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및 소련군정 동향
(1) 스티코프 비망록
스티코프 비망록에 의하면, 1946년 9월 9일 박헌영은 (스티코프에게) '당(黨)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 대하여 스티코프는 1946년 9월 조선노동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9월 총파업은 물론 10.1대구폭동을 지령하고 200만원과 300만원을 각각 지원했으며 당시 제기된 각종 구호라든지 전술이 스티코프의 직접지시나 명령에 의해 일어났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9월 총파업은 스탈린→연해주 군관구 25군사령부→평양 소련군정으로 연결되는 지휘계통이 조선공산당에 직접 지시를 내려 그 결과로 발생된 것이며, 10월폭동(대구폭동) 또한 연해주 군관구사령부가 직접 개입한 것임이 드러났다.'
스티코프 비망록 1946년 9월 26일자에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남민전)으로 하여금 ①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좌익 석방, 테러 중지를 요구할 것, ②1946년 9월 28일자에는 '경제적인 제 요구,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미군정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성명할 것, ③남조선 파업투쟁 상황에 대해 스탈린 동지에게 암호 전문을 보냈다'(보고했다)는 기록이 있고, ④미군정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수립하려 하자 소련군정이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남민전)에 <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으로 맞설 것을 지시한 사실과 ➄남쪽의 선거 진행 상황에 대해 박헌영과 허 헌이 스티코프에게 보고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소련군정이 남한 정세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티코프가 지령한 구호는 시차를 두고 그대로 말단 제주도당과 그 산하 조직에 하달되고 있는데.
(가) 1947년 2월 25일 남로당 제주읍위원회 선전부가 각 야체이카(세포, 공산당이 비밀운동 조직의 기초단위로 지역, 직장, 기관, 단체에 부식된다. 대개 5~10명의 소조직이며 세포회의와 세포대표가 있음)에게 보낸「3.1기념캄파에 관한 건」에 의하면 '모든 정권은 인민위원회에 넘기라!'고 되어 있다.
(나) 같은 날 민청읍위선교(民靑邑委宣敎) 지시 제1호 조선민족청년동맹 제주읍위원회 선전교양부가 지령한 선전,선동요령에도 '민주주의 애국자를 즉시 석방하라! 우리들의 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1946년 9월 26일과 28일 스티코프가 지령한 내용이 1947년 2월 25일 고스란히 남로당제주도당과 민청제주읍위원회를 경유하여 말단 야체이카까지 전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 이보다 앞서 1947년 1월 12일부터 22일 어간 도내 각 읍면 민주청년동맹 결성 시 '박헌영 체포령 즉시 철회와 조선일대의 민주애국투사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결의'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를 통한 지령에 의해서 주장된 것이다.
(라) 또 '「비망록」에 따르면 스티코프는 1946년 9월 24일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어떤 답변을 주어야 할지 스탈린에게 지령을 요청했고, 이틀 후 소련군정 민정사령관인 로마넨코에게 '남조선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소련군정이 좌우합작에 명백히 반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임을 알 수 있고, 폭동(대구폭동)이 진행 중인 10월 21일 소련군정에 대해 박헌영은 '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 진화했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달라. 가까운 시일에 농민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고 소련군정에 요구했다. 이런 사실들은 10월 대구폭동 역시 소련 군정과의 교감하에 박헌영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소련군정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을 지령하면서 모스크바의 승인을 얻어 자금 500만원을 지원하였으며, 남로당은 소련군정이 전략에 따라 지령한 구호와 투쟁전술대로 실행하였으며 그 연장선에서 남한 단선(單選)저지 지령은 바로 남로당제주도당에 하달되었다.
(마) 1947년 3.1투쟁을 전개함에 있어 위 두 사건(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을 연계하라는 지령이 제주도당에 하달되었다. 남로당제주도당의 가장 강력한 전위행동단체인 조선민주청년동맹제주읍위원회 선전교양부가 1947년 2월 25일 자에 '3.1운동기념 캄파(캠페인) 전개에 관한 것'(3.1절 기념투쟁지령문) 중에 '10월 인민항쟁(대구폭동)의 의의와 성질을 해설할 것, 입법위원 절대 반대! 우리의 지도자 박헌영, 허 헌 선생,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구호로 연결된 것이었다.
지령은 문서 이외에 암호, 구두, 전보, 표시, 신호, 봉화, 성명, 편지, 신문, 방송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어 있고 문서인 경우에도 접수 직후 소각 인멸하는 것이 원칙이며, 그것도 보안유지상 필요한 사람에게만 1:1로 직접 전달하고 지령자나 전달자 또는 수령자를 묻거나 밝히지 않는 게 철칙이다. 지령서 등 직접적 증거가 없다고 이를 부인하는 것은 억지다.
