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보고서 536쪽에는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라고 하여 4.3의 주체를 남로당제주도(島)당으로 국한시켜 남로당중앙당과 전남도당을 제외시켰으나 이는 축소왜곡이다.
제주4·3사건의 주체는 '남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전라남도위원회 및 제주도위원회)과 그 휘하의 인민유격대(별칭 인민해방군) 등 좌익집단이었다' 남로당중앙당이나 전남도당이 주체에 포함되는 문제는 제6항 '남로당중앙당 및 전남도당의 지령과 배후세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남로당제주도(島)당 등 당시 도내 좌파세력에 대해 살펴본다.
가. 제주도 좌파의 태동과 성장
한일합방 후 제주출신들은 공장노동자나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는데 그것도 공산주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으며 제주인들이 많이 사는 오사카(大坂)에 집중되었다.
'당시 오사카에 거주하는 제주인은 약 4만여 명에 이르고...<중략> 일본 관사이(關西) 지방에서 사상운동에 종사하는 제주인은 약 400여 명에 달하고...<중략> 일제 당국에 의해 요시찰(要視察),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분류되었다. 항상 미행과 감시를 받고 있던 제주사람으로 산북(현 제주시 지역)지방 사람은 약 80여 명이고, 산남(현, 서귀포시 지역) 사람은 약 25-6여 명 정도였다.
지식인들은 새로운 이론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일본에서)동포들의 참상을 목도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족의식이 고양되었다. 자연히 일본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서클, 노조에 가입 활동하게 되었고 그 활동은 바로 동포 계몽운동이고, 노동운동이며, 반일운동이고, 독립운동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일부는 일경에 피검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들은 서울과 제주를 왕래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게 되었고, 일본과 서울 유학생 중에는 제주도내는 물론 전남, 더 나아가서 전국적으로 그리고 일본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장종식(북조선5도인민위원회 북조선행정국 교육국장,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간부부장), 강문석(경성콤그룹 멤버, 조선공산당 선전부장 중앙위원, 민전 중앙위원, 북조선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김달삼 장인), 고경흠(고려공산청년회일본총국 기관지 편집, 출판위원, 여운형 비서, 건국준비위원회 서기국장, 장안파 공산당 창당멤버, 북조선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제3차 조선노동당대회 중앙후보위원), 고순흠(무정부주의자, 오사카자유노동연맹 창립, 뒤에 재일거류민단 결성준비위원장), 김응빈(전평준비대표자회의 전형위원, 조선공산당서울시책, 6.25때 조선노공당서울시당위원장, 금강정치학원장), 고준석(남조선정치공작위원회위원, 저술가), 김명식(조선유학생학우회<회장 신익희>간사부장, 동아일보 창간 멤버 논설위원),
송성철(여운형의 큰 딸 여연구의 남편, 재건일본공산당중앙위원 후보위원, 민전중앙위원, 북조선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북한 외무성 아주국장, 북경주재 북한대사관 참사관), 강창보(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토건노조활동), 김달준(신간회 오사카지회 간사), 김문준(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오사카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 간사이지방협의회 집행위원장), 김시용(고려공산청년회일본총국 기관지 편집 및 출판위원), 김택수(조총련 오사카 본부 상임의장단), 송종현(조선공산당전국대표자대회 전남대표), 조몽구(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조선인회 중앙집행위원), 현호경(일본공산당 오사카시위원회 책임자)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반일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신지식인들로서 인기있는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이 귀향하여 지역 유지들과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아 의숙(義塾), 야학, 소년단, 청년회, 강연회, 운동회, 독서회, 학예회, 소비조합, 농민조합, 문예활동 등을 통하여 향학열에 불타던 젊은이들에게 전혀 접해 보지 못하던 새롭고 신선한 이론과 민족의식을 교육하는 일방 해녀항쟁 등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치면서 도민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게 되었다.
☞ 신유의숙(신유(義塾)
의숙 가운데는 1921년 가파도 출신 김성숙(김성숙, 일본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 졸업, 재일본조선유학생 회장, 해방 후 김규식 노선을 취하다가 조봉암, 서상일, 신 숙, 이동화 등과 진보당 창당 멤버, 전진한과 한국사회당 창당, 제5대 국회의원 당선)이 가파도에 개설한 신유의숙이 유명하다.
