동무는 재차 (1948년)3월 중순에 내도(제주도)함과 동시에 무장반격에 관한 지시와 아울러 “국경프락치는 도당(제주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으며, 이번의 무장 반격에 이것(국방경비대)을 최대한으로 동원하여야 된다”고 언명하였음.
이 지도를 중심으로 4.3(사건)투쟁의 전술을 세우는데 있어서 감찰청(監察廳)과 1구서(區署) 습격에 국경(國警)을 최대한으로 동원하고 나머지 각 지서는 유격대(遊擊隊)에서 담당하기로 양면작전을 내세워 즉시 좌기 프락치에게 연락을 부치고 동원 가능 수를 문의한 바 800명 중 400명은 확실성이 있으며 200명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 반동은 주로 장교급으로서 하사관 합하여 18명이니 이것만 숙청하면 문제가 없었다는 보고가 있었음' - 76쪽
㉮ 여기서 전남도당 올구가 4.3이전인 3월 중순에 두 번째 내도하여 '무장반격에 관한 지시‘를 내린 것은 남로당중앙당과 전남도당의 명백한 무장반격전 지령이다. 전남도당 올구는 제주도에 내려와서 신촌회의 무장투쟁 결정과 곧이어 도당을 전투태세(구국투쟁위원회)로 개편하는 전 과정을 지켜보고,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자 2월 말경 전남도당에 올라가 제주도 준비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고 중앙당의 무장투쟁 승인을 받고 재차 3월 중순에 내도함과 동시에 무장반격전을 지시한 것이다.
무장반격전에 관한 지시를 하였다는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는 그 내용의 정확성이나 구체성, 방대성으로 보아 사령관 김달삼이가 직접 기록했거나 아니면 직속 작전교육부장(작전참모)이 아니면 도저히 작성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이처럼 명백한데도 무슨 의문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 '오르그(올구)‘가 언급한 '무장반격'이나 '경비대 동원' 문제는 남로당의 투쟁전략을 전환하는 것으로 중앙당만이 결정할 수 있는 중요 사안' 임으로 이는 중앙당 지령이다.
정부보고서 집필진 4명 중 우익인사 나종삼씨는 2009년 2월 1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대한민국재향군인회가 주최한 ‘향군호국안보세미나, 국가정체성 어떻게 정립 발양할 것인가?' 주제 토론문에서 이를 중앙당이 제주도당에 내린 세 번째 지령이라고 했다.(첫 번째와 두 번째 지령은 후술할 것임)
㉰ '이 지도를 중심으로 4.3(사건)투쟁의 전술을 세우는데 있어서 감찰청(監察廳=후에 경찰국, 현 제주도지방경찰청)과 1구서(區署=제주경찰서) 습격에 국경(國警)을 최대한으로 동원하고 나머지 각 지서는 유격대에서 담당하기로' 한 것은 전남도당 올구가 직접적, 구체적으로 작전계획을 지도한 것이니 남로당중앙당과 전남도당의 지령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전남도당 올구가 전남도당 방침을 180도 위반하여 제주도당에 무장반격전을 지시하겠는가? 또 중앙당이나 전남도당 방침을 어기면서 올구 개인 권한으로 국경을 최대한 동원하라는 지령을 할 수 있으며 직접 작전계획을 지도했겠는가?
⑤ 남로당제주도당은 3.1사건 이후부터 무장반격전 준비를 착착 진행하면서 9연대에 프락치 4명을 심고, 1947년 '5월에 내도(來島)한 중앙당 올구 이명장 동무에게 이것을(도당에서 프락치 4명을 9연대에 파견시킨 경위) 보고하여 지도문제와 활동방침을 남도(南道=전라남도)에 가서 지시하여 주도록 요청한바 있었으나' - 75쪽
이것은 제주도당에서 직접 9연대에 파견한 4명의 프락치는 물론 중앙당 소속 프락치 문상길을 제주도당에서 직접 지휘할 수 있도록 요청하면서 그 지도문제와 활동방침을 전남도당으로 하여금 제주도당에 지시하여 주도록 건의한 것이다. 이 건의에 대한 상급당 반응이 시차를 두고 내려 온 것이 바로 앞서 ④에서 설명한 전남도당 올구의 무장반격전 지시, 국경프락치를 도당에서 지도, 국방경비대를 최대한으로 동원하라는 지령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남로당제주도당이 사사건건 보고, 요청, 건의한 것을 보면 전남도당의 지도와 방침없이 제주도당 독자적 판단이나 임의대로 행동할 수 없었음을 증명한 것으로써 그만큼 지휘체계가 엄정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⑥ 도상위(島常委)는 (1948년)3월 15일 경 도(道=전라남도) 파견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둘째, 단선단정 반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서 적당한 시간에 전 도민을 총궐기시키는 무장반격전을 기획 결정' - 17쪽
이런 기록은 남로당중앙당 및 전남도당에서 항상 올구가 파견되어 그를 중심으로 회의하고(17, 75, 76, 78쪽) 무장반격전을 전개하기로 기획, 결정하였다는 것인데, 전남도당 올구가 무장반격전을 기획,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였다면 윗자리에 앉아서 구경만 하였을까? 당연히 상급당 방침을 전달하고 어려운 결정에 대한 격려와 확인 및 자문, 상급당과의 가교 및 지원문제 등을 조언했을 것이다.
이것이 지령이다. 그리고 올구가 제주도당의 기획, 결정을 즉각 제지하지 않았다면 지령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더구나 그 올구가 무장반격전을 결정하는 것을 지켜보고 자기가 소속한 중앙당이나 전남도당에 회의결과를 보고하지 않았을 리 없으며, 보고 받은 상급당에서 중지를 명령하지 않았다면 이는 묵시적 지령이거나 승인이다. 그보다도 남로당중앙당은 기회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폭력투쟁을 감행하도록 이미 남한 전역에 2.7구국투쟁 지령을 내린 상태였다.
'어느 날(3월 15일 경) 아들들(남로당제주도당 간부들)이 아버지(전남도당 올구 이명장 동무)를 중심으로 회합하여 이웃 사람을 죽이자고(엄청난 위험부담이 있는 무장반격전을) 기획, 결정하고, 기획 결정한대로 실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그 아버지(전남도당과 중앙당)은 시킨 일이 전혀 없다. 아버지는 모른다. 아들들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어느 누가 수긍하겠는가? 제주도당 단독 결정론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수작일 뿐이다.
