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의 성격
제주 4·3사건을 논할 때 가장 핵심 출발점은 바로 4·3사건의 성격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폭동' 또는 '반란'이라 규정하는 반면 4·3주동자나 북한은 물론 좌파에서는 '민중항쟁'이라 주장하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따라서 양측 공히 4·3특별법이 잘못되었고 조속히 개정되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이의가 없으나, 개정 내용에 대해서는 정반대 주장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보고서 작성 최종 책임자이며 4·3특위 위원장인 고 건 전 국무총리가 쓴 정부보고서 서문에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여 보고서의 핵심인 성격을 규정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입법 정신에 충실하지 못했고, 불완전한 보고서가 되었으며, 내용면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더구나 집필진은 '성격을 후세 사가의 몫으로 넘겼다'는 국무총리의 서문을 무시하고, 보고서 결론 부분에 '무장봉기, 경찰 서장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 기록함으로서 작성 최정 책임자인 고 건 총리의 의도를 정면으로 위반했으며, 논리적 모순을 드러냈음은 물론 좌파들은 뒤에 삽입된 내용을 마치 4·3사건의 성격인양 주장하니 억지가 아닐 수 없다.
4·3특별법은 먼저 진상을 규명한 다음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을 하도록 규정되었으니 진상규명을 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셩격규명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후세 사가의 몫으로 넘기면서 희생자에 대한 내용만을 나열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치 이 보고서가 4·3사건의 전범(典範)인양 행정, 교육, 언론, 학문에 반영 인용되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 안중근(安重根)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권총으로 처단한 사건의 경우, 재판 과정에서 안 의사가 '이 거사는 개인적 사감(私感)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한국독립, 동양평화, 독립전쟁이라는 성격을 빼어버린다면 그것은 단순한 테러나 살인사건에 불과하다. 그만큼 4·3에 대한 성격규명은 중요하고 선결되어야 하며 출발점인 것이다.
'제주 4·3사건은 남로당중앙위원회(이하 남로당중앙당)와 남로당전라남도위원회(이하 남로당전남도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제주도위원회(이하 남로당제주도당)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남한을 북한에 수립된 김일성 공산주의 정권의 통치영역에 포함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폭동 반란으로서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많은 도민이 억울하게 희생된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 따라서 '제주 4·3사건의 성격은 두 가지 측면에서 관찰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맞다.
첫째,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여 남한에 북한과 같은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폭동 반란이고, 둘째, 진압 과정에서 선량하고 무고한 도민들이 다수 피해를 당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를 소개하겠다.
가. 김대중 대통령의 발표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CNN방송 '문답 아시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제주 4·3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어 주어야 한다'라고 4·3의 성격을 만 천하에 천명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23년 생으로 해방공간 혼란기를 직접 체험하였고, 집권 후 4·3특별법을 제정, 공포, 시행하였으며 이념 성향을 분류한다면 우익이 아니라는 사실은 세상 사람이 다 안다. 또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가 내린 결론이니 정답일 것이다.
나. 국무회의 의결 정부 공식 문서
대한민국 정부의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서 제정한 단기 4281년(1948년) 11월 17일자 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게엄선포에 관한 건'에는 분명히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라고 하여 제주 4·3사건의 성격을 반란으로 규정하였다.
다. 1948년 4월 3일 무장반격전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와 1948년 2월 16일 유엔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해 제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1948년 5월 10일 실시하는 선거를 저지하기 위하여 남로당의 지령(지령에 대해서는 후술할 예정)에 따라 남로당제주도당이 1948년 4월 3일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시에 무장 습격하였다. 당일 인명 피해만 경찰관 전사 4명, 경찰관 중상 6명, 경찰관 행방불명 2명, 민간인 사망 8명, 민간인 중상 19명의 인명피해를 냈으며 사건 종료사까지 그들에 의해 1,764명이 살해되었으니 폭동이고, 1948년 8월 15일에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국민 절대 다수가 참여한 가운데 한민족 최초 주권재민 등 자유민주공화정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 후에도 정부를 무력 공격하였으니 반란이라는 것이다.