교사로는 장종식, 김한정, 이신호, 송종현, 이도일 등이 거쳐갔으며, 1980년 3월 30일 남한에 위장 침투하여 남한조선노동당중부지역당 지하공작지도부를 구축하고 암약하다가 월북한 이선실(본명 이선화, 가명 이화선, 이옥녀, 신순녀, 북한 서열 22위, 국기훈장 1급, 영웅칭호 받음)도 신유의숙 출신으로 장종식의 제자였다. 외딴 섬 가파도에 있는 의숙이 왜 유명하게 되었느냐를 생각해 보면 우선 출중한 인물 김성숙이 있었고, 외딴 섬이라 일경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남로당제주도당 핵심자의 증언
① 남로당 제주읍당 세포 , 일본 도피자 김시종
“나는 4·3을 한 3개월 정도 봤다. 6개월이면 조천까지는 해방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본토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호응해 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당시 제주성내는 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천 등 외곽을 장악해 읍내를 고립시키면 자연스럽게 접수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 이는 1단계로 제주읍 성내를 제외한 제주도 전역을 해방구로 하고, 2단계로 성내(城內, 제주읍 중심부, 현, 제주시를 말함)를 고립시켜 장악한 후 결국 제주도를 남로당 해방구로 하겠다는 말이며 ‘본토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호응해 올 것’을 기대한 것은 여·순반란사건을 예상했거나 그런 정보를 사전 입수한 것으로서 4·3 목적이 항쟁이 아니고 반란임을 증명한 것이다.
② 남로당 대정면당 위원장 이운방
“무장투쟁을 주장한 신진세력들은 정세를 낙관했다. 당시 단선(單選)을 저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상황에서 제주도 봉기는 일종의 기폭제가 되어 전국적인 봉기를 유발시켜 제주도에 진압병력을 추가로 내려 보내지 못할 것으로 파악했다. 경비대는 중립을 지킬 것이고 그러면 경찰력만으로는 진압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 또한 국제문제로 화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진압에 관여하지 못할 것으로 인식했다.”
☞ 이 증언을 보면 4·3주동자들은 제주도 봉기를 기폭제로 하여 전국적인 봉기를 유발시켜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기도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4·3이 단순하게 제주도에 국한된 문제를 초월한 전국적 반란을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③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 연락책 김생민(전향하여 경찰 복무자)
“우리는 북한이 1949년에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다. 남·북에서 양군(兩軍,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를 하면 이젠 국내문제이고, 그러니까 미군이 철수하고 남로당 세력이 강하고 이북에는 팔로군이 들어와 있어서, 국제정세나 국내정세나 모두 유리하다고 보았다. 강경파들은 그래서 무장투쟁을 하며 조금만 견뎌내면 된다고 본 것이고, 온건파들은 ‘우리만 고립 된다’고 반대한 것”이라 했다.
이것은 4·3무장투쟁을 전개하여 1년여 정도만 견디면 북한인민군이 남침하고 그들과 합세하면 공산통일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4·3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4·3은 반란이다.
제주도내 좌파태동을 개관하면
(1)1921년 4월 김명식(조천 조천리 출신, 일본와세대(早稻田)졸업, 1921.1.27. 결성된 ML사상단체인 서울청년회중앙집행위원, 남로당제주도당 활동의 대부)의 지시로 서울 유학생 김택수(제주 일도리), 김민화(조천 조천리), 홍양명(제주 삼도리), 한상호(제주 일도리), 송종현(조천 신촌리) 등이 참여한 ML사상단체이며 항일소년단체인 '반역자구락부'를 조직했다.
(2)1925년 3월 11일 반역자구락부를 해체하고 회원 중 순수한 좌파만으로 새로 조직한 '제주신인회'가 결성되었는데 이 신인회가 도내 좌파의 발원지가 되었다. 참여자는 서울 유학생 장종식(제주 삼도리), 고경흠(제주 삼도리), 김시용(조천 조천리), 강창보(제주 용담리), 김정로(제주 이호리) 등이었으며, 반역자구락부 멤버를 비롯하여 오대진(대정 하모리), 윤석원(제주 이도리-추자), 송종현(조천 신촌리) 등은 가입 활동하다가 같은 해 5월 일부 간부진이 일경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3)1927년 8월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김재명의 지시로 송종현(제주야체이카 대표로 전남도당 전국대의원 후보, 제3차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 구성원)의 주도하에 강창보, 한상호, 김택수, 윤석원, 김정로, 오대진, 신재홍(우도 연평리), 이익우(한림 한림리) 등이 '제3차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조직했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4)1930년 제주청년동맹 화북지부 동맹원 장례식에서 적기(인공기)를 들고 혁명가를 크게 부른 소위 ‘적기사건’이 있었고, 같은 해 구좌면 세화리에서 농민, 청년, 소년, 여성 등 여러 부문운동을 통일적으로 전개하고 운동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혁우동맹(革友同盟)'이 결성된다.