⑦ '그 후 (1948년)5월 7일에 내도(來島)한 중앙 올구는 국경(國警)프락치에 대한 지도는 도당(島黨)에서 할 수 있다고 언명하였기에...(중략)' - 78쪽
이는 시기적으로 4.3사건발생 이후이지만 전남도당 올구가 3월 중순에 제주도당에 내려와 무장반격전 지령을 내린 데 대하여 중앙당 차원에서 재확인해 준 것이다. 이것은 전남도당에서 중앙당 승인을 받고 제주도당에 지령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⑧ (1948년 4월 20일)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오일균 대대)가 내도하여 산(山)부대를 포위 공격하게 되었으므로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된다는 긴급연락이 있어 군책(軍責=김달삼)과 문(文) 소위(문상길)가 만나(제1차 대책회의)...(중략)' “문 소위도 말 타고 거닥거닥 와서 유유히 말 매어놓고 김달삼 집에서 며칠 머무르다 가기도 했어. 그 때 김달삼 가족은 대구로 피신해 있을 때야”
(이날) 행동의 통일을 위하여 밀접한 정보교환, 최대한의 무기 공급, 인민군 원조부대로서의 탈출병 추진, 교양자료 배포 등의 문제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더욱이 최후 단계에는 총궐기하여 인민과 더불어 싸우겠다고 약속하였음' - 77. 78쪽
1948년 5월 7일 중앙 올구가 내려오고 3일이 지난 5월 10일 총선거일에 '제주읍에서 도당 대표로써 군책(軍責=김달삼), 組責(조직책=김양근) 2명과 국경측에서 오일균 대대장 및 부관 9연대 정보관 이 소위(이윤락) 등 3명과 모두 5명이 회담하여(2차 대책회의)...(중략), 다음의 결론에 의견일치를 보게 되었음...(중략), 최대한의 협조...(중략), 국경에서는 포위 토벌 작전에 대하여 적극적인 사보타주 등을 합의했다.
이것 역시 4.3사건 발생 이후의 일이지만 국경측 오일균 문상길은 김달삼과 2회나 회동하고, 합의한대로 5월 20일 문 소위 지시로 9연대 병력 43명이 각각 총 1정씩과 실탄 14,000발을 가지고 탈영, 무기 67정, 실탄 3,858발 공급, 6월 18일 박진경 대령 암살로 착착 실행하였다.
'국경호응 투쟁에 관해서는 중앙에 건의한다‘ - 79쪽 라 함은 문 소위가 중앙 지시가 없고 자신은 중앙 직속 세포임을 내세워 병력동원을 하지 않은데 대한 대책인 것 같다. 정부보고서는 이런 문 소위의 핑계를 근거로 중앙당 지령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으나 필자는 이의를 제기한다.
당시 남로당은 국방경비대를 적대시하지 않았고, 국경도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라는 중립적 자세를 견지하던 중이었으며, 부대 내 침투한 프락치 4명 중 2명(정두만은 탈출, 류경대는 군기대 전근 후 반동의 기색)이 이탈, 조직기밀이 누설돼 서로 감시와 긴장이 고조된 상태여서 자칫 병력을 동원했다가 경찰과 경비대원으로부터 협공을 받을 모험을 피하고 싶었을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중앙당 지령이 있었다 해도 문상길의 입장에서 보면 무기의 절대적 열세로 전멸 위험성이 높은 병력동원을 서두르지 않고, 대신 비노출적인 정보교환, 무기공급, 반동장교 숙청 등 제2선 지원활동을 하다가 결정적 우세가 확인될 시점에 동원하여 최소의 희생과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치밀한 계산에서 그런 태도를 보였을 개연성도 있다.
문상길은 사실상 병력 동원만 안했다 뿐이지 탈출병 추진, 무기실탄 공급, 정보제공, 이치업 소령 독살 기도(미수), 박진경 대령 암살 등 적극 협조한 점으로 보아 중앙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의심된다. 왜냐하면 중앙당 지령없이 문상길 단독으로 이런 일들을 단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4.3당일 병력동원이 없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중앙당 지령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그의 행적으로 보아 너무 호의적 해석이다.
결론은 4.3주동자가 직접 작성한 '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3월 중순에 전남도당 올구 이 동무(이명장)가 두 번째 내도하여
제주4.3사건은 남로당중앙당과 전남도당 지령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 분명하다. 공산당 생리상 중앙당 방침에 위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철칙이며, 제주도당 독자적 판단에 따라 단독 결행하였다면 엄중 문책을 받았을 것이다.
(2) 미군정 보고서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도록 명령 받았다.
(1948년)1월 22일 남로당(북제주군)조천지부에서 열렸던 공산주의자들의 불법회의장을 급습한 경찰이 노획해서 번역한 문건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경찰 간부와 고위 공무원들을 암살하고 경찰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침이 발표되었다'...(중략)(C-3),
또, '2월 12일에 경찰과 방첩대는 남조선노동당 본부를 기습해서 1948년 2월 15일에 시작해서 1948년 3월 5일까지 분쟁을 계속하도록 하는 내용의 다량의 전단과 문서를 발견하였다' (B-2)는 것이다.
'이 문서에는 ‘제주도 전역에서의 폭동', ’총선거와 군정반대', ‘인민공화국 수립' 하라는 내용도 있는데 이들 문건들에는 발신자가 없다는 이유로 중앙당의 지시가 아니라고 하면서 (정부보고서)집필자는 중앙당 지령설을 부인하였다.
그런데 이 문서에 있는 '제주도 전역에서의 폭동', ’총선거와 군정반대', ‘인민공화국 수립' 등은 중앙당에서만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들이다' 따라서 이는 남로당중앙당이 전남도당을 경유하여 제주도당에 내린 (첫 번째)폭동지령문이다'라고 나종삼씨는 주장했다. 매우 이유 있는 주장이고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2월 신촌회의에서 무장반격전을 결정한 것은 1월 22일 조천지부의 집회에서 압수한 문서에 나타나 있는 2월 중순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시에 의해서 이루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경찰은 1948년 1월 15일 신촌리 동수동 회의(동수동 회의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룰 ‘4.3의 시기(始期)와 종기(終期)' 단원의 '무장반격전 결정시기' 참조)에 참석한 도당 지휘부를 검거하지 못하고, 신촌리에 가서 겨우 조직부 연락책 김0민 한 명만 검거하는데 그쳤지만 이를 통해 도당 핵심조직을 파악했고, (피검자를 직접 신문(訊問)한 이동규씨 증언 “소문만 무성하고, 삐라에 비추기만 하고, 오리무중이었던 남로당 조직 일체를 파악하게 되었다”는 증언서가 있다) 추가로 1월 22일 비밀집회를 개최한다는 정보에 의해 현장을 급습하여 이덕구 등 106명을 검거하였다.
