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한기에 접어들면 전국의 농가는 휴면에 든다. 물론 개 중에는 특용작물이나 월동용 농사도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 마을을 예로 들자면 매년 추수가 끝나면 마을부녀회 주관으로 주말을 제외한 닷새 동안 돌아가며 마을회관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한다. 보통은 그 기간이 12월 부터 정월 대보름을 기한으로 하니까 대충 두 달 남짓 세 달 가까이 되는 셈이다.
예순 여덟의 나이란, 한 가정의 아버지고 할아버지, 즉 윗사람 역할을 충분히 할 만한 나이다. 그런데 우리 농촌의 현실이 그러하듯 웬만해서는 그 나이로 아직 명함(?)을 내밀기엔 좀 부족한 나이기도 하다. 내 밑으로 둘 또는 셋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모두 선배님이고 형님이다. 그렇기에 나는 회관에 들어서자마자“형님들! 안녕하십니까?”로 인사를 드린 뒤 다소곳 말석을 찾아 앉는다.
우리 마누라 무슨 죄업을 받았는지 부녀회장이라고 매일(하기는 윗마을 한 권사님과 아랫마을 홍 권사님의 도움이 더 크지만...)마을회관 지킴이가 되어 스무 명 남짓 많을 때는 삼십여 분의 식사를 차려 낸다.(그기에 더 하여 나는 부녀회 이름으로 기십 만원이라도 찬값을 슬그머니 희사한다. 참고로 겨우내 난방비, 1종, 일정부분의 찬값은 정부지원이 있고 마을의 여러분이 십시일반으로 추렴을 해 준다.)
상이 놓여지고(이 때도 발딱 일어나 상을 놓는다. 가급적 나이를 덜 먹은 사람과...)식사가 차려진다. 마을회관 창고에 쌓여있는 각종 주류가 반주로 등장하고 화기애애한 식사를 한다. 매일 만나도 화제 거리는 언제나 충분히 있다. 왁자지껄...가가대소...그런데 문제는 식사 후다. 원래 주부들이 음식을 만드는 거 보다 설거지 하는 게 더 큰 문제다.
하루는 안 되겠다 싶어 식사를 마치고 주방으로 들어가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오 사장님이 이러시면 안 된다’고 어떤 아주머니들은 거의 기절 할 정도로 만류를 하셨지만, ‘아!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집에서도 설거지 담당입니다.(사실 매일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한다.)’, 그러자 마누라는 옆에서‘맞아요! 설거지는 저 양반이 다 해 줘요!’라며 추임새를 넣어 준다. 그 분들의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이 잦아들 때쯤 설거지를 다 마쳤다. 그 사이 왁자지껄...가가대소...하던 마을의 형님들은 나의 이런 행동에 감명을 받았는지 반감을 샀는지 조용하기만 했다.
그 다음날부터 이상한(?)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90이 가까운 윗마을 김씨 어르신, 80을 훌쩍 넘기신 전. 현노인회장님, 70 중반의 문철이 형님 등등등.... 식사가 끝나면 발딱 일어나 자신이 먹은 밥그릇을 개수대에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고 옆집의 최公, 새로 선임 된 젊은 이장 뻥팔씨는 상을 깨끗이 닦고 제 자리에 원위치 시키는 습관으로 바뀌었으니 우리 마을 정말 질서가 있고 도덕과 윤리가 샘솟는 마을 아닌가? 생색이 아니라 이런 게 마을의 개혁 아닐까?
내가 그날 설거지를 시작한 것은 평소에도 설거지 하는 것을 즐겨(?)했지만, 솔직히 꼬부라진 형수뻘 할망구들의 서빙을 앉아서 받는다는 게 늘 마음에 걸려 설거지로 보답을 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만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이 된 것이다.(물론 그 후로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형수님들이 먼저 펄쩍 뛴다.)사실 이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얘의 핀트가 좀 어긋났다.
며칠 전 큰 매형과 형님이 이곳을 방문 했다. 더 늙기 전에 한 곳에 모여 살자는 나의 제안에 얼마간 마음이 동하여 상의를 하기 위해 온 것이다. 충주 터미널까지 마중을 나갔고 시간을 보니 마침 점심시간이다. 따뜻한 밥 한 끼 집에서 대접해 드려야 했으나 마누라는 또 마을회관이 더 중요한 관계로 두 양반을 모시고 자주 찾는 깨끗한 식당으로 갔다.
이미 예약을 해 두었기에 상을 봐 놓아서 자리에 앉았는데, 늘 서빙을 하던 아줌마가 안 보이고 70이 훨씬 넘은 사장님이 서빙을 한다. 처음에 바빠서 그러려니 했는데 아줌마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사장님께서 직접 서빙을 하니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아! 오늘 아줌마가 몸이 아파 출근을 안 했습니다.’어쨌거나 좀 그렇잖아? 나이 어린 사장이 서빙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럴 수도 있지만 70이 훨씬 넘은 양반이 구부정해서 서빙 하는 게 썩 보기 좋은 것은 아닐 뿐 더러 정말 부담이 갔다. (진실로 아줌마가 그날 출근 못했기를 바라는 것이고, 만약 또 다른 날 그런 식으로 노인네가 서빙하면 다시는 못 갈 것 같다. 덧붙이자면 사실 그날 두어 가지 밑반찬이 더 필요했지만 늙은 사장님의 서빙이 부담스러워 그냥 참았다.)
그젠가? 그 그젠가? 뉴스를 보는데 노인들의 취업문제에 대해 리포트 한다. 이런저런 노인들의 직종이 소개 되고,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쭈그렁 할머니들이 바리스타가 되어 서빙 하는 모습이 나온다. 나는 그 순간 마을회관의 형수님들과 식당의 늙은 사장 양반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아무리 할머니 바리스타들께서 만족하지만 새파랗게 젊은 남녀가 다리를 꼬고 앉아서 서비스를 받는다는 게 참, 거시기 하게 보였다. 물론 어찌 보면 할머니가 손자손녀에게 보낸 정으로 생각한다면 어려울 건 없을 것이나 결국 돈을 주고받는 과정에 이르면 서비스를 사고파는 것임에 그런 즉 탐탁한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일을 잘 하고 못 한 것은 차치하고 대통령보다 아니 일반 국민보다 연치가 훨씬 높은 게 우리 국민 정서에 좀 안 맞은 건 아닐까? 그래서 불만이 많았던 것은 아닐까? 뭐, 꼭 불만이라기보다는 연세 높은 형수님들, 할머니 바리스타, 나이 많은 식당 주인의 서비스 받기가 부담스럽고, 죄스럽고, 송구한 것이 우리 일반국민의 정서는 아니었을까? 비서실장이 곧 교체 될 모양이다. 기왕 교체 하실 바에는 대통령 보다는 좀 젊고 빠릿빠릿한 인사로 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