위에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4.3을 전후하여 교통이 불편한 제주도에 중앙당과 전남도당에서 올구가 상주한 목적은 관광이나 휴식이 아니고 중차대한 사명을 띠고 내려왔다. 단순한 연락이나 입회자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꼭 올구가 내려올 필요가 없고 연락원이면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남로당중앙당이 타시도에 하달한 지령중에 제주도가 제외되거나 누락된 경우가 전무하다. 사실상 제주도는(도(道)로 승격된 후에도 전남도당의 지휘를 받았음) 전라남도에 속한 군 단위 조직에 불과함에도 중앙 올구가 계속 파견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제주도를 중요하게 여겼고, 남로당 세력 또한 강력했음을 말한다.
그리고 상급당 올구는 상급당의 전권대사와 같아서 그의 결정은 절대적이다. 모든 문제는 중앙당 또는 전남도당의 올구가 결정하였다는 김봉현 등의 증언은 남로당 중앙당이나 전남도당의 지령책임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중앙당이나 전남도당 올구가 무장반격전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한 이상 제주도당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면 중앙당의 지령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그 올구가 무장반격전을 결정하는 것을 지켜보고 자기가 소속한 중앙당이나 전남도당에 보고하지 않을 리 없으며, 보고받은 상급당에서 중지를 명하지 않았다면 이는 묵시적 지령이거나 승인이다.
좌파에서는 올구의 역할을 입회자 정도로 축소하고 있으나 이는 지금의 눈으로 판단해도 상식 이하의 해석이다. 국회의원이나 법원 판사들처럼 독립된 기관이 아니고, 명령계통이 엄격한 군이나 검찰 경찰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행정기관에 근무했던 사람이라면 조직생리상 최상급기관에서 조직지도원이 직장에 파견됐다면 그 권한이 막강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일이다. 하물며 공산당의 생리나 분위기상 절대적 권한을 행사했음은 상술한 바이다.
(2) 김일성 신년 성명
1949년 1월 13일 구좌면 투쟁위원회 명의 '면민에 호소함'이라는 삐라 내용 중 '➀인류해방의 은인이며, 평화의 보장자이며,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백방으로 원조하는 소련군은... ➁38선은 깨뜨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깨뜨리고야 말 것입니다... ➂김일성 수상은 1949년 1월 1일 신년 벽두에 성명하기를 멀지 않은 장래에 미제를 철수시키고 매국 단정(單政)을 타도하기에 인민군은 저력을 다할 것... ➃김일성 수상 성명서가 구체화될 날도 시간문제이며 인민군이 원수를 섬멸시킬 날도 가까워졌습니다'라고 하여
㉮친소련시각을 분명히 하였고 ㉯이듬해 발발한 6.25를 정확히 예고하였으며(4.3주동자들은 이런 성명 내용에 고무되어 6.25와 같은 남침이 1949년네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증언도 있다) ㉰북한에서 성명한 내용이 불과 13일 만에 구좌면당에서 전단으로 살포될 만큼 지령전달체계가 신속 정확하였음은 놀라운 일이다. 추가로 특별법상 4.3사건의 기간을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라고 규정하였으니 이 기간 중 중앙당은 물론 북한의 추인과 열렬한 격려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결론적으로 전남도당 올구 이 동무(李明章)로부터 무장반격전 지시가 있었다는 그들의 극비 보고서가 있고, 도당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하여 무장반격전을 결정하였으며, 올구는 단순한 입회자가 아니라 도당(제주도당) 위에서 지휘하고 전권을 행사했다는 주동자의 증언이 있는 만큼 지령이 있었다는 근거로 충분하다.
이상과 같이 제주 4.3은, 소련 스탈린의 한반도 소비에트화 전략→이를 충실히 수행한 평양의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적화전략과 박헌영의 대남지령→남로당중앙당 및 전남도당의 지령→남로당제주도당의 폭동 반란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만약 38선 이북에 공산주의의 소련군이 아니고 가장 근접했던 연합국 영국군이 진주하여 일본군 무장해제 책임을 수행했다면 제주4.3사건이나 6.25는 일어나지 않았았을 것이다. 즉 스탈린 만세와 '김일성 만세!'를 불렀던 4.3주동자들이 친소련, 친스탈린, 친북한, 친김일성, 친박헌영, 친공산주의를 주장했고 행동했으며, 이들 배후 세력으로 하여금 반유엔, 반미군정, 반대한민국, 반자유민주주의 무장투쟁을 전개한 것이 바로 제주4.3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