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ㆍ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문제점
2000년 1월 12일 법률 제6117호로 제정된 4ㆍ3특별법에 의해 4ㆍ3특위(위원장 국무총리 고 건)가 2003년 4월 29일「제주 4ㆍ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발행하고 6개월 동안 수정 의견을 접수할 때 필자도 114쪽에 달하는 수정의견을 작성 제출했으며, 자유시민연대 등 경향 각지에서 많은 의견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반영된 것은 거의 없고 완전 묵살 당했다.
처음부터 집필진 및 특위위원 구성이 당시 정치 상황에 영향을 받아 편향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고서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위원 3명이 강력 항의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퇴하는 등 많은 무리가 있었다. 더구나 사건의 성격규명을 유보함으로써 위법하고 미완의 보고서가 되었으며, 건국의 중요성을 도외시하고, 폭동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부수되어 일어난 인권침해 사실은 강조된 반면 토벌대의 피해나 인민유격대의 만행은 축소되었다.
(또한)소련과 북한 및 박헌영의 역할을 누락하고, 사건의 본질인 폭동 반란을 외면하였으며, 폭동 주동자의 책임을 면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명피해를 다룸에 있어서도 내용은 고사하고 양적으로도 가해자별 비율인 85% : 15%가 아니라 130쪽 : 4쪽으로 97% : 3%란 편향됨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군의 개별 작전 및 피해 상황은 완전히 누락시켰다.
① 신엄리 전투
1948년 12월 19일 폭도 30여 명이 마을을 습격하여 민간인 10여 명을 살해하고 민가에 방화하였고, 군인 출동 중에 매복조에 걸려 15명이 전사하고 1명이 중상.
② 노루악 전투
1949년 3월 9일 노루오름에서 군(민보단 대한청년회단원 포함)과 유격대가 교전하여 군 27명과 우익 단체원 9명 사망.
③ 녹하악 전투
1949년 4월 초 2연대 4중대가 이덕구가 직접 지휘하는 유격대 1,000여 명과 격전을 벌여 78명을 사살하고, 기관총 2정을 포함한 총기 207정을 노획했다.
군ㆍ경에 침투한 프락치 사건도 완전히 누락되었다.
※ 프락치 : 각 기관 단체에 침투하여 공산주의화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 또는 사람, 여기서는 남로
당에서 해당 기관에 잠입시킨 자를 말함.
① 군 프락치 사건
1948년 10월 28일 군에 침투한 프락치 사건으로, 송요찬 연대장 사살 등 반란 거사 직전 80여 명을 검거하여 6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② 경찰 프락치 사건
1948년 11월 7일 소위 '11ㆍ7사건' 또는 '제주도 적화음모사건'은 여ㆍ순 반란군이 제주도에 상륙할 것이라는 오판하에 경찰에 침투한 프락치들이 통신을 장악하고, 유치장을 개방하여, 무기고를 탈취하고, 경찰간부 및 사회 저명인사와 우익단체 간부들을 일시에 처단하려는 음모가 거사 불과 몇 시간을 앞두고 프락치로 있던 서용각이 전향함으로서 전모가 밝혀져, 경찰은 물론 각 기관에 침투하여 암약하던 프락치 83명을 검거 처리했다.
이처럼 군경토벌대가 진압을 위해 기울린 많은 작전과 희생을 누락시킴으로써. 토벌대는 무조건 양민만 학살한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또한, 다랑쉬 굴 진상도 왜곡되었다.
1948년 12월 3일 밤 유격대 100여 명이 구좌지서 및 세화리를 습격하여 민간인 43명을 살해하고 학교와 민가 등 138채를 방화하여 도주한 뒷날 군ㆍ경ㆍ민 합동 토벌과정에서 다랑쉬 굴속에 은신한 자 11명(취사 담당 여자의 아들 10세 1명 포함)이 희생된 사건을 1992년 3월 22일 제주 4ㆍ3연구소가 발견하여 여론화하였다.
이때 이 사건을 조사한 경찰의 조사보고서와 많은 참고인 진술서에 의하면, 사건 당일 남로당 구좌면당 위원장 정권수의 지시로 유격대 조장의 지휘하에 대원 2명과 함께 현장을 확인하여 사체를 수습하고 명단을 작성 보고한 사실이 빠져있다. 위 3명 중 1명이 다랑쉬굴에서 유격개 8명과 함께 지냈으며, 죽창과 철창을 가지고 4~5명으로 조를 편성하여 기본적 경비를 하면서 상부 지시에 따라 통신연락과 보급,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는 진술, 유격대 조장이 민간인 1명을 납치하여 살해했다는 진술도 정부보고서에 없다.
