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는 말
1948년 4월 3일 발생하여 마지막 공비 오원권을 생포한 1957년 4월 2일까지 만 9년 동안 제주도 인구 28만 중 15,000여 명이 전쟁도 아닌 지역에서 이념 대립으로 무참히 희생된 제주 4ㆍ3사건은 제주도 유사 이래 최대 비극일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미ㆍ소냉전과 좌우대립의 산물이라 하기엔 너무 엄청남 상처요 슬픔이다. 해방 공간 건국 과정에서 비록 혼란기였다고 하지만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한 일은 깊이깊이 반성할 일이다. 예부터 삼재(三災)도라 칭해지던 이곳 사람들은 많은 자연적 재해와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시달려 왔다. 고난과 슬픔의 역사였다.
1946년 공산주의자가 일으킨 10ㆍ1대구폭동과 2ㆍ7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자행한 폭력성을 지켜본 국민들은 점차 그들에게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과는 남로당의 끈질긴 방해책동에도 불구하고 1948년 5ㆍ10선거를 무사히 치렀다. 반면 제주도는 이러한 흐름에서 이탈했다. 고립된 지역이라 정보에 어두웠던지 아니면 남로당의 솔깃한 선전ㆍ선동과 협박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국내외 정세에 어두웠고 본토(육지부)민의 민심동향과 흐름을 읽지 못하였다. 결과는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유독 제주도(3개 선거구) 2개 선거구에서 선거무효라는 무모한 사태를 초래했다.
필자는 여기서 중앙당과 전남도당이 제주에서 4ㆍ3을 일으키도록 부추긴 자를 증오하고, 그들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순종한 제주도당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한탄한다. 악성 포탄을 터뜨려 놓았으니 건국을 위해 진압을 해야겠고 여기에 선량한 주민과 유격대원들을 구분하지 않은 토벌이 행해지면서 민심 이반이 발생하고 이는 대량 인명피해를 초래하는 악순환으로 연결되었다. 더하여 북한의 6ㆍ25기습남침은 설상가상 예비검속 광풍으로 억울한 희생자를 더 많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주 4ㆍ3을 일으킨 많은 주동자들은 북한이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월북자는 김일성에게 충성하였고, 6ㆍ25남침에 동참했다. 일본으로 도피한 일부는 조총련에 가입하여 북한에 동조하였으며 자진하여 북송선을 탄 사람도 있다. 월북자나 북송자들(참고로 총 북송자 93,340명 중 조총련 86,603명, 일본인 6,731명, 중국인 6명이다. 이 중 제주 출신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이 북한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한민국에서의 삶보다 낫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고 많은 사람이 숙청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숙청자 중에는 독립운동가도 포함되어 있다.
그 사람들이 지금 와서 냉정한 시각으로 판단할 때 과연 자신의 이념과 행동이 옳았는가를 자문해 본다면 아마도 후회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예견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사건을 일으켜 놓기만 했지 수습이나 책임을 지지 않음으로써 수많은 도민들의 귀중한 목숨을 잃게 한 책임도 있는 것이다. 주동자가 책임을 지고 죄 없는 수많은 도민을 살렸어야 도리다. 4ㆍ3주동자 조몽구는 해주대회에 참석한 후 북한의 실상에 실망하여 6ㆍ25 때 월남, 부산에서 은신 중 경찰에 검거되어 복역 후 고향에서 살다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는데 아마도 북한에 남아 있다가 숙청된다는 것을 미리 예견한 유일무이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유족들은 한을 안고 살아왔다. 양쪽의 주장과 감정의 골이 깊게 마련이지만 이제 사건 발생 64년이 지났다. 앞으로 산적한 일들이 많은 이 지역 좁은 사회에서 과거의 부정적 감정과 갈등에 매몰될 것이냐, 아니면 도민들이 미래를 위한 넓고 성숙된 마음으로 화합하여 새 출발해야 할 것이냐를 놓고 그 선택을 강요받는 시점에 와 있다. 특히 상대방에게만 잘못을 인정하라고 한다면 화해가 어렵다. 우리 모두는 우선 남북 분단현실을 직시하고 대한민국 정체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서로 냉정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너의 잘못도 있지만 내 탓은 없었는가도 되돌아보는 마음으로 화합하고, 용서하고, 상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4ㆍ3당시 서북청년으로 경찰에 재직했던 김시훈씨가 2009년 4월에 쓴 회고록「소외된 전선 한라산」에서 '미안합니다. 당시 대다수의 제주 도민들을 진압의 대상으로 삼아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서북청년단을 대표하여 이제 늦게나마 사죄드립니다'라고 한 것과 2009년 8월 26일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에서 백조일손회와 만벵디유족회가 주관한 예비검속자 영령 합동위령제 때, 국방부에서 700만 원을 지원하고 이상희 국방부 장관이 추도사를 통하여 '전쟁 와중에서 군에 의해 발생한 불행한 사건으로 희생을 당한 분들의 명복을 삼가 빌며, 유가족에게 심심한 위로를 드린다'고 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평가한다. 서로 이런 움직임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 화해와 상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화합하고 앞으로 나아갈 소명이 있다 하겠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표를 계산하는 정치인이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4ㆍ3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뒤로 물러 서는 게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겠다. 존경받는 지도자와 중용적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사심과 편향된 시각을 버리고 예지를 모아야 한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4ㆍ3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다수결로 처리할 성질이 아니며 이를 이용한 사익 추구는 도민 반역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억지나 일방통행식 방법이어서는 도민 간에 첨예한 갈등이 해소되기는 커녕 반발만 심해지며, 약세에 몰린 측은 부정적 감정이 수면 아래로 침잠 축적될 뿐임을 재삼 강조한다. 어렵긴 하지만 양쪽에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화해를 유도한다면, 살기 좋은 제주도 건설을 위해 도민들도 협조할 것이다. 4ㆍ3의 한쪽이었던 주동자들의 자식들은 생물학적 부자관계일 뿐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며, 책임 또한 전무하다. 그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이제 화합 못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갈등을 최소화하고 화합을 극대화 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자칫 좁은 생각에 4ㆍ3평화기념관 전시물, 제주시청 조형물, 한라산 탐방안내소 안내문(최근 수정되었음) 등 건국 세력을 자극하는 새로운 불씨를 만들어 갈등을 증폭시킬 게 아니라, 진짜 화해와 상생을 위해서라면 말과 행동을 함께하고 합의점 도출에 반하는 일은 삼가거나 뒤로 미루는 등 조심조심 화합의 길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선거직 지방행정기관장들과 의회의원들이 명심할 일이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두 가지 말로 끝을 맺고자 한다.
첫째는 4ㆍ3으로 인하여 불행하게 희생된 넋에 대한 위령과
그 유족에 대한 심심한 위로를 드리고,
둘째는 필자의 글에 대하여 학문적 질정(叱正)을 구하는 바이다. <끝>
원 작 : 「내가 보는 제주 4・3사건」 2010. 1.15. 초판 - 비매품(非賣品)
지은이 : 김 영 중 (金 英 仲)
약 력 : 제주・서귀포경찰서장 (전)
대한민국 재향경우회 제주도지부 회장 (전)
제주 자유수호협의회 고문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