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및 박헌영의 동향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년 1월 8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입국하여 1월 12일 덕수궁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소련군정이 38선 이북에 위원단 입북을 거부하자 2월 16일 유엔소총회에서 선거 실시 가능지역에서의 선거에 관한 권한을 유엔조선임시위원단에게 부여 하였다. 이처럼 남한 단선(單選)이 결의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모스크바는 물론 평양의 소련군정과 김일성, 박헌영 그리고 남로당중앙당이 가만히 낮잠만 잔 것은 절대 아니다. 모스크바나 평양의 소련군정 그리고 북한에 있는 박헌영이 제주 4.3을 직접 지령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스티코프 비망록'이 말하는 것처럼 소련 군정은 모스크바에 보고 또는 승인을 받아 북한을 민주기지로 삼았고 '한반도 소비에트화'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남한의 단선(單選), 단정(單政) 저지는 물론 제반 문제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지령을 꾸준히 내렸다. 또한 서울 남로당은 이 지령을 받는 즉시 전국에 하달하였으며 이는 제주 도당의 말단 읍면 세포까지 하달되었다. 4.3발발 전과 후를 일별해 보면 남로당 중앙당의 배후에는 북한과 소련군정이 깊숙이 개입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1)「이정 박헌영 일대기」
이정 박헌영 일대기에 의하면 (가) 1948년 1월 28일 남로당중앙위원회는 유엔한국위원단에 유엔 결정을 반대하는 항의서를 발송하였고 (나) 1948년 3월 19일 남로당중앙위원회는 남한 단독선거 분쇄를 위한 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 이러한 지령이나 움직임은 박헌영이 김일성이 제공한 경호원을 대동하고 1946년 10월 하순 38선 이남인 개성에 잠입하여 1주일 가량 체류하면서 조선공산당 간부를 접촉하는 등 집요한 대남 공작을 펼쳤고, 12월 6~7일 평양 소련군정으로부터 받은 남조선혁명자금 39만원과 122만 루불을 자금으로 하여, 1947년 1월 '대남사업해주연락소'를 설치하고 금촌에 중부(中部), 연천에 서부(西部), 양양에 동부(東部) 연락거점을 만들고 개성, 동두천, 강릉 등지에 남부(南部) 연락거점과 아지트를 구축하였으니 고정 배치된 연락원을 통하여 남로당 및 산하 조직에 각종 투쟁을 계속 지령하였다.
(라) 스티코프 비망록에 의하면 <1947년 1월 4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을 앞두고 김일성, 치스타코프 대장, 로마넨코 소장 등 3명이 연해주의 스티코프를 방문해 소위 '4자회담'을 하는 중에 스티코프는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 지도부 창설문제를 거론하면서 박헌영의 월북 사실을 공개하고 북한에서 활동하게끔 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김일성은 그렇게 할 경우 박헌영은 남한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이것은 박헌영이 계속 남로당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남쪽 혁명운동에만 전력하도록 하려는 김일성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제는 1949년 조선노동당이 결성되고 김일성이 당 위원장으로 선출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것은 소련군정과 김일성이 공모하여 박헌영을 대남활동 전담책임자로 못 박아 둔 것이다.
(마) 4.3발발 후 지하선거에 관한 '이북 박헌영의 지시는「이남에서 비밀리에 선거인의 선거를 하여 선거인을 해주까지 파송하라」는 것이었다.' 이 지령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지하선거를 실시하였으므로, 박헌영은 몸만 북한에 었었다 뿐이지 계속 대한민국 건국 반대투쟁 지령을 하였으며 이는 제주도에까지 하달되었다.
※ 타렌치비치 스티코프 ⇒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부사령관, 북한주재 초대 소련특명전권대사,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측 수석대표를 재임하는 동안 사실상 북한을 주무른 최고 실력자이고, 그의 비망록은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의 노력으로「발굴 자료로 쓴 한국 현대사」227~309쪽에 <발굴, 스티코프 비망록>이란 제목으로 게재되었으며, 1996. 5. 6. 중앙일보사가 발행하였다. 이 비망록은 1946년 9월 5일부터 1948년 10월 2일까지 다루고 있으며, 소련군정의 내막은 물론 남한에서 1946년 8월부터 추진한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 3당 합당 문제에 적극 개입한 것을 비롯, 박헌영이 수시로 소련군정 당국자에게 제반 문제에 대한 자문이나 지시를 구하고 소련의 지시명령에 의해 남로당이 움직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1차 자료이다.
