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의 주체
정부보고서 536쪽에는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라고 하여 주체를 남로당제주도당으로 국한시켜 남로당 중앙당과 전남도당을 제외시켰으나 이는 축소왜곡이다. 제주 4·3사건의 주체는 '남조선노동당(중앙위원히, 전라남도위원회 및 제주도위원회)과 그 휘하의 인민유격대 등 좌익집단이었다'라는 것이다. 남로당중앙당이나 전남도당이 주체에 포함되는 문제는 제5항 '남로당(중앙당 및 전남도당)의 지령과 배후세력'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우선 남로당제주도당 등 당시 도내 좌파세력에 대해 살펴본다.
가. 제주도 좌파의 태동과 성장
한일합방 후 제주출신들은 공장노동자나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는데 그것도 공산주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으며 제주인들이 많이 사는 오사카에 집중되었다.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일본에서)동포들의 참상을 목도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족의식이 고양되었다. 자연히 일본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서클, 노조에 가입 활동하게 되었고 그 활동은 바로 동포 계몽운동이고, 노동운동이며, 반일운동이고, 독립운동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일부는 일경에 피검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들은 서울과 제주를 왕래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게 되었고, 일본과 서울 유학생 중에는 제주도내는 물론 전남, 더 나아가서 전국적으로 그리고 일본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강문석, 강창보, 고경흠, 고준석, 김달준, 김명식, 김문준, 김시용, 김응빈, 김택수, 송성철, 송종현, 조몽구, 현호경 등이다. 이들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반일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신지식인들로서 인기있는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이 귀향하여 의숙(義塾), 야학, 소년단, 청년회, 운동회, 독서회, 문예활동 등을 통하여 향학열에 불타던 젊은이들에게 전혀 접해 보지 못하던 새롭고 신선한 이론과 민족의식을 교육하는 일방 해녀항쟁 등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치면서 도민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게 되었다. 제주도내 좌파태동을 개관하면 (1)1921년 4월 김명식(ML사상단체인 서울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의 지시로 서울 유학생 김택수(제주), 김민화(조천), 홍양명(제주), 한상호(제주), 송종현(조천) 등이 참여한 ML사상단체이며 항일소년단체인 '반역자구락부'를 조직했다.
(2)1925년 3월 11일 반역자구락부를 해체하고 회원 중 순수한 좌파만으로 새로 조직한 '제주신인회'가 결성되었는데 이 신인회가 도내 좌파의 발원지가 되었다. 참여자는 서울 유학생 고경흠(제주), 김시용(조천), 강창보(제주), 김정노(제주) 등이었으며 반역자구락부 멤버를 비롯하여 오대진(대정), 윤석원(추자), 송종현(조천) 등이 가입 활동하다가 같은 해 5월 일부 간부진이 일경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3)1927년 8월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김제명의 지시로 제주야체이카 대표로 전남도당 전국대의원 후보인 송종현의 주도하에 강창보, 한상호, 김택수, 윤석원, 김정노, 오대진, 신재홍(우도), 이익우(한림), 김한정(대정) 등이 '제3차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조직했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4)1931년 5월 16일 강창보를 중심으로 오대진(대정), 신재홍(우도), 이익우(한림), 김한정(가파), 김유환(조천), 김민화(조천), 문도배(구좌), 강관순(우도), 한향택(구좌), 이신호(가파), 이도백(서귀), 김경봉(한림), 송성철(제주), 고운선(한림), 한구현(중문) 등이 '제4차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결성하였으나 1932년 구좌면 해녀항쟁의 배후 조직임이 탄로나 그해 3월 100여 명이 검거되는 소위 '제주야체이카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소년단, 청년회, 부녀동맹, 1930년 구좌면의 혁우동맹, 신우면(현 애월면)의 8인동지회, 구우면(현 한림면)의 신창독서회 등의 여러 형태로 좌파 조직과 사상은 꾸준히 도내 전역 각 마을과 직장에 파급되었다. 이 과정에서 해방이 가까워질 때쯤 잘 교육된 젊고 지도력 있는 계승자들에 의해 각 마을과 기관단체마다 조직이 완료된 상태였으며, 그들은 자연스럽게 도내 여론형성 계층과 교육자 및 지도자급으로 부상하였다.
실제로 해방 당일 중앙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결성되고,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창건 선언 후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개편됨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9월 22일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위원장 오대진, 제주야체이카 출신)되었으며 인민위원회 및 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 또는 민전)이나 민주청년동맹, 부녀동맹 임원들과 1947년 3・1투쟁 지도부는 이들이 장악했으며 이는 남로당까지 자동 연장되었다.