(5)1931년 5월 16일 새벽 애월리 김원희 집에서 강창보를 중심으로 '제4차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결성하였으나 1932년 1월 구좌면 해녀항쟁의 배후 조직임이 탄로나 그해 3월 100여 명이 검거되고, 이 중 23명이 징역 6월에서 5년의 중형을 받는 등 소위 '제주야체이카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 수형자는 김한정(가파), 안구현(도순), 신재홍(연평), 오대진(하모), 이익우(한림), 문도배(세화), 오문규(하도), 강관순(연평), 김성오(평대), 김순종(하도), 김시곤(세화), 한향택(종달), 이신호(하모), 고운선(한림), 김태안(한림), 부태환(신도), 박찬규(이도), 김류환(조천), 김민화(조천), 문재진(삼도), 홍순일(용담), 송성철(삼도), 장종식(삼도) 등이다.
위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조, 자치회, 독서회, 운동회, 연구회, 농민조합, 소년단, 청년회, 부녀동맹 등 많은 단체들이 생겨나면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청년회는 나중에 청년동맹으로 개편되었는데, 1928년 8월 21일 제주청년동맹지부로 발족된 성내지부(고명우), 신촌(유형백), 조천(김순탁), 모슬포(오대진), 함덕(고종건), 가파(김옥천), 10월 28일 발족된 화북(이무형) 등 모두 7개 지부에 창립회원이 모두 534명이었으나 나중에 730명으로 확대됨.
1930년 구좌면의 혁우동맹, 신우면(현 애월면)의 8인동지회, 구우면(현 한림면)의 신창독서회 등 여러 명칭과 형태로 좌파 조직과 사상은 꾸준히 도내 전역 각 마을과 직장에 파급되었다. "공산주의란 건 상상할 수 없는 조직을 가져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라는 증언처럼 해방이 가까워질 즈음에는 잘 교육된 젊고 지도력 있는 계승자들에 의해 각 마을과 기관단체마다 조직이 완료된 상태였으며, 그들은 자연스럽게 도내 여론형성 계층과 교육자 및 지도자급으로 부상하였다.
실제로 해방 당일 중앙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결성되고,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창건 선언 후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됨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9월 22일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위원장 오대진, 제주야체이카 출신)되었으며 인민위원회 및 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 또는 민전)이나 민주청년동맹, 부녀동맹 임원들과 1947년 3.1투쟁 지도부는 이들이 장악했으며 이는 남로당까지 자동 연장되었다.
한편 '1945년 9월 중순경에 공산청년제주도(島)위원회가 결성되고, 12월 9일에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島)위원회가 조직되었다'라는 증언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島)위원회는 1945년 10월 초 제주읍 한 민가에서 일제시대 사회주의운동을 벌였던 20여 명이 참석 결성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들은 1946년 11월 23일 중앙에서 조선공산당(박헌영, 실제 참석자는 책임비서 강 진), 조선인민당(위원장 여운형), 남조선신민당(위원장 백남운)이 통합되어 남조선노동당(위원장 허 헌)이 결성되면서 자동적으로 남로당제주도(島)위원회로 개편되어 제주도 최초 유일 정당이라는 선제적 위치를 점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정치활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 3당을 통합하여 남조선노동당을 창당하게 된 경위는 1946년 10월 22일 (소련의)스티코프가 평양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을 만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위원장에 허 헌(신민당), 부위원장에 박헌영(공산당), 이기석(인민당), 김삼룡(공산당)과 중앙위원 45명, 정치위원 7명으로 구성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보고, 11월 4일 위 세 사람이 재회동하여 당의 이론과 목표 및 과제 등을 논의하는 등 소련의 직접 개입해 이루워진 것이다.