추가로 1월 26일까지 안세훈, 김류환, 김영(용)관, 이좌구 등 핵심세력들을 검거(김달삼은 검거후 연행 도중에 놓쳤음)하는 등 좌익분자 총 221명을 검거했다. 이를 '1.22검거사건'이라 칭하는데 이들을 수사, 검거, 조사, 수색, 압수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문건이다.
그런데 연행자 중 63명이 곧 방면된 것 등을 들어 정부보고서는 위 두 문건을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시 피검자 중 일부 잘못 연행된 자가 있을지 몰라도 절대 가볍게 볼 문건이 아니다. 혹시 (정부보고서가 제주4.3사건발발과 관련)제주도당 단독결정론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또는 정보 출처 및 신뢰도 분류상 C-3이여서 무시하는 모양인데, 2월 12일 입수 문서는 B-2로 분류되었음에도 (정부보고서는)묵살했고,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 사살에 관한 미군 정보보고도 정확한 정보였지만 C-3으로 분류되었다. ☞4.3특위발행「제주4.3사건자료집」7권 131쪽 참조
☞- '미군 정보보고는 출처의 정확성을 A~F까지, 신뢰도를 1~6까지 분류했음. C-3는 중간 정도로 정보 제공자나 정보 내용이 완전 또는 확실하지 않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 B-2는 상당히 믿을 수 있는 정보‘ 를 말한다.
제주4.3사건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는 두 번 있었지만 두 번 모두 놓쳤다. 아니 당시 정세로 보아 놓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1948년 1월 15일 신촌리 동수동 회의에 참석한 주동자 검거작전의 실패이다. 정보가 정확했고, 별로 어려운 작전도 아니었으며, 지휘부 전원을 간단하게 검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전원검거에 성공했다고 해도 유엔 결의에 의한 '5.10선거 자유분위기 보장' (시민의 언론 출판 및 집회의 자유보장)이라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방침과 미군정당국이 인권보호 차원에서 모두 석방하라는 지시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또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1.22검거 사건 자체도 없었다.
다른 하나는 1.22검거 사건인데 이때 검거자들을 전원 석방하게 된 것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지시 때문이었다. 이들을 일정 기간 격리했다면 제주도의 엄청난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
(3) 일본 문예지「민도(民濤)」
민민전 문화부장이며 4·3주동자인 김봉현이 일본 문예지「민도(民濤)」1988년 여름호 특집∐ ‘제주도 4·3사건 40주년'에서"군사부는 동당(同黨, 제주도당)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정하는 것은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조직책인 것입니다. 그 조직책은 어디에서 파견되어 온 것 입니까?(라는 물음에) 물론 본토인 남로당 중앙당에서지요. 그 사람의 이름은 천 고무상...(중략), 아무튼 남로당제주도위원회의 지도를 했던 사람이 이 사람이지요. 군사 이론에도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실토했다.
바로 중앙당에서 남로당제주도당에 파견된 '천검산'이란 올구가 제주도당 위에서 지도하고 결정하였다는 복수의 주동자 증언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보고서에는)지령서가 남아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앙당이나 전남도당의 지령없이 제주도당이 독자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의도적인 축소왜곡이다.
(4) 제14연대 반란사건 조사과장 김안일 소령 등의 증언
제14연대 반란사건 조사과장 김안일 소령과 조사반장 빈철현 대위의 증언에 의하면
“남로당 중앙당의 김삼룡과 이주하, 남로당 군 특수부장 이재복은 전남도당 위원장 김동백과 제주도에서 강력한 단선반대 무력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재복은 전남도립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는 제주 출신 조경순(20세의 안내를 받아 48년 2월 중순경 제주도에서 경찰의 연행 도중 극적으로 탈출한 김달삼을 만나 “제주도에서 단선반대투쟁만이 남로당이 사는 길이요, 제주도에서 강력히 반대투쟁을 하면 육지부 전국에서 적극 호응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단선을 못할 것이다. 단선을 못해야지, 단선을 하게 되면 남쪽에 반공국가가 탄생하게 되어 남로당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 주요 지시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재복은 레포 조경순으로 하여금 김달삼과 지창수, 김지회에게 지령을 전달하였다고 함”이라고 하였다. 나종삼씨는 이를 남로당 중앙당의 두 번째 지령이라고 했다.
1948년 경찰은 소위 '1.22검거사건'으로 (남로당)제주도당 핵심당원 221명을 검거하는 수사과정에서 2월 15일(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라는 복수(복수)의 지령문을 입수하였다. 조직원의 대량피검과 지령문의 노출 등 위기에 처한 제주도당은 비상 타개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이르렀다. 때마침 중앙당 수뇌부는 당성이 강하고 비교적 조직이 양호한 제주도에서 단선반대 무장투쟁을 전개하더라도 육지부에서 신속한 경찰 지원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이재복을 파견하였다.
이재복은 전남에서 조경순의 안내를 받아 2월 중순 경 제주에 내려와 경찰에 연행 도중 극적으로 탈출한 김달삼을 만나 폭동을 지령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김달삼은 이미 2.7투쟁지령을 받은 상태여서 시기선택 문제를 놓고 2월 대책회의에서 보름간 숙의하던 중 이재복의 지령을 받게 되자 결심하고 신촌회의에서 무장반격전을 제기하여 결정한 것이다.
많은 위험성이 있는 무장투쟁지령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재복(중앙당)과 김달삼(제주도당)은 각자 또는 공통의 계산이 있을 수 있다. 제주도당 자체적 결정이라고 하는 것이 상급당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 항쟁논리에도 부합되며, 사건이 자칫 미,소공동위원회나 남북협상에 정치적 부담이나 쟁점화 되는 것을 피하고 중앙당의 퇴로 확보라는 정치적 계산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1948년 4월 남북협상에서나, 5월 3일 김구, 김일성 회담에서도 제주4.3사건이 한창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일체 거론되지 않았다.
