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들이 이상한 것을 잘 믿는 이유는 이들이 바보같은 연유로 갖게 된 믿음을 방어하는 데 아주 뛰어나기 때문이다” 과학자이며 심리학자인 마이클 셔머의 말이다. 실제로 직접 눈으로 보지 않거나 체험하지 않고도 멀리 있는 물체들을 알아맞힐 수 있는 심령술사처럼 관심법을 작동시킨다. 하지만 역사는 다르다. 역사는 존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역사 인식도 역사적 사실 자체를 뒤바꿀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일부 세력들은 제주4.3을 민중항쟁으로 인식시키고 있다. 하지만 제주4.3사건을 민중항쟁으로 인식시키는 것은 객관적이지도 않고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는다. 제주4.3사건이 민중항쟁이라면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정통성을 부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논리의 모순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공산폭동을 누가 민중항쟁으로 미화시키고 있을까?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는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혁명 성격을 띠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아무리 동기가 순수하다고 해도 그 과정이 폭력적이고 용공적이라면 국가는 공권력을 가해 저지시켜야 함은 당연하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공권력은 이데올로기의 혁명을 통해 대체질서를 수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특수한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특히 북한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반제, 반미를 부르짖으며 민중항쟁 운운하며 체제를 전복시키려 했다면 더욱 그러 하다. 왜냐하면 인류공영의 실현을 기치로 하면서 등장했던 각종 이념 중에 자유민주주의 만큼 실현을 통해 그 우수성이 검증된 이념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민중(民衆)'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일반 대중'을 이르고 있지만 역사를 창조해온 직접적인 주체이면서도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한 사회적 실체를 지칭하며 대개 저항적인 늬앙스를 함의하고 있다. '맞서 싸운다'는 '항쟁'이란 용어도 일반적으로 ‘운동’이라는 말보다는 더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대응 방식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산당은 언어 선점에 성공했다. 실제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 혁명 전선에서 자주 쓰고 있는 '항쟁'이란 용어도 민중사관, 수정주의 사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른바 재야세력의 역사재조명 작업의 하나에서 나온 것이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일관되게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들이 쓰고 있는 '제주4.3은 민중항쟁이다'라는 논리대로라면 제주4.3사건은 만들어진 역사다. 민중항쟁과 폭동은 다른 방향에서 본 같은 사건의 다른 용어라는 논리의 모순에 귀착된다. 따지고 보면 제주4.3이 민중항쟁이라면 폭도라는 말도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민중항쟁의 투사는 폭동의 폭도와 다르게 부르는 같은 이름이다.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봐도 그렇다. 말 그대로 제주4.3이 민중항쟁이라면 4.3의 피해자들은 '신념에 찬 투사'들이다. 민중항쟁의 투사들이라면 피해보상이나 배상을 요구하기보다는 자긍심을 먹고 사는 것으로 족하면 될 것이다.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무고한 양민'이었을 때만이 쥘 수 있는 권리이다. 그럼에도 양손의 떡을 다 먹겠다는 억지는 4.3에서 화해와 상생을 어렵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1948년 2월 6일 유엔이 '가능지역 내의 선거실시에 관한 권한'을 유엔 한국위원단에 부여하는 결의 채택에 따라 그 해 5월 1일부터 5월 10일 이내에 가능지역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선언문을 발표, 제헌 국회의원 선거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48년 5월10일 대한민국 건국선거를 실시하기로 공포했다. 선거일이 공포되자 남로당은 당원을 총 동원해 2월 7일 5・10선거를 반대하는 폭동(2・7폭동)을 일으켰다. 제주 4・3폭동은 2・7폭동의 연장선에 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김달삼의 명령에 따라 책임자들은 오름마다 봉화를 올렸다. 바로 제주4・3사건의 신호탄이었다. 한라산 봉화를 신호로 전도의 빨치산 무장유격대가 일제히 지서를 습격했다. 이렇게 제주4⋅3폭동은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시에 무장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1982년 평양 조국통일사가 펴낸 대남공작 역사책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제주4.3인민봉기'라는 제하에 1948년 4월 3일부터 5월 9일까지 발생한 제주도 좌익반란의 내용들이 그대로 기술되어 있다. “미제의 남조선 단독선거를 저지 파탄시키기 위한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에서 폭발한 적극적인 투쟁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인민봉기였다” “(중략)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한라산과 주변 봉에서 일제히 봉기를 알리는 햇불이 올랐고 총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인민유격대는 한라산에서 일제히 내려와 경찰지서 습격과 반동을 처단하는 투쟁을 벌렸다” 제주4.3사건에 대한 이런 내용만 봐도 지금의 제주4.3의 역사는 과거 좌파정권의 묵시적 시인 아래 '민중항쟁 사관으로 만들어진 역사'라고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쨌튼 아픈 역사도 역사다. 문제는 지금의 4.3의 역사가 '민중항쟁'이라는 입장에서 대한민국에 저항하는 반정부적인 성격을 띠면서 접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말살시킬 수 없는 그 민족의 혼이다. 버린다고 없어지거나 지운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 발자취가 아무리 수치스럽다고 해도 역사로 기록되고 간직될 수밖에 없다. 역사의 그림자가 굽어진 채 비춰지고 있다면 진실 규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정권에 따라 펴졌다 굽어졌다 비춰지고 있는 4.3의 그림자도 그 연장선에 있다. 4.3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반대하기 위해 남로당이 조직적으로 일으킨 공산폭동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진단이 정확해야 바른 처방을 기대할 수 있다. 4.3에 대한 접근법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바르게 인식하고 미래지향적인 화해와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할 이유다.
'제주4.3의 정립(正立)'이라는 기치를 들고 '제주4.3 정립 연구 유족회'가 발족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때려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가장 핵심적인 출발점인 4.3사건의 성격규명이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 확립이라는 전제하에 진실한 4.3의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들과 “대한민국 건국 희생자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고 추념하며 진압과정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선량한 도민에 대한 신원과 추념 및 보상에도 적극 노력” 한다는 등 창립 선언문에 나타난 의지도 인상적이다. 수도거성(水到渠成)이란 말도 있다. '제주4.3 정립 연구 유족회'의 발족을 환영하며 이를 계기로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길을 찾는 디딤돌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