당시 군 책임자가 굴속에서 나올 것을 설득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던 사실과 희생자 중 굴과 인접한 마을(속칭 '선수머세' 총 12가구)출신이 전무한 점, 현장에 남아 있는 철창, 대검, 철모, 탄띠, 도끼, 군화 등 무기류 등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은폐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건을 완전 왜곡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천면 북촌사건 관련 사실도 누락된 것을 알 수 있다. 북촌리 집단총살 사건에 대하여 잘못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무고한 사람이 너무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정말 가슴 아픈 사건이다. 북촌사건 발생 원인에 대하여 정부보고서는 413쪽에 '(1949년)1월 17일에는 해안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 가장 비극적인 세칭 '북촌사건'이 일어났다. 이날 아침에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라고 하였다. 군인 2명이 전사한 사건이 북촌사건의 직접적인 근인(近因)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에 앞서 1948년 5월 16일 우도에서 제주로 가던 범선이 풍랑으로 북촌포구에 피항하자 이 마을 출신 유격대 3명이 마을 주민 30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우도 지서장 양태수(梁泰秀) 경사를 권총으로 사살해 바다에 던져 버리고 동승했던 진남양(陳南亮)순경도 때려죽였다. 이후 7~8명의 무장 유격대가 범선 승객 14명을 속칭 '선흘곶'위에 있는 연대본부로 납치해 5월 20일 저녁 전원 처단하려는 순간 군 토벌대가 피랍자들을 구사일생으로 구출했다. 이때 생포한 유격대원의 안내로 북촌 마을 안에 있는 굴속에서 이 사건 관련 유격대원 7명을 검거했다. 권총을 휴대한 정황으로 보아 이들을 유격대 지휘관급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었고, (당시)북촌 마을은 좌익세가 매우 강한 부락이라는 인식은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보고서에 언급도 없는 이런 사건들이 (그동안)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북촌사건이 발생한 것이지, 정부보고서처럼 사건 당일 군인 2명이 사살된 것만으로 북촌사건의 원인을 한정짓는 것은 미흡하다. 한편 북촌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유격대가 1949년 2월 4일 북촌 마을 동쪽 일주도로변에 매복했다가 제2연대 장병들의 무기 수송차량을 기습했다. 이들은 군인 23명을 모조리 죽이고 함덕지서 부원하(夫元廈)순경을 죽여 불태웠으며, 운전자 민간인 1명에 중상을 입혔고, 99식 총기 150정을 탈취했다. 이 사실은 필자가 정부 1차 보고서 수정의견으로 제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보고서에서 누락되었다.
참고로 이때 전사한 2연대 장병은 중위 박재규(朴載圭), 특무상사 오 철(吳 徹), 한일우(韓一愚), 일등상사 이규하(李圭夏), 이등상사 조고일(趙高鎰), 김광식(金光植), 일등중사 김석환(金石煥), 김사용(金四龍), 김진조(金進祚), 이순범(李順範), 김동호(金東浩), 김민수(金敏洙), 장은달(張殷達), 박노영(朴魯英), 이등중사 이제하(李濟夏), 김현수(金賢洙), 박병규(朴炳圭), 이등하사 강태근(康泰根), 오병환(吳炳煥), 이홍서(李弘瑞), 민선기(閔璇基), 임상호(林相虎), 이 철(李 徹) 등 23명이다. 1949년 7월 제2연대 장병 일동 명의로 전사 장소에 비석을 건립하였으나 도로확장 공사 중 팽개쳐 있다가 지금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다행히 비석이 없어지기 직전 이를 필사한 내용이 남아 있다.
이처럼 정부보고서는 그 근거 자료를 공정하게 인용하지 않고 유ㆍ불리를 따져 편향적으로 취사선택 또는 왜곡하였다. 정부보고서 집필자는 조선시대 사관(史官)과 같이 엄정 중립적이어야 하며 자료 인용에서도 공평해야 한다. 예를 들어 토벌대가 16개 교(校) 시설을, 유격대가 27개 교(校)시설을 방화 파괴했는데 이 중에서 토벌대가 파괴한 사실만을 인용하거나 편중해서 기술한다면 되겠는가?
정부보고서는 개인이나 학자, 연구소, 단체에서 내는 연구서가 아니고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내는 정부보고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는 등 합법적 절차에 의했고, 관보에 게재하였으며, 대법원에서도 불법이 아니라고 판결한 계엄령 선포(이로 인한 피해는 별도로 논할 문제)에 대하여, 그 후계 정부의 국무총리로서 계엄령에 대해 11쪽에 달하는 시비조 또는 의문조의 내용을 수록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필자는 단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고 건 총리 개인적으로 계엄령은 불법이라고 여겼을지라도 정부보고서 작성책임자라면 전임 정부의 합법적 절차와 관보 게재, 대법원의 판결 결과를 인용하여 '계엄령은 합법적으로 발령되었다'라고 간단히 그리고 분명히 기록해야 마땅하다. 부연한다면 '학자들 간에 이론이 있지만'이란 몇 글자 정도(만이라도) 삽입하면 되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국무총리가 정부보고서 35쪽부터 540쪽까지 글자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검토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고, 이런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위원들이 전원 사퇴한 모든 기회 등을 이용하여 집필진의 사견을 보고서에 의도적으로 삽입 수록하였다면, 이는 국무총리를 가탁(假託)한 행위로써 도덕적 이상의 역사적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정부보고서 집필진을 포함하여 책임 있는 사람들은 '역사 교과서적 성격의 보고서'(필자는 이 말을 1차 정부보고서 수정의견 제출 때도 강조하였다)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망각하고, 대한민국 정체성과 정통성을 폄훼하였으며, 주동자들을 면책ㆍ미화하고, 당시 정치세력에 영합했다. 성격규명이 유보된 위법ㆍ불완전ㆍ편향 왜곡된 보고서라는 지적에 대답해야 하며, 비록 합법적 절차를 거쳤다 하더라도 중요하고도 명백한 하자가 있으므로 조속히 수정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