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증보판>김영중의 내가 보는 제주4.3사건
5. 3.1절 기념투쟁과 발포사건
-
- ※ 미·소공동위원회 회의
-
- 1946. 1. 16 ~ 2. 5.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
- (1946. 2. 8. 북한의 사실상 정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
- (1946. 3. 5. 북한 토지개혁법령 공포, 3월 중 시행완료)
- 1946. 3. 20 ~ 5. 6. 제1차 미소공위(제24차 본회의)
- (1946. 6. 3. 이승만 정읍 발언)
- 1947. 5. 21 ~ 10. 18. 제2차 미·소공위(제62차 본회의)
- 미국 주장 - 반탁세력도 임시정부에 참여(표현의 자유보장, 인구 2/3 배제는 부당)
- 소련 주장 - 반탁세력 임시정부에 완전 배제(공산세력만 참여)
가. 3.1절 기념투쟁의 추진과 군정당국의 대응
1947년 3.1절기념투쟁은 남로당중앙당의 지령에 의한 전국적인 상황이었다.
3월 3일자 조병옥 경무부장의 담화에 의하면 3.1절 당일 '전국적으로 사망자 16명, 부상자 22명, 합계 38명의 인명피해(제주 사망 6명, 부상 8명 포함)가 발생할 정도로 치안 상태가 어려웠다. 제주도내 3.1절 기념투쟁 상황과 남로당제주도당이 내린 지령문 6건(3.1절기념집회 전 4건, 발포사건 후 2건)과 미군정 당국의 조치사항을 일자 순으로 살펴본다.
(1)제1차 지령서 '3.1운동기념투쟁 방침' 하달
1947년 2월 16일 남로당제주도당은 '3.1운동기념투쟁 방침'을 하달하여 산하 각급 인민위원회, 민청, 부녀동맹 등의 좌익단체 대표로서 각 읍,면과 부락 및 직장 그리고 학교에서 '3.1절 기념준비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지시하고, 당일 복장은 전투식으로 하며, 집회 장소에 인민위원회기를 들고, 구호는 인민위원회로의 정권양도, 박헌영 체포령 철회, 인민항쟁관계자 석방, 입법의원 타도,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즉시 실천, 남조선노동당의 깃빨 아래로의 인민의 결집 등으로 할 것이며, 특히 3.1운동을 10월 인민항쟁과 현 정세에 결부시켜 민주주의임시정부(이는 인민민주주의임시정부, 즉 공산주의임시정부를 말한다) 수립에의 방향으로 전 인민의 진로를 밝힐 것을 지령했다.
이 지령의 핵심은
① 3.1절기념준비위원회를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산하의 인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 조선부녀총동맹 등 좌익단체의 대표자로 조직하도록 하였다.
② 3.1투쟁을 1946년 10월 인민항쟁(10.1.대구폭동)과 현 정세에 결부시켜 민주주의임시정부(공산주의임시정부) 수립에의 방향으로 전 인민의 진로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다.
③ 각 마을 및 직장에서 각종 대중 집회를 가지고 농민위원회, 조선민주청년동맹, 조선부녀총동맹, 노동조합, 기타 독서회, 연구회, 문화써클 등의 좌익단체 조직 강화를 도모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④ 선전 선동 및 해설사업의 자료는 좌익계의 선전 문헌인「조선근대혁명사」와「해방」에서 취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⑤ 표어로 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 정권을 인민위원회로의 이양, 인민항쟁관계자 석방, 박헌영 체포령 철회, 남조선노동당의 깃발 아래로의 인민의 집결 등을 내세웠다. 그리고 지령서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3.1절을 맞아 국민의례적인 기념식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를 기회로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2) 3.1절기념준비위원회 결성
2월 17일 제주읍 김두훈 가(家)에서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 학교, 단체 등 각계각층을 총 망라한 인사 다수가 모여 '3.1절기념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안세훈, 부위원장에 현경호, 오창흔 2명을 추대하였으며, 총무부, 재무부, 재정부, 선전선동부를 설치하고 위원 28명을 선정하였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선전선동부를 둔 것이다.
(3) 제2차 지령서 '남조선노동당제주도위원회의 서한' 하달
2월 20일에는 '남조선노동당제주도위원회의 서한'으로 각 가두(街頭) 농촌 야체이카(세포)에게 '3.1운동기념투쟁방법'을 하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 세 항목으로 되어 있다.