미군정은 '1945년 가을,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공산주의자들의 지하운동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의 운동은 허약한 정부행정 하에 규모나 강도(强度)면에서 성장을 거듭했고, 외부로 공산주의 촉진을 증대시켰다'고 판단한 것처럼 미군정의 엄중 경고에도 불구하고 1947년 3.1투쟁에 전도적(제주지역)으로 51,000-56,000여 명, 제주북국민학교에 25,000-30,000여 명이 동원되었다.
이는 당시 도내 전체 인구(「조선경제연감」서울 조선은행조사부 편 1948년 1-4쪽에는 제주도 인구를 1946년 8월 25일 현재 276,148명, 1948년 1월 1일 현재 281,000명)를 감안할 때 엄청난 인원임을 알 수 있고 이어 3.10총파업에도 경찰과 사법기관을 제외한 166개 기관단체 41,211명이 참여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도민들에게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 무상교육 등의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선동하고 조직화한 결과다. 당시 제주 도민들은 순박하기만 하였지 사상이 무엇인지, 이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즉, 가난하고 순박한 도민들은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무상교육, 부자와 가난한 자 없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다는 달콤한 감언이설(甘言利說)에 현혹되어 그들의 선전・선동을 무조건 따르게 된 것이다.
선동자는 선각자이고, 독립운동가이며, 신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의 후광을 받는 신진세력이었으니 권위가 있었다. 여기에 일제시대 공직자들의 유임, 공직자의 비리와 인권침해, 발포사건 등은 민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공산전체주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 도민들은 멀리 있는 소련군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분단은 나쁜 것이라는 논리는 그럴듯한 반면, '그게 아니다'라는 세력이나 설명은 미미했고 늦었다.
주한미국군사에 '제주도의 약 6만 내지 7만으로 추정되는 주민이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했다. 그들은 주로 무식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농부와 어부들인데,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戰後)의 곤경에 의하여 심하게 혼란에 빠진 결과 남조선노동당이 그들에게 지속적인 경제적 보장을 제의한 것에 쉽게 설득 당하였다'는 미군정 기록은 그 숫자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해도 당시 도내 좌익세력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사점이 있다 하겠다.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는「로마인 이야기」에서 '흔히 인간은 어떤 사람의 생각 자체보다 올바른 행동이나 훌륭한 인격을 보고 그 사람의 생각에 공감하게 된다. 저렇게 인품이 고결하고 훌륭한 사람의 말이라면 틀림없이 옳을 거라고 생각해 버린다. 어떤 사상이 얼마나 널리 퍼지는가는 뜻밖에도 사상 자체의 내용보다는 그 사상을 이야기 하는 사람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은 여기에 적중한 말이다.
1947년 3.1사건 직전 제주도내 좌익세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참고 자료, 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과 제주도민주청년동맹 결성 상황을 자세히 보면 그들이 추대한 명예의장에 김구나 김규식 같은 사람은 없고, 좌파인사 일색인 점으로 봐서 그들의 이념 성향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들은 해방 후 기선을 확보한 유리한 상태에서 오직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 노선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나. 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 또는 민전) 결성 상황
▶ 중앙 : 1946. 2. 23. 조선공산당 등 좌익정당, 사회단체가 모여 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
가. 1946년 7월 22일 평양에서 북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민주당, 천도교 청우당과
15 개 단체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위원회(북민전) 결성.
나. 1947년 1월 12일 조선민주청년동맹제주도위원회(제주도민주청년동맹) 결성.
다. 1947년 1월 15일 경 조선민주여성동맹제주도지부 결성.
▶ 제주 : 1947. 2. 23.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조일구락부에서 도내 읍,면대의원, 사회단체 대표 등 315명과 방청객 200여 명 참석하에 결성. 의장단 김시택, 김용해, 고창무 선출.
명예의장에 스탈린, 박헌영, 김일성, 허 헌, 김원봉, 유영준 추대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은 1947년 2월 24일 상임위를 개최하여 사무국장에 김정로, 차장에 좌창림을 선출했고, 이밖에 조직부장 김정로, 선전부장 좌창림, 문화부장 김봉현, 조사부장 정상조, 재정부장에 김두훈을 선출했다. 가입단체로 민주청년동맹, 부녀동맹, 농민위원회가 있다.