(5)「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김봉현, 김민주가 공편한「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 의하면 '박헌영, 리승협 도당의 그릇된 전략과 전술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방향으로 오도되었다...(중략), 그들의 졸당(卒黨)인 김달삼, 강규찬은 아무런 승산도 없는 지시를 받아 가면서...(중략)'라는 기록은 박헌영과 리승협 등 중앙당의 지령이 있었음을 시인하는 기록이다.
제주도 민민전 문화부장으로 3.1투쟁을 직접 주도했고, 4.3을 항쟁이라 주장하는 사람 스스로 '지시를 받아 가면서..' 4.3을 일으켰다고 했으니, 바로 이것은 남로당 지령을 자인한 것이다.
(6) 남로당중앙당 및 전남도당 올구가 구국투쟁위원회에 직접 참여
- <별표 4>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1948년 2월 25일 (북제주군)조천면 선흘리에서 조몽구(반대), 김달삼, 김완배, 고칠종, 김용관, 강규찬(반대), 고 학 외 7명 등 14명이 모여 남로당제주도당을 '구국투쟁위원회'로 개편하였다. 이때 조몽구와 강규찬은 개편에 반대한 모양이다.
구국투쟁위원회는 결정기관과 상임위원회가 있었으며, 그 밑에 중앙파견 올구 이두옥과 전남파견 올구 조창구 -> 강창욱, 그 산하에 위원장 강규찬, 부위원장에 김용관을 두고 그 예하에 군사부(김달삼, 산하에 부연대장 김희탁과 경리과, 정보과, 작전과, 병기과, 통신과, 의무과를 둠), 총무부(이좌구), 부녀부(김양근), 농민부(김완배), 청년부(고영수), 선전부(고칠종), 조직부(김양근)을 두었다.
총무부 산하에는 보급과(이귀환)와 재정과(이순우)를 두었는데 이들에게는 일본과 육지부로부터 자금조달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는 남로당전남도당이나 중앙당은 물론 일본에서도 자금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이좌구는 (일본으로 도피 후) “일본거주 신촌출신을 주로 상대해서 물자조달을 해 오곤 했어”라는 증언과 북제주군 조천면 함덕리 무당의 딸 김서옥은 (무장)유격대를 돕다 위험해지자 1948년 8월 경 일본으로 피신한 후 “일본에서도 산 쪽(무장유격대)으로 보낼 물건을 마련하기 위하여 희사를 받으려고 자꾸 모임을 가졌다”는 증언이 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직장에 양문필, 도청에 이정석, 경찰에 이기도, 군대에 문 중위(문상길)를 프락치로 편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상은 바로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한 단계로 진입했으며 중앙과 전남에서 올구가 파견되어 위로는 결정기관과 상임위원회를 조종, 감시하고 밑으로는 위원장, 부위원장, 군사부 및 조직부를 직접 지휘하였으며 직장, 도청, 경찰, 군 등 각계각층에 세포를 침투시켜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올구들이 중앙당과 전남도당의 지령을 가지고 제주도당에 내려와서 지령을 전달했고, 지령대로 추진되는지를 조종, 감시한 것이다.
나. 4.3발발 후 남로당 지원
(1) 남로당 중앙당 및 전남도당 올구의 활동
1948년 10월 24일 남로당제주도당 구국투쟁위원회는 제주읍 월평리에서 회합하여 9연대에서 탈영한 군인들을 투입한 구국투쟁위원회를 '혁명투쟁위원회'로 개편하였는데, 혁명투쟁위원회 편성은 중앙파견 올구 김서옥을 정점으로 바로 밑에 전남파견 올구 이창욱을 두고 그 밑에 투쟁지도부(김용관, 김양근, 김석환)와 위원장(김용관, 기동대장 김두선 무장대원 30명)을 두어 군사령(이덕구), 인사과(김대진), 총무부(김두봉), 선전부(김석환), 조직부(김양근)을 지휘하였다.
4.3상황이 긴박해지자 의사결정의 신속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앙당이 파견한 올구가 제2의 위치에서 최상부층에 위치하여 직접 지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남로당중앙당과 전남도당 올구가 제주도당 최고위직에 앉아 직접 지휘하였으니 지령문제나 4.3행동주체에 남로당중앙당과 제주도당 이 제외될 수 없는 것이다.
(2) 조직 수습책 파견
(1949년 6월 7일 이덕구가 사살된 후) 제주도당 조직 체제를 수습하기 위하여 중앙당에서는 인천지구에서 김서옥을 차출하고, 전남도당에서는 여수지구에서 김서옥을 차출하여 궤멸된 제주도당 당세를 어떻게든 복원해 보려고 수습책을 파견(같은 해 6월경)한 것이다.
(3) 노력 인민 보도
1948년 7월 남로당중앙당에 보낸 답신 '중앙당위원회 메시지에 답함'이라는 남로당제주도위원회 명의 답신 중 '조국의 민족주권 방어의 초소를 문자 그대로 사수하려는 우리들의 불굴의 투지는 상급당부의 옳은 지도 밑에'라고 상급당(중앙당과 전남도당)의 지도(지령)를 실토했다. 이 답신 말미에 '남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 답신에서 '상급당부의 옳은 지도'라는 말은 곧 상급당의 지령과 지도를 받아 행동했다는 뜻이다.
(4) 북한 인민군 체제 도입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1948년 6월 18일부터 7월 15일까지 제5차 조직정비를 하면서 유격대원은 501명으로 대폭 확대하고 무기 148정, 실탄 7,740발로 무장을 강화하는 한편, 남로당제주도당(도 군사령부)과 산하 30(3.10)지대, 3.1지대, 4.3지대, 50(5.10)지대에 각각 정치부원을 배치했다.