(가) 3.1운동기념투쟁방법 중,
'시위행렬을 합법적으로 못하는 시(時)에는 당 독자적으로 강행할 것임으로 각 세포에서는 당 지도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게 하기 위하여 특별대표를 선정하여 저놈들의 주목을 끌지 않게 할 지어다(24일까지 완료)'
(나) 3.1기념해설사업의 요령
(다) 3.1운동기념투쟁의 목표 중,
'우리들은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미군정과 타협하여 우리 민주진영을 분열, 파괴, 약화시키는 기회주의자들에게 속지 말고 인민투쟁의 피투성이 속에서 나온 남조선노동당을 지지하고, 그 지도하에 쉬지 않은 투쟁을 전개함으로서, 또 사회노동당을 위시한 일체의 기만적 회색분자들을 소탕하며, 우익이라 칭하는 반동분자들을 철저히 숙청함으로써만이 우리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라고 지령하였다.
이는 집회 및 시위가 불허되어도 도당(島黨) 독자적으로 감행할 방침임을 분명히 하고, 삼상회의 결정의 실천, 남로당의 지지 및 회색분자 소탕, 우익 반동분자의 철저한 숙청 등 남로당 노선에 조금이라도 방해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 즉 반동분자들을 북조선과 같이 철저히 숙청하여 인적청산을 완성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북한 노선에 따라 현 체제 전복을 위해 작심하고 일을 저지르겠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4.3발발 1년 1개월 전이며, 3.1발포사건 8일 전으로서의 발포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고문치사 사건도 없었고, 응원경찰이나 서북청년도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남조선노동당의 노선에 방해되는 인적청산을 위해 반혁명적인 회색분자를 소탕하고 우익 반동을 숙청하려는 목적이 확실히 존재하였던 것이다.
남로당이 4.3사건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가? 남로당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장애가 되거나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소탕, 숙청, 제거하고 공산주의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행 시기는 오직 국내외 정세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지역적으로는 혁명분위기가 고조 성숙되며, 무장 반격전을 수행할 만큼 자체 역량이 갖추어지면 언제든지 단행하려고 노리다가 1948년 4월 3일이 최적기라고 판단하여 저지른 것이다.
일부에서는 1947년 3.1발포사건과 1948년 3월 6일과 14일에 있었던 고문치사 사건 등 지역적 특수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제주4.3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데, 앞에 설명한 바와 같이 3.1발포사건 이전에 벌써 남로당 노선에 방해되는 인적청산을 위하여 소탕과 숙청(이 말을 진솔하게 표현한다면 다 죽여 없애겠다는 말이다)을 공공연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946년 11월 초 '조선공산당 리승엽과 김삼룡, 조선인민당 리만규, 남조선신민당의 백남운 등 10여 명이 평양을 방문해 북조선노동당의 정치위원들과 비밀회의에서' 결정된 3개 항 중 셋째 항목인 '사회로동당의 창당은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 바로 1947년 '제주도3.1운동투쟁방법'에서 사회노동당을 위시한 일체의 기만적 회색분자들을 소탕하라는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남로당 입장에서 보면 사회노동당은 우호적인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였다.
결국, 3.1기념투쟁은 남로당중앙당의 지령이고, 기회만 주어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동분자를 소탕하고 숙청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1년 후 1948년 4.3사건으로 구체화 된 것이다.
☞ 야체이카(세포)
「세포는 당의 기본조직이고, 전투적 단위이며, 당원 교육을 하는 학교이고, 당과 군중관계의 추세(樞細=핵심적 중추적이며 기본적인 세포)이며, 당의 군중조직 중의 핵심이다. 세포는 공장, 광산, 상점, 기관, 병영(중대), 가도촌(街道村)에 정식 당원 3명 이상 있을 때 성립할 수 있다. 세포의 기본 임무로 7가지를 부여했다. 즉 공산당의 비밀운동 조직의 기초단위로 지역, 직장, 기관, 단체에 부식(扶植)된다. 대개 5~10명의 소조직이며, 세포회의와 세포대표가 있다.
제주도당의 경우 '관공서와 법집행기관, 학교, 우익인사단체 등과 정보청취기관(군,경)에 프락치를 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프락치들의 임무는 관찰과 보고 등의 수동적 역할뿐만 아니라 전복활동을 꾀하는 세포를 적극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
(4) 제주감찰청의 경고
2월 21일, 이런 정보를 입수한 제주감찰청에서는 안세훈외 5명을 초치하고, 상부의 방침과 집회는 각 리,동 또는 읍, 면 단위로 개최하고 개최시에는 반드시 관계 당국의 허가를 얻어야 하며 시위는 절대 금지한다고 통고하였다.
(5) 경고문 발표
2월 22일, 제주감찰청에서는 전날 안세훈 등에게 통고한 내용을 담은 경고문을 발표했다.
(6) 집회 신고
2월 25일, 이틀 전(23일) 결성된 3.1절기념준비위원회 위원장 안세훈 등은 제주도군정청에,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1절기념집회를 하겠으니 허가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미군정 경찰고문관 파트릿치 대위를 만나 상호 의견 교환이 있었다. 당연히 불법집회시위에 대한 엄중경고가 있었다.
