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및 남로당 세력
피해자 수
정부보고서(537쪽)는 전체 인명피해를 25,000~30,000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필자는 정부1차보고서 반론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15,000명을 고수하고 있다. 1994년 2월 7일 제주도의회 내에 4ㆍ3피해신고실을 개설하면서부터 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여 조사와 신고를 받고 1995년 5월「제주도4ㆍ3피해조사 1차보고서」를 낸 후 1997년 2차보고서, 2000년 3차보고서를 연이어 발행했고, 2007년 6월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도,내외 및 해외까지 제4차 신고를 접수하였다.
최초 신고 접수 개시 후 13년 10개월 이상 장기간에 걸쳐 4차나 신고와 조사를 하였다. 최종적인 제4차 신고 접수 결과는 727명(생존자 97명 포함)으로 나타났다. 이 시점에서 신고 누락자를 인정하더라도 2007년 3월 14일 현재 희생자로 선정된 자 14,033명 중 월북자, 자연사, 허위신고자, 생존자 등 형식적 심사로 인한 허수(虛數)를 상쇄하면 필자의 주장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2008년 11월 19일자 제주일보 5면 기사를 보면 '행정당국과 문헌상에 확인된 희생자 가운데 신고를 하지 않은 인원은 현재 590명으로 파악됐다'라고 하니 희생자로 이미 선정된 자와 제4차 신고자 그리고 현재 미신고자로 파악된 자를 모두 합해도 14,881명이다. 여기에 아직도 파악되지 않은 누락자를 더하고 허수를 빼면 필자의 주장이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9년 2월 15일 제주도 카톨릭 선교사 오스틴 스위니 신부가 서울 조오지 캐롤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사망자 명단은 현재 최고 15,000명에 이르고..',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 보고 1949년 4월 1일자 1097호 첨부 1.에 의하면 '지난 한 해 동안 14,000명~15,000명의 주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는 토벌대에 의해 살해되었다'라는 것은 인명피해 대부분이 이때 이전에 발생하였으니 필자의 주장의 한 근거는 되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4ㆍ3특위 위원마져 3만 명을 고집하는가 하면, 심지어 제주도교육청에서 발행한 4ㆍ3교육자료「만화로 보는 4ㆍ3의 아픔을 딛고 평화를 이야기하다」(52쪽)에는 15,000~65,000명으로 과장하고 있다.
남로당 세력
(1) 1948년 하계까지 제주도 남조선노동당의 당원 수는 최고 50,000명선까지 이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 1949.4.1)
(2) 재조선미국군사(在朝鮮美國軍史) - 제주도의 약 6만 내지 7만으로 추정되는 주민이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하였다. 폭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대 인민해방군은 약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의 병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3)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 김생민(金生玟) 증언 - '1947년 3ㆍ1절 기념집회를 배후에서 주도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전도의 당원 수가 3,000명 가량으로 늘어났다.(상세한 자료는 후술될 부록 5 자료 참조) 위에 명시된 남로당 가입자 수인 6만 내지 7만 또는 5만 명은 '열성적인 남조선노동당원이 아니고 남조선 노동당이 무엇이며,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무지한 제주도민을 동당(同黨)에서 선동ㆍ유혹ㆍ기만ㆍ협박하여 명목상 남조선노동당에 가입시킨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판단한「제주도 4ㆍ3사건」(상권 705쪽, 신상준)의 저자의 시각에 동의한다.
(4) 1948년 8월 2일 김달삼이 제주도를 탈출한 후 해주에 도착하여 제출한 지하선거 결과는 52,350명이다. 이 숫자는 백지날인이 말해주듯이 과장된 것임이 분명하지만 제주에서 실시한 지하선거 양상은 육지부에 비해서 활발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상과 같이) 저간의 사정을 종합해 볼 때 본도 출신의 좌익 거물들이 많았고, 5ㆍ10선거 당시 전국 200개 선거구 중에서 유일하게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만이 과반수 투표미달(북제주 갑구 43%, 북제주 을구 46.5%)로 선거 무효 사태를 초래하였으니, 이는 남로당 세력이 (그만큼) 막강하였고 그 활동이 강력했음을 증명한다.