'정치부원들은 배치된 부대사령관이나 부대장들의 사상을 검토함과 동시에 부대에서 중앙당의 지령을 준하는 지 감시하였다. 정치부원들은 1948년 2월 8일 북한 인민군이 소련 군사체제를 도입하여 생겨난 부산물이며 제주도인민유격대 내 정치부원의 등장은 남로당중앙당의 직접적 개입을 보여준다. 남로당중앙당은 북한 인민군의 새로운 군사체제를 제주도인민유격대에 도입하였다. 남로당전남도당은 북한의 군사체제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다. 평양 및 박헌영의 동향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하여 1월 12일 덕수궁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월 22일 소련이 38선 이북에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자 2월 26일 유엔소총회에서 선거 실시 가능지역에서의 선거에 관한 권한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게 부여 하였다. 이처럼 남한 단선(單選)이 결의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모스크바는 물론 평양의 소련군정과 김일성, 박헌영 그리고 남로당중앙당이 가만히 낮잠만 잔 것은 절대 아니다. 모스크바나 평양의 소련군정 그리고 북한에 있는 박헌영이 제주4.3을 직접 지령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스티코프 비망록'이 말하는 것처럼 소련군정은 모스크바에 보고 또는 승인을 받아 북한을 민주기지로 삼았고 '한반도 소비에트화'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남한의 단선(單選), 단정(單政) 저지는 물론 제반 문제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지령을 꾸준히 내렸다. 또한 서울 남로당은 이 지령을 받는 즉시 전국에 하달하였으며, 이는 제주도당의 말단 읍,면 세포까지 하달되었다. 4.3발발 전과 후를 일별해 보면 남로당 중앙당의 배후에는 북한과 소련군정이 깊숙이 개입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 - 쉬띄꼬프 일기(스티코프 비망록) 1946년 12월 2일자
'(남조선노동당)대회는 허 헌을 남조선노동당 위원장으로 선출하다. ...(중략), 박헌영은 향후 행동방침에 대한 지령을 허 헌에게 하달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북한에 있는 박헌영이 서울에 있는 남로당 위원장 허 헌에게 지령할 권한을 부여한 것이며, 12월 7일자에는 '로마넨코를 접견하다. 그의 구좌에 있는 돈 122만 루불에 대해 논의하다. 그 돈을 박헌영에게 전달하고 구좌를 정리하라고 명령하다. ...(중략), 특별히 필요한 곳에 122만 루불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전문을 박헌영에게 보내라고 지시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이정 박헌영 일대기」
「이정 박헌영 일대기」일대기에 의하면
(가) 1948년 1월 28일 남로당중앙위원회는 유엔한국위원단에 유엔 결정을 반대하는 항의서를 발송하였고
(나) 1948년 3월 19일 남로당중앙위원회는 남한 단독선거 분쇄를 위한 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제주도당이 이 성명서 내용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 바로 4.3사건인 것이다.
(다) 이러한 지령이나 움직임은 박헌영이 김일성이 제공한 경호원을 대동하고 1946년 10월 하순 38선 이남인 개성에 잠입하여 1주일 가량 체류하면서 조선공산당 간부를 접촉하는 등 집요한 대남 공작을 펼쳤고, 12월 6~7일 평양 소련군정으로부터 받은 남조선혁명자금 39만원과 122만 루불을 자금으로 하여, 1947년 1월 '대남사업해주연락소'를 설치하고 금촌에 중부(中部), 연천에 서부(西部), 양양에 동부(東部) 연락거점을 만들고 개성, 동두천, 강릉 등지에 남부(南部) 연락거점과 아지트를 구축하였으니, 고정 배치된 연락원을 통하여 남로당 및 산하 조직에 각종 투쟁을 계속 지령하였다.
(라) 스티코프 비망록(아래 참조)에 의하면 <1947년 1월 4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을 앞두고 김일성, 치스타코프(치스치아코프) 대장, 로마넨코 소장 등 3명이 연해주의 스티코프를 방문해 소위 '4자회담'을 하는 중에 스티코프는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 지도부 창설문제를 거론하면서 박헌영의 월북 사실을 공개하고 북한에서 활동하게끔 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김일성은 그렇게 할 경우 박헌영은 남한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이것은 박헌영이 계속 남로당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남쪽 혁명운동에만 전력하도록 하려는 김일성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제는 1949년 조선노동당이 결성되고 김일성이 당 위원장으로 선출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것은 소련군정과 김일성이 공모하여 박헌영을 대남활동 전담책임자로 못 박아 둔 것이다. 즉 제주도당에 내려오는 남로당의 각종 지령은 북한에 있는 박헌영의 지령인 것이고, 박헌영 뒤에는 김일성과 소련군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4.3발발 후 지하선거 지령이다.
'이북 박헌영의 지시는「이남에서 비밀리에 선거인의 선거를 하여 선거인을 해주까지 파송하라」는 것이었다.' 이 지령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지하선거를 실시하였다.
☞ ※ 테렌티 포미치 스티코프
⇒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부사령관, 북한주재 초대 소련특명전권대사,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측 수석대표를 재임하는 동안 사실상 북한을 주무른 최고 실력자이다. 그의 비망록은 ①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의 노력으로「발굴 자료로 쓴 한국 현대사」227~309쪽에 <발굴, 스티코프 비망록>이란 제목으로 게재되었으며, 1996. 5. 6. 중앙일보사가 발행하였다.
이 비망록은 1946년 9월 5일부터 1948년 10월 2일까지 다루고 있으며, 소련군정의 내막은 물론 남한에서 1946년 8월부터 추진한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 3당 합당 문제에 적극 개입한 것을 비롯, 박헌영이 수시로 소련군정 당국자에게 제반문제에 대한 자문이나 지시를 구하고 소련의 지시명령에 의해 남로당이 움직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1차 자료이다. ② 또 하나는「쉬띄꼬프 일기」전현수 편저 2004,12.30.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하였다.
(2) 진중일기(陣中日記)
1948년 12월 12일부터 1949년 8월 16일까지 4.3진압작전에 직접 참전했던 이 윤(李潤)상사가 매일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진중일기」1949년 2월 20일자에는 '인쇄기까지 설치하여 소위 인민일보라는 신문까지 발간하면서 제주-평양간에 실시간적으로 무전 연락을 취하여 평양에서 지령하는 선전을 매일 매일 도민에게 주입하였다.
또, 50년 7월 25일 유격대가 중문면 관내 하원리를 습격, 99동의 가옥을 방화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8월 1일자 평양신문에 보도되었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건이 6일만에 평양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면 한라산 유격대와 이북 간에 무전이 아니라도 어떤 형태로든지 연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증언도 있다.
증언자는 사건발생 일년 후 철원에서 군 복무 중 우연히 한 민가에서 평양신문에 난 중문사건 기사를 읽었다는 것이다. 이는 유격대가 북한과 교신 가능성을 내비친 증언으로서 4.3발생 이후의 일이긴 하지만 중요한 내용이다.