(7) 제3차 지령서 '3.1기념캄파에 관한 건' 하달
2월 25일, 당국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로당제주읍위원회 선전부에서는 각 야체이카에게 '3.1기념캄파에 관한 건'을 하달하면서 남로당중앙당 선전부의 지령에 따라 '2월 10일부터 3월 10일까지를 3.1절기념투쟁기간으로 정하라'고 지시하였다.
선동요령으로 농민을 중심으로 한 근로인민들의 자연발생적, 비타협적 혁명적 봉기진출을 지주, 자본가, 종교가를 중심으로 한 대표자들의 타협행동, 무저항주의가 혁명적으로 지도하지 못한데 실패 원인이 있는 것. 혁명과업을 담당하는 세력은 지주, 자본가 계급이 아니라 혁명적인 노동자, 농민계급이라는 것 등을 선전하고, 15개 항에 걸쳐 삼상결정의 더욱 구체적 해설 선전사업을 나열하였다.
그 가운데는 반탁운동을 철저히 분쇄하자, 남조선에서도 북조선과 같은 민주개혁을 즉시 실시하라는 내용이 있다.
결국, 3.1절 기념행사를 빙자하여 노동자, 농민을 신탁통치 지지 및 삼상회의 결정 실천과 인민위원회의 정권접수에 조직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이때 혁명역량은 노동자, 농민임을 명시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 공산혁명완수를 선전토록 하고 있다. 여기서 북조선과 같은 민주개혁이란 1946년 3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단행한 토지개혁을 비롯, '스티코프의 제안, 그리고 소련정부의 수락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8월 10일 단행한 산업,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 등을 뜻하는 것으로서 즉시 북조선노선을 따르라는 주장이다.
(8) 제4차 지령서 '3.1운동기념캄파 전개에 관한 건' 하달
2월 25일, 조선민주청년동맹제주읍위원회 선전교양부가 내린 민청읍위선교지시 제1호 '3.1운동기념캄파 전개에 관한 건'을 하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3.1운동과 10월항쟁의 의의와 성질을 분석, 설명하여 대중을 고무시켜 3.1기념일을 대중을 인입(引入)하는 동기로 삼아야 한다'고 남로당원 배가운동 기회로 이용하라는 점을 직설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입법의원 절대반대, 삼상회의 즉시 실천, 우리들의 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 즉시 철회하라.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우리의 지도자 박헌영, 허 헌 선생, 김일성 장군 만세! 등을 표어로 정하였다.
제주읍에서 거행하는 3.1절 기념식에서 평양에 있는 김일성을 우리의 지도자로 칭했을 뿐만 아니라 왜? '김일성 장군 만세!‘가 등장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추가적 설명이 필요없다.
스티코프는 1946년 9월 26일 북조선주둔 소련군사령부 산하 민정총국 사령관 안드레이 알렉세이예비치 로마넨코에게 '민주주의민족전선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령의 취소, 감옥으로부터 좌파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한다)'하도록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3.1운동기념캄파 지령문에 나타난 것이다.
이 외에도 '1946년 8월 12일에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민전)중앙위원회가 발표한..(중략), 산업국유화가 북한에서 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도 실시되어야 한다'는 선언, 즉 민주개혁요구,
12월 12일자 스티코프가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남민전)에 지시한 행동방침 중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 요구',
8월 28일~30일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동하여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2일 째 김일성이 행한 연설문 '남조선에도 북조선과 같이 철저한 민주주의 개혁을 실시하며 그러므로써 통일적인 완전 독립국가를 세우는 데 있는 것입니다'라는 민주개혁요구 내용이 고스란히 3.1기념투쟁 지령문에 포함되어 있다.
(9) 북국민학교 집회 및 시위 금지 최후 통고
2월 28일, 제주도군정청은 안세훈외 수명을 재차 초치하여 제주감찰청장 강인수, 제1구(제주)경찰서장 강동효, 미국인 경찰고문관 파트릿치 대위 등이 배석한 가운데 당국의 의견을 설명하고 수석민정관 스타우트 소령으로부터 시위행렬은 절대 금지하고 기념행사는 제주서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거행하라고 최후 통고하였다.
