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ㆍ3사건의 시기(始期)와 종기(終期)
4ㆍ3사건의 시기(始期)
4ㆍ3특별법이나 정부보고서는 4ㆍ3사건의 출발 시점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필자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해방 후부터 1947년 3월 1일까지 역사적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제주 4ㆍ3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미ㆍ소 군인들이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진주하면서 태동하였고, 1945년 12월 28일 미ㆍ영ㆍ소 3국 외상회의에서 조선을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모스크바 발표내용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좌우익이 찬탁, 반탁으로 대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전략에 의해 좌익들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급선회하면서 조직적인 선전선동으로 세력을 확대한 반면, 우익은 신탁통치 절대반대 입장을 시종일관하면서 사활을 건 극한대립이 시작되었다. 양측은 각기 자기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서 동조자를 규합하고 반대자를 제거해야만 하는 극한적 '체제선택'상황에 있었다.
신탁통치 소식이 국내에 전파되자 박헌영은 즉각 반대하였고 12월 31일에는 조선공산당 서울시위원회(위원장 김삼룡)가 반탁 전단을 시내에 살포하기도 하였다. 이에 놀란 소련 치스차코프 대장과 레베데프 소장은 1946년 1월 초 박헌영을 평양으로 불러 소련정책이니 찬탁에 따르라고 명령식 설득하였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47년 1월 2일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는 찬탁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으나, 교통 통신 사정이 열악했던 제주도(당시 우익 정당은 미조직 상태)의 정치집단인 조선공산당제주도위원회와 제주도인민위원회는 '1946년 1월 15일에 각 읍ㆍ면에서 신탁통치반대군중대회를 가졌다. 그 직후 중앙에서 조선공산당의 신탁통치 찬성 선회에 발맞추어 이들도 아무런 해명없이 신탁통치 찬성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4ㆍ3의 시기로 정하는 게 타당하다.
그 후 1947년 2월 10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1천 수백 명의 제주 농중, 오현중, 제주중 등의 중학생들이 '양과자는 조선을 좀먹는 미제침략자들의 독약이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반미와 양과자 반대 시위를 했으며 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풀밭에 방화하는 등 반미군정활동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양과자 반대 시위도 제주도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님을 볼 때 중앙당의 지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11월 14일에 '유엔조선임시위원단 설치와 조선독립방안 준비에 관한 제2차 유엔총회의 결의안'을 체택하여 남북한 동시 인구비레에 의한 보통선거와 비밀투표 원칙에 의한 총선의 실시, 또 이를 감시하기 위한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을 설치하였다. 1948년 1월 8일 서울에 도착한 동 위원단은 소련의 거부로 38선 이북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2월 16일 유엔소총회는 선거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에 관한 권한을 동 위원단에게 부여하였다. 따라서 동 위원단은 재조선미육군사령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처럼 국제 및 국내정세가 남한에 있는 좌익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남로당은 1948년 2월 7일 소위 2ㆍ7구국투쟁 지령을 통하여 경찰관서 습격과 통신시설 파괴, 총파업선언, 반동분자 처단 등 투쟁의 강도를 점차 높여 나갔다. 결과는 2월 7일부터 2월 20일까지 전국적으로 사망 39명, 부상 133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였고 8,479명이 검거될 정도로 극렬했으며 투쟁 슬로건 중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라는 구호도 있었다.
제주도내의 2ㆍ7투쟁은 '시위 95건, 불법집회 72건, 선동 포스터 첨부 및 삐라 살포 375건, 협박 공갈 27건 이외에도 1948년 2월 9일 안덕지서 최창정(崔昌貞)경사와 오두황(吳斗煌)순경이 납치되어 안덕면 사계리 속칭「행기물」에서 생매장 당하기 직전에(최창정 경사 부인은 남편 구명차 나갔다가 그들에게 붙잡혔는데 끌고 오면 같이 파묻으려고(했지만)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이화영(李花英)경위가 인솔하는 제주경찰학교 졸업을 앞둔 40명이 훈련 차 도 일주하던 중 급보를 받고 현장에 출동하여 구출한 사건이 있었다. 또 2월 10일 고산리 청년 100여 명이 시위 후 고산지서 앞에 몰려가자 경찰은 해산을 명했으나 응하지 않자 발포하여 주민 1명이 총상을 입었다.