☞ 스탈린 등 명예의장 추대
남로당(산하단체 포함)은 경향 각지에서 어떤 집회나 행사 때 마다 '스탈린 만세' '소련만세'를 불렀으며, 스탈린을 명예의장에 '명예의장'에 추대하였다. 스탈린은 레닌마저도 성정(성정)이 포악하다고 평가한 인물이며, 실제 1,800여만 명이나 죽인 무자비한 독재자인데 위대한 영웅으로 추대하였다. 반면, 남한에서는 어떤 집회나 행사에서 어떤 친미적 지도자라도 '트루먼 만세' 나 '미국 만세'도 없었고, 트루먼을 명예의장에 추대한 사실도 없다. 이러한 남북한 현상을 놓고 볼 때 어느 편이 사대주의적이고, 어느 편이 자주적인가?
다. 제주도 및 읍・면 조선민주청년동맹 조직 상황
▶ 중앙 : 1946년 4월 25일 조선공산당(남로당)은 가장 강력한 전위조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1945년 12월 12일 결성된 조선민주청년동맹(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민청)이
주축이 되어 29개 좌익청년단체를 통합, 조선민주청년동맹을 결성.
▶ 제주 : 제주도 및 읍・면 조선민주청년동맹의 결성상황은 제주도민주청년동맹 결성 현황을
참조하 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1947년 3월 1일 소위 '3·1절기념투쟁'과
'3·10파업투쟁' 등 반미군정 활동의 최선봉군 역할을 수행했다.
도표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제주도민주청년동맹(공식명칭은 조선민주청년동맹제주도위원회, 민청) 대의원을 제외하고, 읍, 면민주청년동맹 결성 대의원 합계만 1,703명이고, 대의원과 방청객 구분이 없는 서귀면, 대정면 참석자 절반(550명)을 대의원으로 추산할 경우 총 대의원 수는 2,253명이 된다.
여기에 당시 남로당원 1천 내지 3천여 명을 더하면 (중복 가입자를 감안해도)그 세력이 막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읍, 면 민청창립대회에서 제주읍, 조천면, 서귀면, 한림면, 애월면에서는 서울이나 평양에 있는 김일성(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박헌영(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 실질적으로 남로당 총지휘), 허 헌(남조선노동당 위원장), 김원봉(인민공화당 당수,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조희영(조선민주청년동맹 위원장), 김택수(제주도민전 부의장, 제주도민주청년동맹 위원장) 등을 명예의장에 추대한 것을 보면 민주청년동맹의 배후 지도세력은 남조선노동당임을 증명한다.
또 민전이나 민청 조직은 4.3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부터 제주도 말단 면 단위 단체 모임에서 서울에 있는 허 헌, 심지어 평양에 있는 김일성까지 명예의장에 추대한 것으로 보아 이는 평양과 중앙에서 말단까지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를 갖추고 동일 목표를 지향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각 읍,면 민주청년동맹 결성대회 내용은 대동소이(대동소이)하였겠지만 기록상 제주읍, 애월면, 한림면 등에서는 박헌영 체포령 철회, 민주애국투사 석방, 인민항쟁(10월 1일 대구폭동 사건) 관련자 무죄 석방, 남로당 절대지지 등을 결의했다는 점은 눈여겨 볼 문제이다.
위와 같이 공산주의 이론으로 잘 무장된 남로당제주도당 지도부와 동조세력은 북한 김일성 정권의 통치이념과 일치하여 그와 힘을 합치면 공산주의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반면, 그와 상반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에 수립될 경우, 분단은 물론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이를 무력 돌파하여 김일성 통치영역으로 통합하려는 단선(單選) 단정(單政) 반대 폭력 투쟁이 제주4·3사건인 것이다.
☞ 민주(民主)라는 용어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청년동맹에서 '민주'라는 용어는 무엇을 뜻하는가? 1945년 11월 18일 김일성은 박정애를 앞세워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을, 11월 30일에는 방수영을 앞세워 기존 공산주의청년동맹(공청)을 해체하고, 북조선민주청년동맹조직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공산' 대신 '민주'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민주'라는 용어가 바로 '공산'과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맑스 레닌주의 논법에 따른 것으로서 그들이 말하는 '민주기지' ‘민주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바로 '공산기지' ‘공산주의' ’조선공산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용어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민족전선‘도 '공산주의민족전선’이요, '민주청년동맹‘도 '공산청년동맹’임은 물론이다.
