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중앙당 및 전남도당의 지령과 배후세력
정부보고서나 좌파들은 중앙당 지령설을 전면 부인하고 제주도내의 사건으로 축소하고 있으나 중앙당 및 전남도당의 지령이 있었다는 증거는 분명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해방 직후부터 4·3 전후와 그 진행과정에서 소련의 지령에 따른 북한 정권 수립과 이를 배경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자료도 최근 많이 발굴되었다.
남로당중앙당과 전남도당의 지령
(1)「한라산은 일고 있다」(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
4·3주동자가 직접 작성한 극비문서「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중 중앙당과 전남도당의 지령 내용을 살펴본다. (쪽수는「한라산은 일고 있다」문창송 편)
① 3·1투쟁직후 도당(道黨, 전남도당)의 지시에 의하여 각면(各面)에 조직부(면당=面黨) 직속 자위대 (自衛隊)를 조직하게... (17쪽)
②도상위(島常委)는 3월 15일경 도(道, 전남도)파견 '올구(조직책)'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무 장반격전을...결정하였음. (17쪽)
③그 후 5월에 내도(來島, 제주도)한 중앙 '올구' 이명장(李明章) 동무에게 이것을(모슬포에 있는 제 9연대 프락치 4명을 입대시킨 내용) 보고하여 지도문제와 활동 방침을 남도(南道, 전남도)에 가서 지시하여 주도록 요청한 바... 내도(來島)한 올구를 통해서 재삼재사 프락치 지도에 관한 시급한 지시를 요청... (75쪽)
④내도한 도(道, 전남도) 올구 이(李)동무의 상도편(上道便)에 국경(國警, 국방경비대) 문제에 대한 시급한 대책을 요청하였든 바, 이(李)동무는 재차 3월 중순에 내도(제주도)함과 동시에 무장반격에 관한 지시와 아울러 '국경프락치는 도당(제주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으며 이번 무장 반격에 이것을 최대한으로 동원하여야 된다'고 언명하였음. (76쪽)
⑤그 후 5월 7일에 내도(來島)한 중앙 올구는 국경프락치에 대한 지도는 도당(제주도당)에서 할 수 있다고 언명하였기에... (78쪽)
⑥국경(國警)에게서는 포위 토벌 작전에 대하여 적극적인 사보타주 전술을 쓰며 국경호응 투쟁에 관 해서는 중앙에 건의 한다. (79쪽)
이상과 같이 주동자가 직접 작성한 극비문서에
㉮전남도당으로부터 무장 반격전을 위해 사전에 각 면당 직속 자위대를 조직하라는 지령을 받았고 (17쪽)
㉯중앙당 및 전남도당에서 항상 올구(organizer의 준말, 조직책 또는 조직 지도원을 지칭하는 표현) 가 파견되어 그를 중심으로 회의 하였으며 (17, 75, 76, 78쪽)
㉰올구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안마다 보고하고 지시해 줄 것을 요청하였거나 건의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75쪽)
㉲전남도당 올구 이동무가 3월 중순 다시 내려와 분명히 '무장반격전에 관한 지시'를 하였고 (76쪽)
㉳국경 푸락치는 도당(제주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으며 이번의 무장 반격에 이것을 최대한으로 동원 하여야 된다.(76쪽)고 명기되어 있으며,
㉴이러한 중앙당 및 전남도당 올구의 지령에 따라 1948년 4월 20일 부산의 제5연대 1개 대대(일명 오일균 대대)가 제주로 이동한 직 후 김달삼과 문상길이 제1차 회동하여, 행동통일을 위하여 밀접 한 정보교환과 최대한의 무기 공급, 인민군 원조부대로서의 탈출병 추진, 교양자료의 배포, 최후 단계에서의 총궐기와 더불어 싸우기로 합의하였다.
5월 7일 내도한 중앙당 올구로부터 재차 국경 프락치에 대한 지도는 도당(島黨, 제주도당)에서 할 수 있다는 중앙당 지침을 재확인 하였고, 선거 일인 5월 10일 군책(軍責) 김달삼과 조책(組責, 조직책)김양근, 오일균 소령(대대장) 및 부관, 9연 대 정보관 이윤락 중위 등 계 5명이 '제2차 대책회의'를 가졌다. 역시 상호 최대한 협조하고, 국경 은 토벌작전 때 사보타주 전술을 이용하고, 군은 호응투쟁을 중앙당에 건의하며, 박진경 연대장 등 반동 장교 숙청 및 상호간 정보교환, 무기공급, 탈출병 적극추진 등을 합의했다.
이처럼 2회에 걸친 회동 결과는 5월 20일 9연대 병력 43명이 탈영하고, 무기 67정, 실탄 3,858발이 공급되었으며, 6월 18일 박진경 대령 암살로 즉각 실행(정부 보고서 225쪽)되었다. 4·3주동자가 직접 작성한「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에 전남도당 올구가 '무장반격에 관한 지시'를 했다는 기록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을 쏙 빼버리고 중앙당 지령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공산당 생리상 중앙당의 방침에 위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철칙이며, 이는 남로당제주도당(전신, 공산당 제주도당)이 신탁통치 반대를 적극 주장하다가 중앙당 지령이 내려 오자 아무 해명없이 찬탁으로 급선회한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제주도당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단독 결행하였다면 엄중 문책 받았을 것이다.