이와 같이 '1947년 3월은 신탁통치 문제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문제를 놓고 좌우익간에 심각한 갈등이 조성되고 있던 터라 1947년 3월 1일 3.1절기념식행사 과정에서 이들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익간에 격돌이 일어나고 군정청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서 사회질서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것으로 예견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항간에서는 좌익에 의한 3월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유포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정청은 3.1절행사를 가급적 축소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남로당의 행동방침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남로당은 '3.1절을 기념하기 위한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남한의 자유주의 내지 자본주의 질서를 파괴하고 미군정을 전복하기 위한 투쟁 방편으로 이용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서귀포경찰서 정보계 책임자로 근무했던 이동규씨의 회고록에 의하면, 3.1절 당일
‘큰 사건이라도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들기에...(중략), 서귀포에 들어오는 서쪽 사거리의 경비가 중요시되었으므로 초년생 순경 1명을 데리고...(중략), 인민위원회 동,서홍(동홍리, 서홍리)청년동맹원 약20명이 제각기 몽둥이 같은 생나무를 한 짐씩 지고 이 길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중략), 그들은 폭동 일보 직전의 무서운 시위대였다. 마침 선두에 서 있던 인물은 학교(서귀공립보통학교) 1년 선배인데 6학년 급장을 하던 H씨였다...(중략), 이 시간에 좌익측에서는 서귀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수많은 군중을 모아 놓고 3.1절기념행사를 올리고 있었다. 그들 몽둥이 부대원들은 그 길로 3.1절 기념식장으로 들어가 각 면에서 온 청년동맹원과 합류, 합세하여 그 몽둥이로 난동을 부린다는 계획이었으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만 보아도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순수한 평화적 기념식이 아님은 물론이다. 집회시위를 불허하든 말든 새로운 투쟁 명분을 만들어 내고 투쟁의 강도를 더욱 높여 미군정을 궁지로 몰아가려는 의도적인 집회 시위였다.
☞ 제주북국민학교 3.1절행사의 합법성?
정부보고서 108쪽에 의하면, 제주경찰사 및 미6사단 정보참모부가 24군단에 제출한 정부보고에는 무허가 집회로 기록되어 있으나, 3월 3일 조병옥 경무부장의 담화(2월 28일, 집회만 허가하고 행렬은 허가하지 않았던 바 (그들이)행렬까지 허가하라(해주라)라고 함에 부득이 집회까지 허가 취소하였는데, 1일 시민이 남산국민학교(북국민학교 誤記)에 모였으므로 집회만 허가하였다), 안세훈(3.1절기념준비위원회 위원장)의 판결문(3.1기념식은 당시 제주감찰청장의 허가를 수(受)한 것으로 인정하고, 무죄를 인정한다) 등을 인용하여 교내집회는 허가되었고, 가두시위는 금지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1947년 4월11일~12일 열린 이경천(李京天, 애월국민학교 교사) 재판에 대한 1947년 4월 14일자 제주신보 보도는 이와 전혀 다르다.
'먼저, 주심으로부터 피고 포고령 제2호 위반(① 3월 1일에 북국민학교에서 불법 집회한 것. ② 동일 무허가 시위 감행하고 투석 등으로 군정에 적대행위를 취한 것. ③ 3월 9일 무허가 집회를 가져 파업을 계획한 것. ④ 3월 15일에 애월국민학교에서 무허가 집회한 것 등의 4항목)으로 기소된 것인데...(중략), 검찰관 스 소좌로부터 증인심문이 있는 다음 주심이 인정함에 피고로부터 '①항목에 대해서는 식전(式典)에 참가하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②항목의 투석하는 등 군정에 적대행위를 취한 일은 없다. ③항목은 본인도 위법이라고 생각한다. ④항목은 역시 무죄라고 생각한다'..(중략)
12일 속개, 벽두 검찰관 스 소좌로부터 '피고는 4(개)항목 전부에 대하여 유죄로 인정한다'는 논고가 있는 후 판결로 들어가 주심으로부터 '②항목만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라고 보나 기타는 전부 유죄로 인정한다'라는 선언이 있음과 동시에 피고에 대하여 징역 8개월, 벌금 5,000원 형에 처한다는 판결 언도가 있어'라고 보도한 것을 보면 시위행렬은 물론 집회도 불법이다.
3.1일사건 관련 한병택에 대한 군정재판에서 “오현중학교에서의 기념식은 귀관이 허락하지 안했는가”라는 물음에 제주경찰감찰청 고문이며 이 재판 검찰관인 파트릿지 대위는 “허가한 바 없다. 본관이 현지에 도착하고 보니 기히 회합이 되고 있는데 속히 기념식을 거행하고 즉시 해산하라고 충고한 바는 있다”라고 답변하였다.
2월 28일, 불허된 집회를 강행하여 3월 1일 이미 집회가 이루워 졌으면 그 시점에서 집회는 불법이다. 경찰은 유혈진압을 피하고 주모자는 사후에 검거하기로 군정과 합의하여 묵인한 것이다. 강제해산으로 인한 부작용, 이미 3만여 명이 모인 집회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불허를 강조해 얻는 실익을 감안하고,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사후 묵인 내지 조속히 끝내고 해산하라는 것을 허가로 해석한 것이 안세훈(을 담당했던) 재판관의 판단인 듯하다.