참고로,「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의하면 인민유격대는 1948년 4월 3일 사건 발발 후 7월 24일까지 110여 일 동안 31개소 경찰지서 습격, 경찰관 살해 74명, 경찰관 부상 23명, 경찰 가족 살해 7명, 관공서 습격 2개소, 반동(우익 민간인) 살해 226명, 민간인 부상 28명, 포로(납치) 22명, 가옥소각 120여개 동, 파괴 7동, 경찰관 가옥 소각 2동, 전선절단 940개소, 도로파괴 170개소, 교량파괴 3개소, 카빈총 13정, 카빈총 실탄 209발, 수류탄 5발, 44식 총 5정, 99식총 5정, 38식 총 2정, 38식 총 실탄 800발, 기타 실탄 43발 등을 탈취하였다.
라.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였고 5일 후인 1948년 10월 24일 남로당제주도구국투쟁위원회는 제주읍 월평리에서 9연대에서 탈영한 군인들을 투입하고 남로당, 민애청, 여성동맹, 농위 (農委)를 혼성하여 소련식 '혁명투쟁위원회'로 개편하고, '제주도인민유격대 총책임자이자 인민군사령관 이덕구의 명의로 괴뢰정부에 대한 선전포고문과 일체의 토벌군과 통치기관에게 호소문을 광포하였다.' 이처럼 대한민국 정부를 '괴뢰정부'라 칭하고 인민군 사령관 명의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하여 선전포고한 행위는 반란이라는 것이다.
마. 인민군지원환영회 조직 활동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기습남침으로 한때 대한민국은 부산지역과 제주도만 남았다.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때인 1950년 7월, '인민들은 7월에 들어서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제주읍을 비롯한 각 면 단위로 조직하는 한편 행정 사법기관들에 대하여 전후대책의 수립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빨치산들을 원호하는 운동을 전면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인민군대의 과감한 진공에 고무 추동된 제주도 빨치산들은 봉기한 인민들과 합류하여 더욱 치열한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6・25남침 때 남침한 북한 인민군들이 곧 제주도에 상륙할 것이라는 희망 속에 그들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니 또한 반란이라는 것이다.
북한 인민군이나 제주도 인민군지원환영회 구성원의 입장에서 보면 항쟁이 분명하다. 이들은 곧 인민군이 제주에 상륙하면 도내 행정 및 사법기관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 '전후 대책의 수립을 강력히 요구 한다'고 협박한 것이다. 그래서 재기를 노리던 유격대들은 6・25 이후 1951년 8월 31일까지 14개월 여간 도내 33개 마을에 56회의 습격을 자행하여 경찰 사망 29명, 경찰 부상 6명, 군인 사망 10명, 군인 부상 6명, 민간인 사망 38명, 민간인 부상 23명, 피랍 41명(남 11명, 여 30명), 관공서 방화피해 4개소, 민간가옥 방화피해 324개소에 달하는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다.
바.「한라산은 알고 있다」
1949년 6월 7일 경찰이 유격대사령관 이덕구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그 직속 부하 양생들이 소지한 극비문서「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를 압수했다. 이 보고서는「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소위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를 중심으로>」라는 책자(이하 '한라산은 알고 있다')로 문창송씨가 1995년 8월 15일 발행하였으며 유격대가 직접 작성한 문서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한라산은 알고 있다」17쪽에는 4·3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둘째, 단선(單選) 단정(單政) 반대 구국투쟁((救國鬪爭)의 방법으로서...(중략) 4월 3일 2시~4시를 기하여 별항의 전술하에 무장반격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음'이라고 명시하여 그 목적이 이미 수립된 북한 단정(單政)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고, 오직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서만 매국 단독정부(單政)라고 반대함을 분명히 적시하고 무장 반격전을 전개하였으니,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항쟁이 아니고 폭동이라는 것이다.
사.「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1947년 3・1기념투쟁을 사실상 주동한 김봉현과 소년 게릴라로 입산 활동한 김민주가 공편한「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중 제주 4·3사건은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한 투쟁임을 분명히 밝혔다. (2) 투쟁 과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 (3) '오각별 공화국기(인공기)를 옹포 통조림공장 옥상과 한라산 산정과 놈들의 아성인 삼성혈에 게양하였다'고 했다. 이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반란이라는 것이다.
저자(著者)들은 일본에 거주하면서 누구의 방해나 간섭없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본으로 도피한 많은 4·3주동자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임의로 저술한 내용이므로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 4·3의 성격에 대한 근거를 간단히 소개하고 나머지는 제6항 '인민(민중)항쟁의 허구'에서 보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