☞ ※ 6·25후 인민유격대 공세(攻勢)
(3) 간첩 성시백의 활동
1997년 5월 26일 북한 '노동신문' 2면에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 렬사'라는 제목의 특집보도에 의하면 성시백(1905~1950, 황해도 평산 출신, 가명 정향명, 정백)은 남북연석회의 직전 김일성의 특사로 김구에게 파견되는 등 김일성으로부터 최고의 신임을 받는 자로서 1947년 2월 서울에 도착하여「조선중앙일보」「광명일보」등 10여개 신문을 발간 선전선동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근로인민당 등 5개 정당을 시작으로 10개 정당과 그 산하 14개 단체를 흡수하여 조직한 '13개 정당협의회'를 결성한 후 통일전선을 형성 투쟁하고, 국회, 국방부, 각 병종사령부, 사단, 련대, 헌병대, 사관학교, 육군정보국, 경찰 등에 조직선을 구축하여 와해공작, 정보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음을 보도하였다.
특히 해방 당시 남북은 조선은행권 동일 화폐를 사용하다가 북한은 1947년 12월 1일 비밀리에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구 화폐 통용을 금지했다. 남한은 이를 모르고 5개월 동안 지내다가 1948년 4월 25일에야 과도정부 법령 182호로 구 화폐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 5개월이라는 공백기에 북한에서 회수한 구 화폐가 남한의 경제교란과 대남공작금으로 유입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성시백의 활동상은 김일성도 감탄할 정도로 무소불위로 행해졌으며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 정권이 몰수했으며, 곧 화폐개혁을 통해 없앨 조선은행권을 성시백에게 대랼 보내주었다. 성(시백)은 이 돈으로 위장된 방법을 써서 '(조선)중앙일보'와 '우리신문'을 합법적으로 발행했다. 성시백의 이런 활동은 당연히 남로당과 통일전선을 형성하였을 것이고, 어떤 형식으로든지 직,간접적으로 제주4.3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조선중앙일보와 광명일보가 4.3사건 당시 타 신문에 비해 선동적이였음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 ※ - 박헌영(朴憲永, 1900~1956)
① 1946년 5월 4일 조선공산당의 정판사 화폐위조사건이 적발되고 북조선인민위원회 평양보안국 특찰과 11명이 서울에 잠입하여 이승만, 장택상, 김성수, 장덕수 등을 8월 30일까지 암살하라는 지령을 수행하기 직전 경찰에 검거된다. 그래서 미군정청은 9월 7일 조선공산당 간부 체포령을 내렸고 박헌영은 이를 피해 잠적, 은신하다 '장례를 가장, 월북하여 10월 6일 평양에 도착' (스티코프 비망록)하였다.
② 박헌영은 전만 광주에서 은신 중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되자 즉시 상경하여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위를 발족시키면서 같은 날 '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 이른바 <8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이 8월 테제 중 '조선혁명의 현 단계'에서 조선혁명은 제1차 단계인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혁명단계에 있다고 규정하고, 다음 단계인 노동자, 농민 등이 (봉기하여)민주주의적 독재정권으로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제2단계 혁명노선을 제시했다. 이는 같은 날 소련 공산당중앙위원회와 스탈린에게 보내졌다. 이것이 1개월 후 스탈린이 평양의 소련 군정에 그대로 지령된다.
(4) 미군정 자료
(가) 주한미국군사
'남조선의 단독선거가 실시될 것이 명백해졌을 때에 그의 활동은 강화되었고 특별조직책이 육지 본토로부터 파송되었다. 이들에 의해서 공산주의자 침투 전술에 있어서의 첫 번째 강화훈련이 시행되었다. ...(중략), 폭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인민해방군은 약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의 병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중략), 단, 6명의 훈련된 선전책과 조직책이 남조선노동당의 창설을 위해서 육지 본토로부터 파송되었으나 그들은 얼마 없어 500~700명의 동조자만을 확보하였다' 미군정이 6명이라는 구체적 인원수까지 파악했다는 것은 중앙당이나 전남도당에서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감지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나) 주한미육군 971방첩대 월간 정보보고
1947년 7월 28일자 비망록에 의하면 1947년 4월 11일부터 23일까지 한 여자 간첩을 심문한 결과 '국제공산당이 북한 해주와 신의주 근처에 간첩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 학교에서 훈련 받은 제5열 분자들은 러시아에서 훈련받은 장교 3명이 50명씩 인솔, 1947년 3월 1일 남하하여 1주일 만에 38선을 돌파하였고 이들 학교 졸업생 일부는 제주도에 공산테러훈련소를 세웠다'고 한 것은 남로당제주도당에서 북한 지원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 주한미육군 제6보병사단 일일 정보보고
1947년 2월25일~26일자에 '1947년 2월 22일 제주경찰은 북한에서 온 조양신을 체포했고, 그는 소련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으며, 그가 가져온 서류들을 조사하고 있다'라고 구체적 이름이 적시되었다.
(라) 북조선노동당의 편지
1948년 3월 29일 북조선노동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결의한 '남조선노동당에 보내는 편지'에는 5.10선거 저지가 투쟁목표로 되어 있다. 이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 무장반격전을 전개한 것이 바로 제주4.3사건이다.
라. 소련 및 소련군정 동향
(1) 스티코프 비망록(쉬띄꼬프 일기)
소련 제2인자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주다노프의 사위인 테렌티 포미치 스티코프 비망록에 의하면, 1946년 9월 9일 박헌영은 (스티코프에게) '당(黨)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 대하여 스티코프는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9월 총파업은 물론 10.1대구폭동을 지령하고, 200만 엔과 300만 엔을 각각 지원했으며, 당시 제기된 각종 구호라든지 전술이 스티코프의 직접지시나 명령에 의해 일어났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9월 총파업은 스탈린→연해주 군관구 25군사령부→평양 소련군정으로 연결되는 지휘계통이 조선공산당(남로당)에 직접 지시를 내려 그 결과로 발생된 것이며, 10월폭동(대구폭동) 역시 연해주 군관구사령부가 직접 개입한 것임이 드러났다.'