나. 3.1기념투쟁 참가인원
1947년 3.1기념투쟁은 남로당이 계획한 전국적인 반 미군정 투쟁활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남로당제주도당에서도 동원에 총력을 경주한 결과 놀랄만한 인원이 참가하였다. '각 읍, 면별로 열린 대규모 군중집회는 남로당의 조직적인 활동의 결과이지만 외곽 조직인 민전, 인민위원회, 민청, 부녀동맹, 교원조직, 직장조합 등의 대중운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군정은 사태의 추이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 3.1집회를 가급적이면 불허하고, 제주읍인 경우 외곽지 개최 유도와 시위 금지를 시도할 만큼 긴장하였다.
-
(1) 제주읍 제주북국민학교 참가인원(애월면, 조천면 합류)
-
- - 1947년 3월 4일 동아일보 보도 3만 명
-
- - 3월 10일, 제주도청 파업성명서 3만 명
- - 3월 19일, 조병옥 경무부장 3.1사건 담화문 3만 명
- -「제주경찰사」2만5천 명(조직군중 1만7천, 기타 합하여)
- (2) 각 읍,면 참가 인원(제주북국민학교 참가자 포함)
- -「4.3과 제주역사」35,500명~50,800명
-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102,000명(제주읍 3만, 애월면 1만, 한림면 1만2천, 대정면 8천, 안덕면 3천, 중문면 5천, 서귀면 6천, 남원면 3천, 표선면 4천, 성산면 4천, 구좌면 7천, 조천면 1만 명)
이에 대해 제민일보 4.3취재반이 현지 확인한 바 '한림면과 대정면 참가자는 각 6천명이고, 조천면과 애월면은 제주읍 행사에 합류하였으며, 성산면에서는 아예 행사를 갖지 않았다'라고 명시했다.
확인 여부를 밝히지 않은 안덕, 중문, 서귀, 남원, 표선, 구좌면 등 자체 행사 참가자 수를 절반만 참석한 것으로 추산해도 전도적인 참가 인원은 총 56,000여 명에 달한다. 당시 도내 인구가 27만~28만 명이었으니 노약자, 유아, 일반 부녀자 등을 제외하면 엄청난 인원이다. 미군정 당국은 초긴장 상태로 접어들었다.
다. 불법시위와 경찰의 발포
'3월 1일 오후2시께 기념행사가 끝난 후 군정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가받지 않은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남로당제주도당은 무조건 감행한다는 방침에 의해 각본대로 시위를 강행한 것이다. 시위행렬은 평화적인 시위가 아니고 '북교 입구 경계선 돌파는 문제가 되지 못했다.
식후(式後) 전평기(全評旗)를 든 노조부대를 선두로 하고, 강력한 애월부대를 후미로 하여 5열 종대의 씩씩하고도 우렁찬 가두시위를 감행하였다. 최후 행렬이 감찰청 앞을 통과하려 함에 감찰청이 지휘하는 경찰대와 조우하게 되어 맹렬한 진조전(進阻戰=앞으로 나가려고 하고, 이를 막으려는 싸움)이 전개되어 한 시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기간에 기마경관 2명이 낙마하고, 기마 2필이 꺼꾸러졌(다)'을 정도로 격렬하였다.
그 와중에 한 기마경찰이 관덕정 옆에서 말굽으로 6세 가량의 어린이를 채이는 사고가 나자
(☞ 현장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부산시 금정구에 거주하는 제주시 화북동 출신 김하영(1933년생)씨의 증언에 의하면 “시위대원이 플래카드용 장대를 뽑아 내 말의 항문을 찔러대는 바람에 놀란 말이 이리저리 뛰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어린 소년 1명이...)”,
이를 지켜 본 군중들이 야유와 “저놈 잡아라”는 함성과 함께 돌맹이를 던지며 쫓아갔다. 기마경찰은 동료가 있는 경찰서로 말을 몰았고, 그를 추적하여 경찰서로 몰려드는 군중을 습격으로 오판한 경찰이 발포하여 사망 6명, 부상 6명이라는 돌발 악재가 발생하였다. 이어서 도립병원에 입원중인 동료 경찰을 경호하던 경찰관이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 된 부상자들이 업혀 들어오자 공포감을 느껴 총을 쏘아 행인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것이 '3.1발포사건'이다.