(2) 일본 문예지「민도(民濤)」
민민전 문화부장이며 4·3주동자인 김봉현(조총련 오사카지부 서열 4위)이 일본 문예지 민도(民濤) 1988년 여름호 특집∐「제주도 4·3사건 40주년」에 '군사부는 동당(同黨, 제주도당)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정하는 것은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조직책인 것입니다. 그 조직책은 어디에서 파견되어 온 것 입니까?(라는 물음에) 물론 본토인 남로당 중앙당에서지요. 그 사람의 이름은 천 고무상(천검산의 일본식 발음)... 아무튼 남로당제주도위원회의 지도를 했던 사람이 이 사람이지요. 군사 이론에도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실토했다.
바로 중앙에서 남로당제주도당에 파견된 '천검산'이란 올구가 제주도당 위에서 지도하고 결정하였다는 복수의 주동자 증언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령서가 남아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앙당이나 전남도당의 지령없이 제주도당이 독자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의도적인 축소왜곡이다.
(3) 제14연대 반란사건 조사과장 김안일 소령 등의 증언
제14연대 반란사건 조사과장 김안일 소령과 조사반장 빈철현 대위의 중언에 의하면 '남로당 중앙당의 김삼룡과 이주하, 남로당 군 특수부장 이재복은 전남도당 위원장 김동백과 제주도에서 강력한 단선반대 무력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재복은 전남도립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는 제주 출신 조경순(20세, 제14연대 반란사건 주모자 김지회의 처, 지리산에서 체포)의 안내를 받아 48년 2월 중순경 제주도에서 경찰의 연행 도중 극적으로 탈출한 김달삼을 만나 '제주도에서 단선반대투쟁만이 남로당이 사는 길이요, 제주도에서 강력히 반대투쟁을 하면 육지부 전국에서 적극 호응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단선을 못할 것이다. 단선을 못해야지, 단선을 하게 되면 남쪽에 반공국가가 탄생하게 되어 남로당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 주요 지시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재복은 레포(연락원, 레포타의 준말) 조경순으로 하여금 김달삼과 지창수, 김지회에게 지령을 전달하였다고 함'이라고 하였다.
(4)「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김봉현 김민주가 공편한「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 의하면 '박헌영 리승협 도당의 그릇된 전략과 전술로 말미암아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방향으로 오도되었다... 그들의 졸당(卒黨)인 김달삼 강규찬은 아무런 승산도 없는 지시를 받아 가면서...'라는 기록은 박헌영과 리승협 등 중앙당의 지령이 있었음을 시인하는 기록이다.
(5) 남로당중앙당 및 전남도당 올구가 구국투쟁위원회에 직접 참여
1948년 2월 25일(북제주군) 조천면 선흘리에서 조몽구(반), 김달삼, 김완배, 고칠종, 김용관, 강규찬(반), 고 학 외 7명 등 14명이 모여 남로당제주도당을 '구국투쟁위원회'로 개편하였다. 이대 조몽구와 강규찬은 개편에 반대한 모양이다. 구국투쟁위원회에는 결정기관(김용관, 김달삼, 강규찬)과 상임위원회(강규찬, 김용관, 김달삼, 김양근, 김완배, 고칠종, 고영수)가 있었으며 그 밑에 중앙파견 올구 이두옥과 전남파견 올구 조창구 ⟶ 강창욱, 그 산하에 위원장 강규찬(비서 박태전과 경비대장), 부위원장 김용관을 두고 그 예하에 군사부(김달삼), 총무부(이좌구), 부녀부(김양근), 농민부(김완배), 청년부(고영수), 선전부(고칠종), 조직부(김양근)을 두었다.
특이한 것은 이때 군사부(김달삼) 산하 행동대로 5.10지대(김종수), 2.7지대(한국섭), 4.3지대(고성옥) 등 3개 지대를 편성하여 각 지대에 정치부원 1명씩을 배치하고 대원은 지대별 50~60명으로 구성하였다는 점이다. 5.10지대는 5.10선거 저지투쟁을, 2.7지대는 2.7구국투쟁(무장폭동)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개의 지대에 4.3지대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무장반격전을 개시한 4월3일과 동일하여 제10항 제주 4.3사건의 시기와 종기 항에서 거론하겠다.
그리고 총무부(이좌구) 산하에 보급과(이귀환)와 재정과)(이순우)를 두었는데 이들에게는 일본과 육지부로부터 자금 조달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는 남로당전남도당이나 중앙당은 물론 일본에서도 자금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직장에 양문필, 도청에 이정석, 경찰에 이기도, 군대에 문 중위(문상길)를 프락치로 편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상은 바로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한 단계로 진입했으며 중앙과 전남에서 올구가 파견되어 위로는 결정기관과 상임위원회를 조종하고, 밑으로는 위원장, 부위원장, 군사부 및 조직부를 직접 지휘하였으며 직장, 도청, 경찰, 군 등 각계층에 세포조직을 침투시켜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