스티코프 비망록 1946년 9월 26일자에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남민전)으로 하여금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좌익 석방, 테러 중지를 요구할 것, 1946년 9월 28일자에는
①경제적인 제(모든) 요구,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미군정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성명할 것, ②남조선 파업투쟁 상황에 대해 스탈린 동지에게 암호 전문을 보냈다'(보고했다)는 기록이 있고, ③미군정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수립하려 하자 소련군정이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남민전)에 <인민위원회로의 정권이양>으로 맞설 것을 지시한 사실과 ④남쪽의 선거 진행 상황에 대해 박헌영과 허 헌이 스티코프에게 보고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소련군정이 남한 정세에 상당히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티코프가 지령한 구호는 시차를 두고 그대로 말단 제주도당과 그 산하 조직에 하달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앞서「3.1절 기념투쟁과 발포사건」의 '3.1절기념투쟁 추진과 군정당국의 대응'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가) 1947년 2월 25일 남로당 제주읍위원회 선전부가 각 야체이카(세포=공산당이 비밀운동 조직의 기초단위로 지역, 직장, 기관, 단체. 대개 5~10명의 소조직이며 세포회의와 세포대표가 있음)에게 지령한 '3.1기념캄파(캠페인=운동)에 관한 건'에서 “모든 정권은 인민위원회에 넘기라!”고 되어 있다.
(나) 같은 날 민청읍위선교(民靑邑委宣敎) 지시 제1호 조선민족청년동맹 제주읍위원회 선전교양부가 지령한 선전, 선동요령에도 “민주주의 애국자를 즉시 석방하라! 우리들의 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기라!”는 주장은 좋은 예다. 다시 말해서 1946년 9월 26일과 28일 스티코프가 지령한 내용이 1947년 2월 25일 고스란히 남로당제주도당과 민청제주읍위원회를 경유하여 말단 야체이카까지 전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 이보다 앞서 1947년 1월 12일부터 22일 어간 도내 각 읍면 민주청년동맹 결성 시 '박헌영 체포령 즉시 철회와 조선일대의 민주애국투사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미군)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결의'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를 통한 지령에 의해서 추진된 것이다.
(라) 또 '「비망록」에 따르면 스티코프는 1946년 9월 24일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어떤 답변을 주어야 할지 스탈린에게 지령을 요청했고, 이틀 후 소련군정 민정사령관인 로마넨코에게 “남조선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소련군정이 좌우합작에 명백히 반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대구폭동이 진행 중인 10월 21일 소련군정에 대해 박헌영은 “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 전화했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달라. 가까운 시일에 농민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고 소련군정에 요구했다. 이런 사실들은 10월 대구폭동 역시 소련 군정과의 교감 하에 박헌영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좋은 예라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소련군정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을 지령하면서 모스크바의 승인을 얻어 자금 500만 엔을 두 차례 나누어 지원했으며, 남로당은 소련군정이 전략에 따라 지령받은 구호와 투쟁전술대로 실행하였으며, 그 연장선에서 남한 단선(單選)저지 지령도 남로당중앙당과 전남도당을 경유하여 남로당제주도당에 하달되었다.
(마) 1947년 3.1투쟁을 전개함에 있어 위 두 사건(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을 연계하라는 지령이 제주도당에 하달되었다. 남로당제주도당의 가장 강력한 전위행동단체인 조선민주청년동맹제주읍위원회 선전교양부가 1947년 2월 25일 자 하달한 '3.1운동기념캄파(캠페인) 전개에 관한 건'(3.1절 기념투쟁지령문) 중에 '10월 인민항쟁(대구폭동)의 의의와 성질을 해설할 것, 입법위원 절대 반대! 우리의 지도자 박헌영, 허 헌 선생,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구호로 연결된 것이었다.
- 9월 총파업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된 후 제24차 회담을 끝으로 5월 6일 무기 휴회하게 되자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 약칭 남로당)은 파업, 테러, 기타 반정부 활동을 산발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全評)
공산주의 혁명 주력군 프롤레타리아를 조직, 동원하기 위해 1945년 11월 5~6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남북 40여 개 지방의 노동자 50여만 명의 대표 505명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박헌영, 김일성 그리고 레온치오 파리국제노동조합 비서, 쿠스네초프 소련동맹노동조합 비서, 모택동 중국공산당 수령, 왈렌숄드린 영국노동조합 비서, 힐맨 미국노동조합 비서 등 7명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하고, 집행위원장에 허성택을 선출했다.
- 10.1 대구폭동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 약칭 남로당)은 1946년 5월에 접어들면서부터 정판사화폐위조사건, 조선공산당 대변지의 정간 처분, 조선공산당 간부 체포령 등으로 포위망이 좁혀오자 투쟁방식을 전환했다.
- 1946년 10월 1일 대구역전에서 전평 지휘 하에 남조선파업공동투쟁위원회 주도로 15,000여 명이 시위하다가 쌍방(진압대와 시위대)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 10월 2일, 시위대는 대구역전에 재집결하여 시위를 하다가 대구경찰서를 포위하는 등 사태가 심 상치 않았다. 그러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이 출동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 소요사건은 경남북, 전남북, 충남북, 제주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방 화와 살상, 무기를 탈취하였다. 10월 2일 달성에, 10월 9일에는 경주와 영일지역까지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조선경비대와 미군까지 출동하여 사태를 진압시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명피해 다수의 경찰관서 및 행정관서가 불타는 등 피해가 컸으며, 계속해서 전국적으로 사건이 확산되어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다.
10월 7일, 조병옥 경무부장의 발표에 의하면, 피해 경찰서는 대구, 영천, 군위, 왜관, 성주, 선산, 경주, 의성이며, 경찰관 사망 33명, 중경상 135명, 경찰가족 사망 1명, 부상 33명이고, 폭도측 피해는 사망 17명, 부상 22명, 검거 636명 등이다. 계속해서 10월 15일 조병옥 경무부장의 발표에 의하면 검거자가 3,782명에 달했다.
이 소요사건을 그들은 '10월 인민항쟁'이라 불렀다.
9월 총파업과 10.1대구폭동은 노동자 해고, 생필품 절대부족, 생활고 등 주민불만이 고조된 때여서 폭동 발생 요인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소련군정은 이런 상황을 포착하고, 2회에 걸쳐 500만 엔을 직접 지원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쌀 1가마에 15엔 정도였으니 정말 큰 금액이었다.