경찰서로 급히 피신하는 기마경찰에게 수백 명의 군중이 함성을 지르고, 돌을 던지며 경찰서를 향하여 몰려오자 경비를 서던 경찰이 당황하여 습격으로 오판, 순간적으로 발포한 불상사였지 다른 의도로 발포한 것은 아니었다.어린이가 다친(아주 경미한 정도) 곳에서 경찰서까지는 약 50여 미터도 안되는 짧은 거리여서 경계를 서던 경찰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다급하고 당황하였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3만여 군중이 지근거리에서 '왓샤‘ 시위를 하며 1시간 이상 위세를 과시하였다. 그 와중에 기마경찰 2명이 낙마하고, 기마 2필이 꺼꾸러지는 험한 분위기에서 어린이가 다치게 되자 수백 명 군중이 50여 미터 정도 밖에 안되는 경찰서로 피신하는 기마경찰을 향하여 함성과 함께 돌을 던지며 몰려올 때 경비를 서던 경찰관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특히, 그 경찰관은 엄청난 대구폭동사건을 직접 체험한 육지부 응원 경찰이었으니, 공포감은 물론 위협을 느끼는 정도나 긴장도는 더 심했을 것이다.
라. 3.1발포사건 직후 남로당제주도당 동향
(1) '3.1사건대책 남로당투쟁위원회' 조직
3월 5일, 남로당제주도당과 제주읍당 상무위원회 간부 수십 명이 제주읍 삼도리 김행백 家(집)에 모여 '3.1사건대책남로당투쟁위원회'를 조직(위원장 김용관, 부위원장 이저행, 지도부 김용관, 조직부 김용해, 선전부 김영홍, 조사부 김영홍)하고, 대정면당의 건의를 토대로 '3.1사건투쟁방침'을 결정하였다.경찰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었고, 남로당으로선 최고의 호재를 얻은 것이다. 남로당으로서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결정적 시기로 판단한 제주도당은 우선 중앙당의 지침이 내려올 때까지 3.1사건투쟁방침을 결정하였는데,
-
① 직장 총파업과 기타 투쟁방법의 지도
-
- ② 당외 투쟁조직으로서 남로당에서 표면화 되지 않은 인사로 '3.1사건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당내 투쟁목표에 결부시켜 민중이 자발적으로 봉기한 것처럼 지도 선동
-
- ③ 1947년 3월 10일 정오(12시)를 기하여 총파업 단행
- ④ 발포 책임자 강동효 서장 및 발포 경찰관 살인죄로 즉시 처형 등의 절대적 조건과
- ⑤ 각 직장별로 적당한 조건을 내세워 성명서 및 결의서를 작성하여 군정 당국 및 관계당국자에게 제출케 하였으며 치안질서를 교란시키는 인쇄물을 작성, 배포하였다.
(2) 제5차 지령서 '3.1사건대책투쟁에 대하여' 하달
3월 7일, 3.1사건대책남로당투쟁위원회는 '3.1사건대책투쟁방침' 문안 작성을 부위원장 이저행에게 위임하였고, 같은 날짜로 각 읍,면당과 제주읍당 야체이카에게 '3.1사건대책투쟁에 대하여'라는 지령문이 하달되었다.
위 지령문의 '투쟁노선'를 보면
'세계에서 어느 나라에도 역사의 어느 시대에도 그 유례가 없는 평화군중에 대한 야수적 발포살인사건으로 인하여 반동분자 및 반동경찰 및 미제에 대한 불꽃이 일어나는 증오감과 투쟁욕, 대중의 앙양되었다는 혁명적 정동(情動), 앞으로 오는 제2혁명단계의 대중투쟁까지 더욱 더욱 조장 발전시키고, 대중으로 하여금 목적의식적인 반제반팟쇼투쟁으로 할 수 있게, 또 당의 혁명지도하에 자기부정적인 조직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강력한 투쟁태세를 준비하고, 반동분자, 반동경찰 및 미제의 반인민적 정책을 여지없이 대중적으로 분쇄하기 위하여 이 3.1사건의 기회를 옳게 포착하여 지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삼상회 결정은 즉시 총체적으로 실시하라. 민족의 당, 애국의 당, 남조선노동당 만세! 전농(全農)의 토지개혁을 즉시 실시하라'고 선동하였다.
3.1사건의 기회를 옳게 포착하라, 제2혁명단계의 대중투쟁으로 발전시키라, 반제반팟쇼투쟁으로 할 수 있게 하라, 모스크바 삼상회의 즉시 실시(찬탁을 말함), 남조선노동당 만세! 이런 주장만 봐도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해방이 되고 1년 반이 지났으며, 4.3발발 1년 1개월 전인 3.1투쟁 시기에 제2혁명단계까지 조장 발전시키자는 그들의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남로당제주도당의 근본 목표였다. 이러한 목표는 뒤에 설명하겠지만 1945년 8월 20일 박헌영이 발표한 '8월 테제'와 이를 보고 받은 스탈린의 9월 20일자 내린 비밀지령문과 그 내용이 똑같다.