(2) 진중일기(陣中日記)
1948년 12월 12일부터 1949년 8월 16일까지 4.3진압작전에 직접 참전했던 이 윤(李潤)상사가 매일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진중일기의 1949년 2월 20일자에는 '인쇄기까지 설치하여 소위 인민일보라는 신문까지 발간하면서 제주-평양간에 실시간적으로 무전 연락을 취하여 평양에서 지령하는 선전을 매일 매일 도민에게 주입하였다.(진중일기, 114쪽)
(3) 간첩 성시백의 활동
1997년 5월 26일 북한 '노동신문' 2면에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 혁명 렬사'라는 제목의 특집보도에 의하면 성시백(1905~1950, 황해도 평산 출신, 가명 정향명, 정백)은 남북연석회의 직전 김일성의 특사로 김구에게 파견되는 등 김일성으로부터 최고의 신임을 받는 자로서 1947년 2월 서울에 도착하여「조선중앙일보」「광명일보」등 10여개 신문을 발간 선전선동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근로인민당 등 5개 정당을 시작으로 10개 정당과 그 산하 14개 단체를 흡수하여 조직한 '13개 정당협의회'를 결성한 후 통일전선을 형성 투쟁하고, 국회, 국방부, 각병종사령부, 사단, 련대, 헌병대, 사관학교, 육군정보국, 경찰 등에 조직선을 구축하여 와해공작, 정보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음을 보도하였다.
특히 해방 당시 남북은 조선은행권 동일 화폐를 사용하다가 북한은 1947년 12월 1일 비밀리에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구 화폐 통용을 금지했다. 남한은 이를 모르고 5개월 동안 지내다가 1948년 4월 25일에야 과도정부 법령 182호로 구 화폐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 5개월이라는 공백기에 북한에서 회수한 구 화폐가 남한의 경제교란과 대남공작금으로 유입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지 않으면 제주도당 조직 자체 운영도 힘든 판에 경찰관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 자금이 어디서 생기겠는가?하는 의문이 앞선다.
성시백의 활동상은 김일성도 감탄할 정도로 무소불위로 행해졋으며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시백의 이런 활동은 당연히 남로당과 통일전선을 형성하였을 것이고 어떤 형식으로든지 직,간접적으로 제주4.3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조선중앙일보와 광명일보가 4.3사건 당시 타 신문에 비해 선동적이였음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 박헌영
① 1946년 5월 4일 조선공산당의 정판사 화폐위조사건이 적발되고 북조선인민위원회 평양보안국 특찰과 11명이 서울에 잠입하여 이승만, 장택상, 김성수, 장덕수 등을 8월 30일까지 암살하라는 지령을 수행하기 직전 경찰에 검거된다. 그래서 미군정청은 9월 7일 조선공산당 간부 체포령을 내렸고 박헌영은 이를 피해 잠적, 은신하다 '장례를 가장, 월북하여 10월 6일 평양에 도착' (스티코프 비망록)하였다.
② 박헌영은 1945년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위를 결성하고 '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 이른바 <8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이 8월 테제 중 '조선혁명의 현 단계'에서 조선혁명은 제1차 단계인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혁명단계에 있다고 규정하고, 다음 단계인 노동자, 농민 등이 (봉기하여)민주주의적 독재정권으로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제2단계 혁명노선을 제시했다. 이는 같은 날 스탈린에게 보내졌다. 이를 1개월 후 스탈린이 평양의 소련군정에 그대로 지령한다.
(4) 미군정 자료
(가) 재조선미국군사
'남조선의 단독선거가 실시될 것이 명백해졌을 때에 그의 활동은 강화되었고 특별조직책이 육지 본토로부터 파송되었다. 이들에 의해서 공산주의자 침투 전술에 있어서의 첫 번째 강화훈련이 시행되었다.... 폭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인민해방군은 약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의 병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단, 6명의 훈련된 선전책과 조직책이 남조선노동당의 창설을 위해서 육지 본토로부터 파송되었다' 6명이라는 구체적 인원수까지 파악했다는 것은 중앙당이나 전남도당에서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을 미군정에서 정확히 감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나) 주한미육군 971방첩대 월간 정보보고
1947년 7월 28일자 비망록에 의하면 1947년 4월 11일부터 23일까지 한 여자 간첩을 심문한 결과 '국제공산당이 북한 해주와 신의주 근처에 간첩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 학교에서 훈련 받은 제5열 분자들은 러시아에서 훈련 받은 장교 3명이 50명씩 인솔, 1947년 3월 1일 남하하여 1주일 만에 38선을 돌파하였고 이들 학교 졸업생 일부는 제주도에 공산테러훈련소를 세웠다'고 한 것은 남로당제주도당에서 북한 지원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 주한미육군 제6보병사단 일일 정보보고
1947년 2월25일~26일자에 '1947년 2월 22일 제주 경찰은 북한에서 온 조양신을 체포했고, 그는 소련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으며, 그가 가져온 서류들을 조사하고 있다'라고 구체적 이름이 적시되었다.
(라) 북조선노동당의 편지
1948년 3월 29일 북조선노동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결의한 '남조선노동당에 보내는 편지'에는 5.10선거 저지가 투쟁목표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