인민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신민주주의, 진보적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우리나라 헌법이 체택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헌법 제14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와 다른 개념들로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최근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를 쓰지 말고 그냥 '민주주의'로 써야 한다는 일부 주장은 배우는 학생들에게 혼란을 초래하고 헌법 정신에도 어긋난다.
라. 남로당 세력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 중앙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이 결성되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창건을 선언한 후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됨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9월 22일 제주도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1945년 10월 초 제주읍에서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島)위원회가 결성되고,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3당이 남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자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위원회는 자동적으로 남로당전남도당제주도(島)위원회로 되면서 당세가 급속히 확장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945년 10월 발족한 남로당 전신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위원회 당원은 100명 미만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위원회는 '1945년 10월 초 제주읍 한 민가에서 일제시대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던 20여 명이 참석, 결성했다...<중략> 1946년 말까지 섬 전체적으로 당원 수가 100명 선을 넘지 않았다'
(2)1947년 3월 1일 경 1단계 당원 배가운동 결과 1,000 내지 3,000명
'남로당은 원래 대중 정당을 표방하고 나섰기 때문에 초기부터 당원 배가운동을 전개하였다. 1947년 초에 1단계 배가운동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민전, 민청, 여성동맹결성 등 외곽조직의 확산과 함께 추진되었다...<중략>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남로당으로 개편한 뒤 첫 사업으로 3.1절 기념집회를 배후에서 주도하였다. 이 무렵에는 1단계의 당원 확장운동을 거치면서 전도의 당원 수도 1,000명 가까이 늘어났다.
'1947년 3월 7일 조선노동당 제주도위원회가 각 농촌 세포에게 하달한 지시에 의하면, 농민을 대량적으로 당에 흡수할 것, 조건이 허락하는 데 있어서는 전부 입당시킬 것, (단, 이중조직의 방법으로서 투쟁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정식 입당 수속시킬 것)이라고 하여 농민을 대량 남조선노동당에 입당시키되, 조건이 허락하면 전부 입당시키고 투쟁과정을 통하여 정식 당원으로 입당시키는 이중조직 방법을 취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 김생민(金生玟) 증언
- '1947년 3.1절 기념집회를 배후에서 주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전도의 당원 수가 3,000명 가량으로 늘어났다.
포고령 위반 피의자 김완배 소지품 압수 제23호 '3.1절기념행사의 진상보고'에 의하면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1절기념행사는 조직군중 1만7천, 기타 합하면 2만5천이 되는 성대한 군중'이 모였다고 자체 분석하였으니 조직군중 1만7천명 중에는 학생 등 많은 조직이 포함되었지만, 전도적으로 남로당원 3천여 명 가량이라는 김생민의 증언은 과장이 아니다.
(3)1948년 4월 3일 경 2단계 당원 화장운동 결과 5,000 내지 6,000명
'제주 남로당에서도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1947년 5월 21일) 과정에서 2단계 당원 확장운동을 벌였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보면 1948년 4.3봉기가 일어나가 직전에는 당원 수가 5,000에서 6,000명에 이를 정도로 크게 불어 났다고 한다'〔참고자료6〕이런 기록으로 볼 때 3.1투쟁 1년 만에 폭발적으로 당세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4)1948년 7월 말경 3단계 당원 확장운동 결과 30,000명
3단계 당원 확장운동은 4.3이 일어난 뒤인 1948년 초여름 해주대회의 연판장과 지하선거 시행과 병행해 추진되었다. 이 때의 당원 수가 족히 3만 명에 이를 정도로 크게 불어났다.'〔참고자료7〕 여기서 '초여름‘이 언제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으나 지하선거 시행과 병행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8월 2일 김달삼이 제주를 탈출하기 전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7월 말 경으로 추측된다.