☞ 제2혁명단계
이는 1905년 레닌의 저서「두 가지 전술」에서 밝힌 이론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레닌의 연속2단계혁명론'이라고도 불린다.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면 제1단계로 혁명역량이 열악한 경우 대중을 널리 규합할 수 없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그대로 내세운 것을 피하고 파시즘에 대하여 민주주의를 옹호하려는 진보적 부르조아 계층까지 포함한 계층을 혁명의 주체역량으로 설정하여 먼저 현 지배체제를 타도한다. 즉 주(主)타도 대상을 제외한 대부분을 동맹세력으로 포섭하여 그들과 함께 혁명을 완성한 다음 제2단계로 부(副)타도 대상(전술상 일시적 동맹세력으로 포섭한 부르조아 세력)을 제거하여 명실공히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혁명을 완수한다는 이론이다.
(3) '3.1사건대책위원회‘ 조직
3월 9일, 이와 같은 지령문을 받은 남로당 각 직장 세포원들은 각 직장 책임자로 하여금 당원으로 표면화 되지 않은 인물을 추대하여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제주읍 일도리 김두훈 家(집)에 모여 불법 밀회 후 '3.1사건대책위원회‘를 조직(위원장 홍순용, 부위원장 안세훈)하고, 일반민중 및 각 직장요원으로 하여금 정당한 투쟁이라는 감을 주게 하는 등 선전, 선동을 강화해 나갔다.
남로당은 당내와 당외 투쟁조직을 이중으로 두었다. 당외 투쟁조직의 결성의도와 인선 방침을 보면 민중봉기로 위장하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 제6차 지령서 '6개항 지령문' 추가 하달
3월 10일, 남로당제주도당이 각 야체이카 앞으로 지령문이 하달되었는데 모두 6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총파업에 대응한 농촌 및 가두세포 활동의 건
② 조사정보 수집의 건
③ 3.1사건 투쟁기금 확립의 건
④ 연락선(線) 확립에 관한 건
⑤ 주간보고 및 3.1투쟁보고 독촉의 건
⑥ 농민위원회 조직 건 등이다
이 농민위원회 조직 지령문 중에는 북조선과 같은 토지개혁을 남조선에도 곧 실시하라며 농민위원회 조직의 급속화를(주장 추진할 것을) 지시하고...(중략), 농민을 유혹하기 위한 선전 슬로간을 제시하고 있다.
3.1발포사건 직후 주동자 김완배(남로당제주도당 2대 농민부장)를 검거하고, 그가 가지고 있다가 압수된 문건 '3.1기념행사의 진상보고'를 보면 남로당은 기념식 참가 단체들을 '부대'로 호칭하였고, 미군정당국을 '원수' 또는 '적'으로, 투쟁활동을 진조전(進阻戰=앞으로 나가려고 하고, 이를 막으려는 싸움), 공격전, 종전(終戰) 등 '전쟁‘으로 표현하였다.
'오중(오현중학교) 교정에는 제농(濟農), 오중(五中), 제중(濟中), 배중(培中=하귀중학교 전신) 교양(敎養) 각 부대가 모여 있었는데 고녀(高女)부대와 합류한 노조부대가 모든 악조건을 배제하고 삼엄한 경계선을 돌파하여 오중 교정에서 합류가 성공되었다. 여기에 특기할 것은 부동(婦同=부녀동맹)부대가 단독으로 무장경관, 기마경관 등의 각종 비열한, 그리고 강력한 저지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 경계선을 돌파 오중교정에의 합류에 성공한 것이다‘
‘오전 11시 경, 오중교정에 모인 각 부대가 제농(濟農)부대를 선두로...(중략), 경관트럭에 탄 다수의 무장경관의 결사적 저항 저지를 용감히 물리치고 이중삼중의 포위진을 분쇄, 돌파하여 삼양, 동문교(東門橋) 등지에서의 각종 저지의 경계선을 돌파한 동부대(東部隊)와 합류한 후, 한천교(漢川橋), 서문교(西門橋) 등지에서의 삼엄한 경계선을 돌파한 서부대(西部隊)와 동쪽으로 북쪽으로 모여든 각 부대와 관덕정 앞 광장에 합류한 것이다'
'우리는 이 원수의 적을 완전히 복수, 소탕할 것을 맹세한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 우리의 적이 누구임을 알게 되었다' ‘견적필살의 강력한 기세를 항시 집중, 공격전을 전개하여 적으로 하여금 반격의 틈을 타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왕성한 투쟁태세를 가지고, 준동하면 언제든지 한다는 기세로 적에게 보여 완전히 적을 굴복시켜야 한다' ‘완전 종전(終戰)되기 전에 적을 업수히 보고 승리감에 빠져서는 아니된다'등인데,
여기서 '우리는 이 원수의 적을 완전히 복수(復讐) 소탕할 것을 맹세한다'는 결의는 바로 1년 1개월 후에 발생할 문제의 제주4.3사건을 예고한 것이다.