2ㆍ7구국투쟁에서 단선을 저지하지 못한 좌익세력은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2ㆍ7구국투쟁의 연속으로 남조선노동당의 지휘하에 필사적인 5ㆍ10선거 반대폭력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설상가상 남로당제주도위원회는 조직이 완전 노출되어 '앉아서 죽느냐' 아니면 '일어나 싸우느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될 경우 그들의 입지는 물론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막다른 처지에 몰리자, 5ㆍ10선거는 통일을 가로 막는다는 논리를 펼쳐 대중선전의 좋은 명분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남로당은 광복이후 건국과정에서 발생한 1946년 1월 찬탁투쟁→9월 총파업투쟁→10월 대구10ㆍ1투쟁→1947년 3월 3ㆍ1절기념투쟁→제주3ㆍ10파업투쟁→7ㆍ27투쟁→1948년 2월 2ㆍ7구국투쟁→4월 제주 4ㆍ3투쟁→5월 5ㆍ10선거저지투쟁→8월 8ㆍ25북한정권창건지원투쟁→1950년 6월 6ㆍ25남침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일(사건)이 소련과 북한 공산주의를 선택한 세력이 주도한 투쟁이었다.
이 모든 투쟁은 단일한 목표를 갖는 동일한 세력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그것은 대한민국에 공산주의 체제를 만들고자 펼쳐진 무장투쟁이다. 이처럼 일련의 투쟁은 하나하나가 단절되고 돌출한 사건이 아니라, 일관된 공산화투쟁 목적하에 동일한 세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행된 것이니, 제주 4ㆍ3은 이 과정 중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무장반격전 결정시기
1948년 6월 20일 미 제24군단 정보참모부 헝거(RㆍHunger) 상사가 남로당원들을 조사해서 얻은 '제주도 남로당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인민해방군은 1948년 1월 이전 한림지역의 오름 중턱에 설치된 일본군 군사시설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고, 1948년 2월 초에 300여 명이 애월면 새별오름(추정)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는 경찰보고가 있었다고 했다. 다이너마이트와 식량, 민간인 옷이 훈련 장소에서 발견되었고, 이때부터 폭도들은 전도에 걸쳐 비협조자에 대해 살인, 방화, 납치 등 적극적 활동을 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1948년 1월 이전부터 무장 반격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D - day 결정일
정부보고서는 '1948년 3월 15일경 전남 올구(조직원)를 중심으로 회합하여 (4월 3일)결정하였다'는「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를 인용하고 있으나,
① 1948년 1월 22일 경찰은 남로당(북제주군)조천지부에서 개최된 공산당들의 불법회의장을 급습하여 2월 중순에서 3월 5일까지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켜 경찰간부와 고위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무기를 탈취하라는 내용의 문건을 압수하였다
② 1948년 2월 12일에 경찰과 방첩대가 남로당 본부를 기습해서 1948년 2월 15일부터 3월 5일 사이에 투쟁을 계속하라는 문서를 압수하였다.
③ 1948년 1월 하순 남로당제주도당 핵심당원 다수가 경찰에 체포되자 이에 대한 대책회의를 2월 초부터 장소를 옮겨 가면서 몇 차례 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소위 '신촌회의'에서 주야 3일간 토론하였으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2월 20일경 투표하여 12:9로 폭동을 결의했다.
이상을 종합하건대 유엔총회결의에 자극을 받고 소위 '신촌회의' 개최 시기인 1948년 1월 22일이나 2월 20일경으로 보아야 하며, 아무리 늦어도 2월 25일 남로당제주도당이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구국투쟁위원회'로 개편한 날 D - day를 4월 3일로 결정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4ㆍ3사건의 종기(終期)
4ㆍ3특별법과 정부보고서에는 4ㆍ3사건이 끝난 종기(終期)를 한라산이 개방된 1954년 9월 21일로 정하였으나, 일부에서는 재선거가 실시된 1949년 5월 10일, 또는 6ㆍ25 휴전일인 1953년 7월 27일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후에도 유격대의 습격으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으므로 1957년 4월 2일 북제주군 구좌면 송당리 토굴에서 마지막 공비인 오원권을 생포하고 그가 소지한 칼빈총 1정과 실탄 14발을 압수한 날로 정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1948년 4월 3일에서 기산(起算)하면 만 9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