(5)1948년 4.3이후 좌익측의 주장은 50,000명
'좌익측이 자랑하는 말에 의하면 남로당 지하에서 숨어서 암암리에 알게 모르게 5만 동무를 확보했다고 했다'
지하선거 참여의 임의성 여부에 의문이 많지만 그들의 5만 동무 확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제주도 지하선거 참가자 52,350명이다. '해주 대회장 앞에 쌓여 있던 남한 각 지역의 연판장 뭉치를 찍은 사진이었다. 이 뭉치더미 속에는 '제주'란 이름이 쓰여진 것도 있었다. 거기에는 서명 숫자가 '5만2천3백50명'으로 표시되고 있다'
남로당원이 3만이나 5만 명이라는 숫자의 신빙성에 의문이 있지만, 그러한 설이 당시 도내에 공공연히 유포되었던 것은 사실이며, 특히 남로당제주도당 산하에는 민주청년동맹, 민주여성동맹, 농민위원회와 기타 동조세력이 제주지역 전도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이러한 현상은 남로당 측에서 당원추가확보, 동조자 규합, 세과시를 위한 좋은 선전, 선동자료가 되었지만, 진압과정에서 그 명부가 노출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내는 부정적인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1947년 6월 6일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에서 발생한 소위 '6.6사건'(좌익 청년들에 의해 경찰관 3명이 죽음에 이를 정도로 집단 구타를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도내 분위기는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
'마을에서 민청모임 등에 참석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그런 시절의 분위기였다'
물론 우익진영의 단체들은 아직 발도 들여 놓지 못하던 시기의 일이었다. 종달리에도 그 무렵 여타 마을과 마찬가지로 30대 후반부터는 인민위원회에, 20-30대 중반까지는 민청에서 활동했으며, 15-19세 사이는 민청 산하의 소년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순박한 도민들을 얼마나 선전, 선동하고 협박했으면, 좌익에 가입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정도의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을까?
북제주군 조천면 함덕리 양정근씨는 그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나는 4.3전에 남로당과 민애청에 가입했었습니다. 당시 남자라면 누구나 그랬습니다. 아니면 따돌림을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자 많은 젊은이들이 산으로 피했습니다. 80%이상이 산으로 올랐을 겁니다...<중략>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된 후)그때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산으로 식량을 올려 보냈습니다. 당시 마을에는 군경원호회가 조직돼 있었는데 모금을 하면 반은 군경 먹이는데 썼고, 반은 산으로 올렸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전도적으로 대동소이했다. 따라서 이상의 모든 정황은 1947년 3월 20일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고서에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좌익정당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는 판단 근거를 제공한 셈이며, 남로당원도 이때 1천에서 3천 여명에 불과하였던 것이 4.3발발 때쯤에는 5천 내지 6천여 명으로, 초여름에는 3만여 명으로 급속히 확장되었다.
더욱이 4.3발발 후 '주민들이 무장대에 협조한 내용이란 주로 식량과 의복 제공, 백지 날인 등이었다. 청년들인 경우에는 '왓샤시위' '도로파괴'에 동원되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주지역 전도에 걸쳐 벌어졌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또, 같은 경로로 입수된 정보이겠으나 장창국 육사 교수부장이 제9연대를 창설하려고 제주도로 내려 올 때 육사 교장이었던 원용덕 소령 댁으로 인사차 들렸더니 '그 때 원 소령은 제주도엔 빨갱이가 많으니 조심해서 잘 해보라고 일러 주었다. 당시 경비대 사령관인 미군 베로스 중령도 만났는데 같은 얘기였다'
진압 당국은 이런 일련의 상황을 판단함에 있어서 도민들이 4.3주동자들로부터 온갖 협박과 선동에 마지 못해 동조하거나 현혹되었다고 선의적 해석을 하기 보다는 부정적, 대립적 선입관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닌가 싶다.
(6)미군정(美軍政) 자료
(가) 1948년 하계까지 제주도 남조선노동당의 당원 수는 최고 50,000명 선까지 이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나) 주한미국군사(駐韓美國軍史) - 약 6만 내지 7만으로 추정, 폭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인민해방군은 약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의 병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 명시된 남로당 가입자 6만 내지 7만명 또는 5만 명은 '열성적인 남조선노동당원이 아니고 남조선노동당이 무엇이며,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제주도민을 동당(同黨)에서 선동, 유혹, 기만, 협박하여 명목상 남조선노동당에 가입시킨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판단한 신상준 박사의 해석에 동의한다.
그러나 도내에서의 지하선거 양상은 육지부에 비해서 활발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특히, 남로당의 5.10선거 방해 책동은 전국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00개 선거구 중 유독 제주도(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만이 과반수 투표 미달(「정부보고서」210쪽, 북제주군 갑구 총선거인수 27,560명 중 43% 투표, 북제주군 을구 총선거인수 20,917명 중 46.5% 투표)로 선거 무효 사태를 초래하엿다는 것은 그만큼 남로당세력이 강력하고 위협적이었음을 증명한다.
