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남북 분단을 방지하고 통일 국가를 달성하기 위하여 미국과 이승만이 추진하는 단선-단정을 반대한 통일 항쟁이 바로 4-3이라고 주장하는데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수립되었으며, 북한 이보다 뒤늦은 9월 9일 수립되었다는 점을 들어 남북 분단 책임이 미국과 남한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억지 주장이다.
소련의 동향
'남북분단의 상징인 38선 확정만 하더라도 미국의 일방적 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소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며, 남한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를 비롯하여 수차 38선을 경계로 단절된 남북한 간의 교통 통신의 회복, 남북한 주민 간의 자유왕래와 자유로운 상거래 등을 회복할 것을 소련군에게 제의했으나 소련군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즉, 남북 분단의 책임은 군사분계선을 통치분계선으로 변질시킨 소련에 있다고 할 것이다.'
소련군정과 북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의하면, 조선 문제는 남북을 점령한 미-소 양군의 사령관들로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하가로 되어 있는데 소련군정은 미-소공위가 열리기 전인 1946년 2월 8일 북한 지역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한 사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토지개혁을 단행토록 했다.
미소공위가 열린 것은 그 다음 달 3월(20일)이었고 그 전인 1월에 북한 지역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모든 인사들을 감금 내지 숙청하였고, 미-소공위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사람과 단체는 모두 미-소공위 협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무리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소련군정와 북한은 남한에서 5-10선거가 무사히 종료되자 1948년 5월 중순 평양에서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을 들고 '남조선 5-10선거 무효투쟁' 대중집회를 개최하였다. 왜 (김일성과)스탈린 사진을 들고 궐기대회를 하는지 그 의도와 이면을 알 필요가 있다.
친소파 전진 배치
(1)「비록(秘錄) 평양의 소련군정 기록과 증언으로 본 북한정권 탄생비화」에 의하면 '소련은 대일전 개시 한 달여 전인 1945년 7월 6일 소련군 극동총사령부 정찰부대장 치부린 소장과 제2극동전선 참모부 정찰부대장 안쿠지노프 대좌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소련군 극동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재가를 받아, 하바로프스크 부근에 있는 소련군 제88정찰여단 대대장 김일성 대위를 비롯한 조선인 출신 빨치산 88명과 소련국적 조선인 15명 중 47명은 북조선 시-도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으로, 15명은 통역관으로, 37명은 지방 자위대와 기타 기관에 이용하라고 지령하였다.
(2) 1945년 9월 초순에 스탈린은 비밀리에 김일성을 모스크바 크렘린궁으로 불러 4시간 가량 대좌하고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낙점한 후 평양으로 보냈고, 극동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 제1극동전선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 제1극동전선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 제25군사령부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 제25군사령부 정치고문 발라사노프 대좌 등 소위 북한정권 창출 5인방이 스탈린 의도를 충실히 실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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