마. 3.10총파업
남로당제주도당의 3.1사건투쟁방침에 따라 3월 10일 도내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제주도청, 기관단체, 학교, 우체국, 운수회사, 은행, 전기회사 등 166개 기관, 단체 41,211명이 참가하는 총파업 사태를 야기했다.
이 과정에서 '3월 13일부터 17일 어간 조천, 중문, 대정, 한림, 애월면에서 항의 집회 시위에 참가한 인원이 총 6,000~9,000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동향과 남로당 및 동조세력의 급속확산을 사전에 파악한 미군정 당국은 도내 경찰 330명의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치안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부득이 육지부 경찰력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정부보고서는 '느닷없이 응원경찰을 불러왔다‘는 식으로 기술했지만 당시 치안상황이 위급하고 걱정되었기 때문에 2월 23일 충청남북도에서 100명을 차출한 응원경찰이 최초로 제주에 들어오게 되었고, 3.10총파업 후에는 3월 15일 전라남북도에서 222명, 3월 18일 경기도에서 99명을 증원받게 되었다.
사회 분위기가 점차 악화됨에 따라 당국에서는 사태진압에 조급한 나머지 부족한 경찰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공산당의 폭정을 체험하고, 이북에서 월남한 서북청년들을 추가로 불러오게 되었는데 이들에게 최소한의 식비 지급 대책도 없이 서둘러 제주도에 파견됨에 따라 민폐와 횡포를 잉태했고,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더구나 3.1발포사건 후 “좌익측은 경찰관이나 그 가족들에게 물도 주지 못하게, 상품도 팔아주지 못하도록 일절 상대를 못하게 하는 한편, 경찰 가족에게는 철없는 어린이들을 시켜서 입은 옷에 더럽다고 침을 뱉게 하는 등 고립화 수법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이 계시는 우리 집(중문지서 바로 앞에 위치)에도 좌익측에서 수화불통(水火不通)시키겠다고 먼 올레(집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에 가시를 쌓겠다”는 등 온갖 회유, 협박과 험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문지서 직원이 집단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직장 이탈사태로 나중에 경찰관 66명이 파면 처분'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4.3발발 후 일부 군인이 탈영하여 (무장)유격대와 합세하게 되자 제주출신 경찰관 및 군인들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제주도 파업사태가 매우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미군정청은 제주도 자체에서 수습능력이 부족함을 인식하였다. 3월 14일 조병옥 경무부장이 급거 내도하여 19일 이도할 때까지 시국강연회, 담화문 발표, 각 기관 및 도내를 순시하는 일방, 주모자 검거를 지시하는 등 중앙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자 파업사태는 일단 수습국면으로 전환되었다.
3.1집회시위 및 3.10총파업과 관련 재판에 회부된 자는 모두 245명이다. 이중 127명은 징역 3월~1년형을 받았으며, 그 중 실형은 57명, 나머지는 집행유예, 벌금형은 111명으로 1천원~1만원, 과태료는 7명으로 900~1,500원의 처벌을 각각 받았다.
☞ - 서북청년회(서청)
서청은 3.1사건 직후부터 제주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하나 정확한 시기와 횟수, 인원은 알 수 없다. 다만 1947년 4월 10일 발령 받은 유해진 도지사가 부임하면서 서청 7명을 경호요원으로 대동하였다는 기록, 김봉현의「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53쪽에,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4.3직전까지 각 읍면에 760명이 배치되었다'는 기록, 1947년 11월 2일 제주극장에서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위원장 장동춘)가 결성되었고, 1947년 11월 18일 서청단원이 모금운동 과정에서 도민을 구타, 협박한 일로 임원이 미군방첩대에 찾아가 재발방지 약속과 사죄하였다는 기록 등을 보면 1947년도에도 다수 내도한 것으로 보인다. 또, 4.3직후인 4월 8일경 최치환의 인솔로 서청 200명이 파견되자 이미 와 있던 서청 인원을 추가하여 총 278명으로 전투경찰대(대장 홍순봉)를 편성하였다.
이로 미루어 서청출신으로서 교사나 경찰, 행정기관에 이미 취업한 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서청단원 전원은 이때 경찰로 편입되었다고 보는데 무리가 없을 듯 하다. 왜냐하면 이들이 갈 곳은 경찰 이외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3발발 이전 입도자는 200여 명 이내로 보이며,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거주 김시훈(1924년생)씨에 의하면, 자신은 1948년 12월 1차부대 200명과 함께 들어왔으며 그 후 2차, 3차부대가 들어왔지만 그 인원은 몇십명에 불과하다는 증언이 있다.
아무튼 서청이 최초 파견될 당시에는 나라가 궁핍하여 밥값조차 주지 못한 연유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며,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4.3진압에는 공을 세웠지만 1948년 11월 9일 도 총무국장 김두현을 고문치사 하는 등 크고 작은 횡포를 자행하여 도민들이 공포에 떨었던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