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 유방과 천하를 두고 다투던 항우는 세궁역진하여 해하에서 명장 한신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고 병졸은 줄어들며 군량미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신의 군사는 포위망을 점점 좁혀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온다. 그렇지 않아도 고달픈 초나라 병사로 하여금 고향을 그리게 하는 구슬픈 노래였다. 한나라가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고향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유래이다. 그러나 그 노래보다는 항우의 진영을 먼저 탈출한 군사들이 아직 남아있는 군사(부자. 형제. 친인척. 친구 등)들을 호명하며 이미 전쟁에 패했으니 개죽음을 당하지 말고 탈출을 종용 했다는 고함 소리가 사면초가라는 설도 있다.
관운장이 죽은 해는 서기219년, 단기2552년(중국 漢헌제 건안24년, 고구려 산상왕23년, 신라 내해왕24년, 백제 구수왕6년)이다. 유비의 명으로 형주로 진격했으나 조조와 손권의 연합군에 패하여 아들 관평과 함께 아주 조그마한 맥성이라는 곳으로 쫓겨 들어가 원군을 요청했으나 원군이 오지 않자 결국 탈출을 시도하다가 손권의 수하인 반장과 마충에게 생포되어 참수를 당했다. 당시 맥성의 군사는 마보병 합쳐 겨우3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기에 군사들에게 먹일 식량마저 떨어졌다. 이래저래 전의를 상실한 때 밤이 되자 손권의 진영으로 먼저 탈출한 병사들이‘돌쇠 있느냐? 너희 어머니께서 이곳에 계신다. 먹쇠야! 너희 새댁이 너를 찾는다. 칠복아! 니 아들이 아프단다. 등등.....’그리고 ‘까닭 없이 개죽음 하지 말고 성을 넘어라’며 관운장 군사들의 마음을 산란케 흔들어 놓자, 관운장의 군사는 다시 반으로 줄어들며 조급한 나머지 활로를 뚫겠다고 아들 관평과 함께 맥성을 나섰다가 적의 반마삭(攀馬索)걸려 사로잡혀 죽은 것이다.
급한 일로 중국에 며칠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을 가면 늘 다니던 길이다. 그 길목엔 그 지방의 꽤 유명하다는 중학교가 있었고. 여러 해 동안 그 길을 다녔지만 그런 광경은 처음 목격하였다. 그날은 그곳에서의 업무를 좀 일찍 마치고 묵는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교통체증이 있는가보다 싶을 정도로 내가 탄 택시가 주춤거리기만 할뿐 좀체 앞으로 나가질 않는다. 그렇게 얼마를 가노라니 길이 아니고 주차장을 방불케 했고 그 중학교 근처쯤 도달했을 때 차량수출을 위한 하치장으로 착각 할만치 각종의 차량들이 도열(?)해 서 있다. 그때서야 나는 택시 운전사에게 무슨 일인가를 물었고 하교시간이라는 대답을 받았다. 교통체증으로 짜증이 나있던 차에 순간적으로 내 머리를 때리는 생각이 하나 들었다. 엉뚱하게도 만약 한국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난다면 두려워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생각 말이다.
‘과보호다. 과보호. 저렇게 새끼들을 과보호해서 어쩌자는 얘긴가?’온통 내 머리 속을 헤엄치고 다니는 생각이 그랬다. 그런데 그렇게 과보호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나라 법으로 한 가정 한 자녀만 생산하게 했으니 하나 뿐인 자식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 또한 생각하기도 싫은 장면일 것이다. 그러한 즉 과보호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과보호의 그늘에서 자란 아이들이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장으로 달려갈 수 있을까? 설령 강제에 의해 전장으로 갔다가고 치더라도 애국심을 발휘하여 전쟁을 치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자식을 마음대로 낳게 할 수도 없는 게 중국당국의 또 다른 고민인 것이다. 14억의 인구에서 가족계획을 무시한다면 금방 20억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지구촌 제일의 곡물수입국인 중국은 인민들의 식량수입에 국부(國富)를 소비해야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저런 상상들을 해 나가자니, 만약 우리와 중국이 전쟁을 한다면 사면초가의 유래 또는 관운장이 맥성에 사로잡히는 장면까지 떠오르며 내 입가에는 부처님이나 모나리자의 미소만큼이나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을 벗어나 택시가 좀 달리는가 싶었는데 훼손된 도로에 택시가 덜컹거리며 달콤했던 내 꿈을 깨 버리는 것이었다. 세월호 사태와 유가족과 단원고 학생들 생각이 겹치며, 아이고! 우리도 중국사람(부모) 못지않은 과보호를 한다는 사실에 입가로 씁쓸한 냉소가 번지고 마는 것이었다. 한 자락의 긴 일장춘몽이 아닌 추몽(秋夢)을 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