한편 '1945년 9월 중순경에 공산청년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고, 12월 9일에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위원회가 조직되었다'고 되었으나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위원회는 1945년 10월 초 제주읍 한 민가에서 일제시대 사회주의운동을 벌였던 20여 명이 참석 결성했다' 이들은 1946년 11월 23일 중앙에서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통합되어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면서 자동적으로 남로당제주도위원회로 개편되어 제주도 최초 유일 정당이라는 선제적 위치를 점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정치활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가을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공산주의자들의 지하운동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의 운동은 허약한 정부 행정 하에 규모나 강도(强度)면에서 성장을 거듭했고, 외부로부터 공산주의 촉진을 증대시켰다'고 판단한 것처럼 미군정의 엄중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개최된 1947년 3・1투쟁에 25,000여 명이 동원되었다. 이는 당시 도내 전체 인구(약 27만 여명)를 감안할 때 엄청난 인원임을 알 수 있고 이어 3・10총파업에도 경찰과 사법기관을 제외한 166개 기관단체 41,211명이 참여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이쯤되고 보니 주최측으로서는 두 번의 동원능력과 도민 호응도를 확인하고, 차후 어떤 행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충분히 자신감를 가지게 되었다.(상세한 자료는 별도)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도민들에게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 무상교육 등의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선동하고 조직화한 결과다. 단시 제주 도민들은 순박하기만 하였지 사상이 무엇인지 이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즉 가난하고 순박한 도민들은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무상교육, 부자와 가난한 자 없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다는 달콤한 감언이설(甘言利說)에 현혹되어 그들의 선전・선동을 무조건 따르게 된 것이다. 선동자는 선각자이고, 독립운동가이며, 신지식인들이었으니 권위가 실렸다. 여기에 공직자의 비리와 인권침해, 발포사건 등은 민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공산전체주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 도민들은 멀리 있는 소련군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분단은 나쁜 것이라는 논리는 그럴듯한 반면, '그게 아니다'라는 세력이나 설명은 미미했고 늦었다.
재조선미국군사에 '제주도의 약 6만 내지 7만으로 추정되는 주민이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횄다. 그들은 주로 무식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농부와 어부들인데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戰後)의 곤경에 의하여 심하게 혼란에 빠진 결과 남조선노동당이 그들에게 지속적인 경제적 보장을 제의한 것에 쉽게 설득 당하였다' 이런 미군정의 기록은 그 숫자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해도 당시 도내 좌익세력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사점이 있다 하겠다.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는「로마인 이야기」에서 '흔히 인간은 어떤 사람의 생각 자체보다 올바른 행동이나 훌륭한 인격을 보고 그 사람의 생각에 공감하게 된다. 저렇게 인품이 고결하고 훌륭한 사람의 말이라면 틀림없이 옳을 거라고 생각해 버린다. 어떤 사상이 얼마나 널리 퍼지는가는 뜻밖에도 사상 자체의 내용보다는 그 사상을 이야기 하는 사람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은 여기에 적중한 말이다.
제주 4·3사건의 주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력을 알기 위해 4·3직전 제주도내 좌익세력을 일별할 수 있는 참고 자료, 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과 제주도민주청년동맹결성 상황을 자세히 보면 그들이 추대한 명예의장의 면면에서 이념 성향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들은 해방 후 기선을 확보한 유리한 상태에서 오직 스탈린, 김일성, 박헌영, 노선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나. 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 또는 민전) 결성 상황
▶ 중앙 : 1946. 2.23. 조선공산당 등 좌익정당, 사회단체가 모여 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
▶ 제주 : 1947. 2.23. 조일구락부에서 도내 읍면대의원, 사회단체 대표 등 315명
과 방청객 200여 명 참석하에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의장단 김시택, 김용해, 고창무 선출.
명예회장에 스탈린, 박헌영, 김일성, 허 헌, 김원봉, 유영준 추대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은 1947년 2월 24일 상임위를 개최하여 사무국장에 김정로, 차장에 좌창림, 조직에 김정로, 선전에 좌창림, 문화에 김봉현, 조사에 정상조, 재정부장에 김두훈을 정하고 가입단체인 민주청년동맹, 부녀동맹, 농민위원회를 편성.