※ 문도배 김시탁 기자회견
1946년 12월 15일 독립신보, 서울신문, 자유신문이 보도에 의하면,「지난번 입의(立議-입법의원) 민선의원 중의 인위(人委-인민위원회) 출신이라 하여 유일한 좌익대표로서 내외의 관심을 끌고 있던 제주도 대의원 文道培, 金時鐸 양씨는 10일에 상경하였다는 바 13일에 민전회관에서 출입기자단과 회견하고...(중략)... 우리 제주도 30만 동포는 끝까지 민전 밑에서 더욱 단결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제주도내는 인위가 거의 8할의 인구를 통일하고 있으며」라고 말했다. 4·3주동자 스스로 도민 80%가 스탈린 김일성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한 민전 산하에서 단결한 인민위원회 세력임을 공표하였으니 미군정 당국이 판단은 과장이 아니다.
마. 핵심 세력
(1) 정부보고서 - 무장대 500여 명
(2) 주동자 김봉현 저서 - 3ㆍ1기념투쟁 주동자의 한 사람이면서 오현중 교사를 역임하고 민민전 문화부장으로 있다가 일본으로 도피한 김봉현이 밝힌 '자위대를 선두로 한 가장 애국적이고 열렬한 녀맹원, 아동단원, (심)지어는 백발의 무성한 로인들 마저도 끼여진 3,000명의 무장력'
(3) 존 메릴 논문「제주도 반란」에는 반란군의 주력은 500명 정도였고, 그들이 하산하자 3,000명의 주민들이 이에 가세했다. 3,500명
(4) 장창국의「육사졸업생」에는 총 병력은 무장병 500명과 비무장 1천명, 합계 1,500명
(5) 신상준의「제주도4.3사건」하권 955쪽에는 핵심적 무장 세력인 인민유격대 이외에 부락 자위대를 비롯한 후방 지원세력이 전성기(1948.4-9월)에 3,500명 내지 5,000명 내외로 추정.
(6) 기타 한국군, 경찰, 미군정 문서, 신문 기사,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관련 문서 - 최소 1,500명, 최대 2,000명
이런 기록 가운데 필자는 김봉현이 스스로 밝힌 숫자 3,000명에 신빙성을 둔다. 3.1사건 당시 남로당원 수가 1천에서 3천명이던 것이 불과 1년 만인 4.3직전에 이르러 5천에서 6천명으로 증가하였으니, 그 절반을 주동자 또는 적극 동조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특히, 주한미국군사에도 약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의 병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였으며, 1947년 2월 23일 민민전 및 1947년 1월 12일부터 2월 22일까지 도내 읍ㆍ면 민주청년동맹 결성 시 참가한 2,250여 명(도 대의원과 방청객 제외)이 넘는 대의원들의 이념노선이나 투쟁목표가 4.3까지 변함이 없었으니 김봉현이 실토한 3,000명은 실상에 가장 근사치(近似値)라 하겠다. 그리고 이 이외에 산하 동조단체원도 상당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4.3발발 1년 후쯤 '게릴라의 집요함은 놀랄만 했다. 덧붙여 말하면 무장한 중핵대는 3-400명 정도이고 조직 세력까지 포함하여 대략 3천명으로 추산되는 적지 않은 전력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1년간 진압된 전력을 고려하면 그 이상이라고 해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1949년 4월 1일자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고 1097호 첨부1‘에 의하면 '현재 무장폭도들은 약 250명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산에 은신해 있는 1,000~1,500명의 지원자나 동조자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3월 2일 이래 폭도 지원자 중 300명이 사살 당했고 1,500명이 생포되어 구류중임'이라고 하였으니 피살자와 생포자 1,800명 이외에 잔여 무장폭도 250명, 비무장 지원자 1,000~1,500명을 모두 합하면 3,050~3,550명이 되며, 이때까지 사살된 무장대를 포함하면 이보다 많을 것임으로 김봉현이 말한 3,000명은 절대 과장된 인원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제주4.3사건의 주체는 사건을 일으킨 남로당제주도당과 그 지휘계선상(指揮系線上)에 있으면서 4.3을 지령하고, 지원한 남로당전남도당과 남로당중앙당이다. 그리고 무장반격전에 직접 참가하거나 적극 동조한 세력은 3,000여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