(2) 소련점령군의 사실상 군정 실시
소련군은 군정을 실시하지 않고 민정을 실시했다고 선전했으나, 이것은 표면만을 앞세운 설명에 지나지 않았다. 레베제프(레베데프) 스스로 “소련군은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에 지주와 자본가가 없는 국가, 즉 사회주의체제를 건설하려는 의욕을 갖도록 고취시켰다”라고 말했는데, 그러한 목적을 위해 북한의 각 지역에 개설된 소련군의 군경무사령부(軍警務司令部)가 주동적 역할을 수행했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군 군경무사령부의 존재는 민주적인 사회조직사업과 민주적인 사회개혁을 방해하는 반인민적인 세력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라고 했던 점은 소련의 치밀한 계획 하에 군정을 실시하면서 북한 단정을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령은 문서 이외에 암호, 구두, 전보, 표시, 낙서, 그림, 신호, 봉화, 성명, 편지, 신문, 방송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어 있고, 문서인 경우에도 접수 직후 소각 인멸하는 것이 원칙이며, 그것도 보안유지상 필요한 사람에게만 1:1로 직접 전달하고 지령자나 전달자 또는 수령자를 묻거나 밝히지 않는 게 철칙이다. 따라서 지령서 등 직접적 증거가 없다고 이를 부인하는 것은 억지다.
위에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4.3(사건)을 전후하여 교통이 불편한 제주도에 남로당중앙당과 전남도당에서 올구가 상주한 목적은 관광이나 휴식이 아니고 중차대한 사명을 띠고 내려왔다. 단순한 연락이나 입회자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꼭 올구가 내려올 필요가 없고 연락원이면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남로당중앙당이 타시도에 하달한 지령중에 제주도가 제외되거나 누락된 경우가 전무하다.(사실상 제주도(島)는 도(道)로 승격된 후에도 전남도당의 지휘를 받았음)
전라남도에 속한 군 단위 조직에 불과함에도 중앙 올구가 계속 파견되었다는 것은 김달삼의 장인인 남로당중앙당 선전부장 강문석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큼 제주도를 중요하게 여겼고 남로당 세력 또한 강력했음을 말한다. 그리고 상급당 올구는 상급당의 전권대사와 같아서 그의 결정은 절대적이다. 모든 문제는 중앙당 또는 전남도당의 올구가 결정하였다는 (남로당 핵심간부)김봉현 등의 증언은 남로당중앙당이나 전남도당의 지령책임으로 충분하다.
좌파에서는 올구의 역할을 입회자 정도로 축소하고 있으나 이는 지금의 눈으로 판단해도 상식 이하의 해석이다. 국회의원이나 법원 판사들처럼 독립된 기관도 아니고, 명령계통이 엄격한 군이나 검찰, 경찰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행정기관에 근무했던 사람이라면 조직생리상 상급기관에서 조직지도원이 파견됐다면 그의 방침에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으려면 반드시 사전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물며 공산당의 생리의 연장선에서 보면 (그것도 비상시국 전시(戰時) 하에)상급당에서 파견된 올구는 절대적 권한을 행사했던 것이다.
(2) 김일성 신년 성명
1949년 1월 13일 구좌면 투쟁위원회 명의 '면민에 호소함'이라는 삐라 내용 중
'인류해방의 은인이며, 평화의 보장자이며,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백방으로 원조하는 소련군은...(중략), 38선은 깨뜨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깨뜨리고야 말 것입니다...(중략), 김일성 수상은 1949년 1월 1일 신년벽두에 성명하기를 멀지 않은 장래에...(중략), 미제를 철수시키고 매국 단정(單政)을 타도하기에 인민군은 저력을 다할 것...(중략), 김일성 수상 성명서가 구체화될 날도 시간문제이며 인민군이 원수를 섬멸시킬 날도 가까워졌습니다'라고 하여 친소련 시각을 분명히 하였고, 이듬해 발발한 6.25를 정확히 예고하였다. 남로당제주도당은 이를 확신하여 조금만 견디면 된다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당시 교통, 통신시설 수준과 섬이라는 제주도의 특수성을 감안해 볼 때) 북한에서 성명한 내용이 불과 13일 만에, (그것도 면단위인) 구좌면당에서 전단으로 살포될 만큼 지령전달체계가 신속, 정확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4.3사건이 진행되는 전과정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할 때 소련은 위성국 확대전략의 일환으로 북한정권수립은 물론 이를 한반도 전체에 확대하려는 의도를 꾸준히 전개했으며, 북한 정권은 이를 충실히 따랐을 뿐만아니라 박헌영을 통하여 대남 공세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남로당은 해방 직후부터 남한을 북한과 같은 체제에 편입시키려는 적화기도를 끈질기게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당과 전남도당의 지령에 의해 제주도에서 발생한 것이 4.3사건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라도 4.3사건은 무장한 유격대가 1948년 4월 3일 경찰관서 습격, 통신시설 파괴, 정부 및 우익인사을 살해한 것이 발단이었다. 남로당중앙당은 1948년 2월 초순 경 경찰관서 습격, 통신시설 파괴, 정부 및 우익인사 암살 등 폭력투쟁을 전개하라는 소위 '2.7구국투쟁' 지령을 제주도당에 내렸다. 이 지령을 받은 제주도당은 바로 '2월회의' 또는 '신촌회의'라고 부르는 '대책회의'에서 2.7구국투쟁을 구체화하는 결정을 한 것이다. 상급당으로부터 2.7지령에 대한 취소나 중지 지령이 없었으니, 설령 4.3에 대한 구체적 지령이 없었다고 가정해도 2.7투쟁의 연장전으로 제주4.3사건을 일으킨 것이니 남로당중앙당이나 전남도당의 지령이 있었다는 해석에 무리가 없다.
이처럼 제주4.3은, 소련 스탈린의 한반도 소비에트화 전략→이를 충실히 수행한 평양의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적화전략, 박헌영의 대남지령→남로당중앙당 및 전남도당의 지령→남로당제주도당의 폭동 반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만약 38선 이북에 공산주의의 소련군이 아니고, 연합국 영국군이 진주하여 일본군 무장해제 책임을 수행했다면 제주4.3사건이나 6.25는 일어나지 않았다. 즉 '스탈린 만세!‘와 '김일성 만세!'를 불렀던 4.3주동자들이 친소련, 친스탈린, 친북한(정권), 친김일성, 친박헌영, 친공산주의를 주장했고 행동했으며, 이들을 배후 세력으로 하여 반(反)유엔, 반(反)미군정, 반(反)대한민국, 반(反)자유민주주의 무장투쟁을 전개한 것이 바로 제주4.3사건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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