다. 제주도 및 읍・면 조선민주청년동맹 조직 상황
▶ 중앙 : 조선공산당(남로당)의 가장 강력한 전위조직인 조선민주청년동맹은
1945년 12월 12일 결 성된 조선민주청년총동맹(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이 주축이 되어 29개 좌익청년단체를 통 합하여 1946. 4.25. 결성
▶ 제주 : 제주도 및 읍・면 조선민주청년동맹의 결성상황은 제주도민주청년동맹
결성현황을 참조하 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1947년 3월 1일 소위 '3·1절기념투쟁'과 '3·10파업투쟁' 등 반미군정 활동의 최선봉군 역할을 수행했다.
▣ 제주도민주청년동맹 결성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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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체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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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성 일 |
장 소 |
참가자 |
대 표 자 |
명예의장 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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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주청년동맹
(조선민주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 |
1947.1.12. |
조일구락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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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천면민주청년동맹 |
1947.1.25. |
조천국교 |
대 100
방 300 |
김원근 등 4인 |
박헌영, 허 헌, 김일성, 조희영, 김택수 |
|
구좌면민주청년동맹 |
1947.1.30. |
세화리공회당 |
대 279
방 300 |
오원준 |
|
|
서귀면민주청년동맹 |
1947.2.09. |
|
600 |
송봉삼 |
박헌영, 허 헌, 조희영, 김택수 |
|
한림면민주청년동맹 |
1947.2.09. |
한림동국교 |
대 350
방 300 |
김행돈 |
박헌영외 4인 |
|
대정면민주청년동맹 |
1947.2.10. |
|
500 |
|
|
|
제주읍민주청년동맹 |
1947.2.16. |
조일구락부 |
대 300
방 200 |
이창욱 |
박헌영 외 4명 |
|
성산면민주청년동맹 |
1947.2.13. |
성산면
관철공장 |
대 150
방 200 |
|
|
|
남원면민주청년동맹 |
1947.2.16. |
남원리공회당 |
대 100
방 200 |
|
|
|
애월면민주청년동맹 |
1947.2.22. |
구엄국교 |
대 424
방1500 |
장제형 |
김일성, 박헌영, 허헌, 조희영, 김택수 |
|
단 체 명
|
결 성 일 |
장 소 |
참가자 |
대 표 자 |
명예의장 추대 |
|
제주도민주청년동맹
(조선민주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 |
1947.1.12. |
조일구락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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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천면민주청년동맹 |
1947.1.25. |
조천국교 |
대 100
방 300 |
김원근 등 4인 |
박헌영, 허 헌, 김일성, 조희영, 김택수 |
|
구좌면민주청년동맹 |
1947.1.30. |
세화리공회당 |
대 279
방 300 |
오원준 |
|
|
서귀면민주청년동맹 |
1947.2.09. |
|
600 |
송봉삼 |
박헌영, 허 헌, 조희영, 김택수 |
|
한림면민주청년동맹 |
1947.2.09. |
한림동국교 |
대 350
방 300 |
김행돈 |
박헌영외 4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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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면민주청년동맹 |
1947.2.10. |
|
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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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읍민주청년동맹 |
1947.2.16. |
조일구락부 |
대 300
방 200 |
이창욱 |
박헌영 외 4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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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면민주청년동맹 |
1947.2.13. |
성산면
관철공장 |
대 150
방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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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면민주청년동맹 |
1947.2.16. |
남원리공회당 |
대 100
방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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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월면민주청년동맹 |
1947.2.22. |
구엄국교 |
대 424
방1500 |
장제형 |
김일성, 박헌영, 허헌, 조희영, 김택수 |
☞ 1. 참가자에서 '대'는 대의원을, '방'은 방청객을 말한다.
2. 민민전 및 읍‧면 민주청년동맹 결성 시 대의원 수 합계가 2,018명(서귀면과 대정면 참석자
절반을 대의원으로 추정할 경우 2,500명이 넘는다.)
3. 각 읍‧면 민주청년동맹 결성대회 내용은 대동소이하였겠지만 기록상 제주읍, 애월면, 한림면
등에서는 박헌영 체포령 철회, 민주애국투사 석방, 인민항쟁(10‧1대구폭동)관련자
무죄석방, 남로당 절대지지 등을 결의하였다.
위와 같이 공산주의 이론으로 잘 무장된 제주도당지도부와 동조세력은 북한 김일성 정권의 통치이념과 일치하여 그와 힘을 합치면 공산주의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반면 그와 상반된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대한민국 정부가 남한에 수립될 경우, 분단은 물론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이를 무력 돌파하여 김일성 통치영역으로 통합하려는 단선(單選) 단정(單政) 반대 폭력 투쟁이 4·3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4·3사건의 주체는 사건을 일으킨 남로당제주도당과 그 지휘계선상(指揮系線上)에 있으면서 4·3을 지령한 전남도당과 중앙당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