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 비친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아팠다. 정말 깐깐하셨던 할머니는 그렇다 하시더라도 고모 셋은 정말‘말리는 시누이’역할을 톡톡히 했다. 동란으로 팔 하나가 없다시피(동란 때 폭격으로 왼쪽 쇠골이 떨어져 나가 간신히 붙어 있는...전혀 힘을 못 쓰는...)한 어머니를 발라당 누워 부려먹는 모습에 가끔은 속이 상해했었다.
언젠가 아내와 결혼을 하고 첫 추석을 맞으며 여동생 둘이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그냥 두지 않고 눈탱이가 밤 탱이 되도록 팼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지만, 아마도 어릴 적 고모들의 그런 행동에 악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몸으로 또 7남매씩이나 낳으셨는지? 밑으로 동생들에게 좀 미안하지만, 나 까지만 낳으셨어도 4남매 아닌가? 그랬더라면 두 여동생이 그 때 그 시절의 추석날 눈탱이가 밤탱이 되지도 않았을 텐데. 그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잘못이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얼마간 영향력을 행사 하신 것 같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자라며 비위가 몹시 약했다. 쥐(뱀)죽은 것만 봐도 몇 끼 식사를 못할 정도 김치에 젓갈이 들어가도 젓가락을 댈 수가 없었다. 아니 아예 젓갈이라고는 전혀 먹을 수 없었다.(젓갈 장수한테 젓갈 푸는 삼지창으로 매 맞을 소리 아닌가 모르겠다.)그런 관계로 내 전생이 절간의 고승은 못되어도 말사의 암자 불목하니는 됐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본다. 이러하니 나는 절에 가서 눈치 볼 일이 전혀 없다. 젓갈을 먹지 않는 놈이 눈치를 뭣 하러 보겠는가?
세파에 흔들리고 고된 시집살이에 억눌리셨는지 어머니는 살갑거나 정이 많지는 않으셨다. 그기에 본인의 의지(그 땐 다 그랬지만...)와는 상관없이 7남매씩이나 낳았으니 올망졸망 진저리도 치셨을 게다. 그 진저리가 말썽 많은 내게 몽둥이 타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도 착했던 것은 중학교3년까지 어머니의 고문에 가까운 린치를 아무소리 않고 받아들였다.
한 쪽 팔밖에 없는 어머니가 나보다 힘이 약하는 걸 고1때 알았다. 그날도 어떤 사건(어떨 땐 정말 별 것 아닌 것으로도...)이 터져 어머니의 고문에 가까운 린치가 계속 되던 날이었다. 사정없이 내려치는 몽둥이(어머닌 잡히는 대로 내려 치셨다)세례의 고통을 못 이기고 무심코 어머니의 팔을 잡았을 때...그 가벼움, 표현이 안 되는...억울함 같은 거....아니!? 세상에 이런 힘으로 내게 사형(私刑)을 가하셨다니 분통마저 터졌었다. 물론 그 후로는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내게 사형을 아니 공격을 못 하셨다. 워낙 튼튼한 방어막을 쳤기 때문이다. 대신 어머니는 저주에 가까운 욕을 퍼 부으셨다.
특히 김장철만 되면 전생이 불목하니였던 나를 위해 김장을 꼭 두 가지를 해야 했다. 젓갈 넣은 것과 안 넣은 것. 그리고는 육두문자를 쏟아내기 시작하신다. ‘빌어 처먹을 놈! 아무거나 주는 대로 처먹지 않고..ㅉㅉㅉㅉ...’연연이 김장철만 되면 똑 같은 내용의 욕지거리를 얻어 처먹고 말았다. 그런 어머니의 저주는 장가를 가고 아내가 생기고부터 면제가 되었다.
나는 기제를 모실 때 지방을 쓰지 않고 영정사진을 모시고 지낸다.(우리 정경열 스승님께 D지게 혼날 일이지만 그렇게 쭉 해 왔다.)그 영정 사진을 하루 또는 이틀 정도 대청(거실)한 곳에 모셨다가 제 자리에(나만의 공간 서재)다시 모신다. 김장철만 되면‘빌어 처먹을 놈! 아무거나 주는 대로 처먹지 않고..ㅉㅉㅉㅉ...’욕을 해 주시던 우리 엄마의 10주기가 어제였다.
밤새 대청에 모셨던 어머니 사진을 제 자리로 모시다 보니 갑자기 어머니의 옛 모습이 떠 올라 횡설수설 해 본다. 그나저나 엄마! 그때 그랬잖아!? 엄마! 새끼가 빌어 처먹으면 딱이나 좋겠소! 그래도 다시 한 번 듣고 잡은 엄마의 짜증이오. 엄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