핵심세력
(1) 정부보고서 - 무장대 500여 명(정부보고서 536쪽)
(2) 주동자 김봉현 저서 - 3ㆍ1기념투쟁 주동자의 한 사람이면서 오현중 교사를 역임하고 민민전 문화부장으로 있다가 일본으로 도피한 김봉현이 밝힌 '자위대를 선두로 한 가장 애국적이고 열렬한 녀맹원, 아동단원, 지어는 백발의 무성한 로인들 마저도 끼여진 3,000명의 무장력'(「제주도 인민들의 4ㆍ3무장투쟁사」83,86쪽 김봉현 김민주 공편)
(3) 기타 한국군, 경찰, 미군정 문서, 신문 기사, 유엔조선임시위원단 관련 문서 - 최소 1,500명 최대 2,000명
이상의 여러 기록을 감안할 때 필자는 김봉현이 스스로 밝힌 숫자 3,000명에 신빙성을 둔다. 김달삼 최측근에서 활동하다 전향한 김생민의 증언에 의하면 3ㆍ1사건 당시 남로당원 수가 3,000명(정부보고서 94쪽)이라고 했으니 증언에 의하면 4ㆍ3사건까지 1년 동안 그 숫자가 증가했으면 증가했지 감소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특히 재조선미국군사에도 약 4,000명의 장교와 사병의 병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였으며, 1946년 2월 23일 민민전 및 1947년 1월 12일부터 2월 22일까지 도내 읍ㆍ면 민주청년동맹 결성 시 참가한 2,500명(방청객 제외)이 넘는 대의원들의 이념노선이나 투쟁목표가 4ㆍ3까지 변함이 없었으니 김봉현이 실토한 3,000명은 실상에 가장 근사치(近似値)라 하겠다. 그리고 이 이외의 단체원(여맹 등)도 상당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 보고 1949년 4월 1일자 1097호 첨부1.에 의하면 '현재 무장폭도들은 약 250명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산에 은신해 있는 1,000~1,5000명의 지원자나 동조자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3월 2일 이래 폭도 지원자 중 300명이 사살 당했고 1,500명이 생포되어 구류중임'이라고 하였으니 사살자와 생포자 1,800명 이외에 잔여 무장폭도 250명, 비무장 지원자 1,000~1,5000명을 모두 합하면 3,050~3,550명이 되며 이때까지 사살된 무장대를 포함하면 이보다 많으므로 김봉현이 말한 3,000명은 절대 과장된 인원이 아니다. 그 이유는 후술될 <부록 5>을 읽어 보면 이해될 것이다.
여하간 4ㆍ3희생자를 선정함에 있어서 김봉현, 김민주가 스스로 밝힌 3,000명 또는 다른 기록에 있는 1,500~2,000명을 희생자로 인정하는 문제는 남북 대치라는 엄연한 상황하에서 간단하지 않다. 필자의 생각은 통일과 동시에 김달삼을 포함한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6ㆍ25당시 남침 전사한 인민군도 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희생자를 심사하면서 3,000명은 고사하고, 2,000명이나 정부보고서에서 인정한 유격대 500명 조차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로 인해 3,000명 또는 2,000명은 분명 형식적인 심사로 희생자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당시 주동 세력은 분명 존재했는데 지금 와서 십여 명이라니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다. 희생자를 신고하면서 허위와 계산이 개입했고 심사 결정함에 있어서 착오와 무리가 있었으니 1차 제주도실무위원과 2차 중앙특위위원들은 형식적인 심사를 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
그 이유는 희생자로 결정된 자 중에는 분명히 핵심주동자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 월북자, 자연사한 사람(1987년 90세로 집에서 병사한 자도 희생자로 결정되었음), 일본으로 도피하여 편안히 살다 자연사한 사람, 무장대끼리 살해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사람들을 희생자라 하여 제주시 봉개동 4ㆍ3평화공원에 위패를 봉안하고 비석을 세웠으니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들에게 의료혜택이 주어지고 있으며,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반(反) 대한민국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사람에게 국민 세금을 지불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냉정하고 솔직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료는 멸실되고, 경험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있으며, 정확히 알고 있는 생존자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증언을 기피하고 있다. 좁은 지역사회에서 60여 년을 살다 보니 얽히고 설킨 인연으로 사돈되고, 친구 되고, 이웃되어 사실을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미 잊혀진 일들을 새롭게 거론하는 것 자체가 괴롭고 사원(私怨)만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정체성 확립과 도민 화합과 상생이라는 현실적 과제 사이에는 난제가 한둘이 아니다. 이를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 현재 이곳에 살고 잇는 우리들 모두는 새롭고 어려운 숙제 앞에 진심으로 고민해야 한다. 자기 주장만 고집하지 말고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이용하거나 위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조급함은 반드시 부작용이 있는 법이다. 자신의 성에 차지 않고 더디고 어렵더라도 순리에 따라 상대방을 설득하면서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희생자 숫자에 극한된 말이 아니고 사건 전체를 처리함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무고한 희생자
필자는 위의 핵심세력을 제외한 나머지를 억울한 죽음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김봉현이 밝힌 수를 제외하더라도 12,000여 명은 정말 무고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이다. 우리들은 이들에게 매우 엄숙하고, 경건하며,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억울한 유족들은 우선 심정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을 이해하고 동정함으로써 본능적으로 대한민국에게 반감과 원한을 가지는 경향이 커졌다. 이들에게 굴레가 된 연좌제는 '잠재적인 좌파 동조세력을 양산하였다'
필자는 이 분들의 원통함과 고난 및 피해가 어느 정도라는 것을 잘 안다. 사망에 이르는 참혹한 과정, 사망일자도 모르고 시체마져 찾지 못한 유족들의 아픔, 개개인이 그동안 살아온 삶을 글로 쓰면 소설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이는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뿐이 아니다. 그 반대편에서도 비록 숫자가 적을 뿐이지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필자는 한 맺힌 삶을 살아온 이들 유족에게 심심한 위로릏를 드림과 동시에 슬픔을 공유하고, 원혼들을 위령하며, 국가가 이들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은 물론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보상해 줘야 마땅하다는데 동의한다.
이 항목의 마지막 부분에서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6ㆍ25전쟁에 버금가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있엇다고 해서 제주 4ㆍ3사건 성격이 항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며, 4ㆍ3성격이 폭동, 반란이라고 해서 무고한 희생자 12,000여 명의 명예가 욕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 둔다. '군ㆍ경의 과잉진압행위와 그에 따른 무고한 대량학살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남로당의 4ㆍ3무장반란 사건의 본질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무고했던 많은 희생을 결코 부정하거나 기리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