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44-
제국 건설의 트리오, 아우구스투스-아그리파-마에케나스
BC.42년에 그리스의 필리피들판에서 브루투스를 격파하고 BC.31년에는 악티움海戰서
안토니우스를 타파하기까지 십 여년 간,아우구스투스의 왼팔역을 철저히 수행한
마에케나스의 활동은 눈부셨다.
독립하기에는 충분한 세력을 갖지못한 아우구스투스를 도와 먼저 언토니우스와의 사이를 좋게했고 한편으로는 그 안토니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의 생존 아들과의
타협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나씩 차례로 정적을 쓰러뜨림으로써 세력을 증강해간 아우구스투스가 마침네 최후
라이벌 안토니우스를 쓰러뜨리기까지 10년 간 비밀협상역을 맡은 마에케나스의 공적은
아우구스투스를 돕고도 남았다.
BC.30년에 이르러 아우구스투스는 유일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18세에 시작해서 32세에 실력으로 카에사르의 후계자가 된것이다.
그것을 도운 것이 아그리파와 마에케나스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BC.30년 이후의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에게는 함께 집정관을 맡는 등
공직 경력을 차례로 쌓도록 했으나 마에케나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교섭수완을 가진 마에케나스가 맡은 일은 내란기 중 비밀이 요구되는 사항이어서
공적 직함을 행사 할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공개 인정을 받지못한 숨은 공로자에 그쳤다.
대신 아그리파는 혁혁한 전공에 빛나는 드러난 공로자로 세인의 인식을 받았기에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공직을 맡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가 하려고만했으면 못할일도 아니었으나 끝내 마에케나스를
이면 상담역으로만 활용했고 또 마에케나스도 그것으로 만족했다.
오른팔은 전장에서 왼팔은 협상테이블에서 적절히 써먹은 아우구스투스의 용인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몸 컨디션이 좋지않을 때 아우구스투스는 휴양차 로마 근교의 마에케나스의 집을 찾아 쉬며 둘이 대화를 나누는 일이 많았다. 교양의 깊이나 인식의 정확성
그리고 실행상의 균형감각에서 마에케나스는 1급 상담역이었다.
제국 건설에 손발이 되어준 아그리파도 마에케나스도 세상을 뜨고 홀로 남은 아우구스투스는 잠시 고독했으나 낙망하지 않고 제국 건설에 집념을 불태웠다.
친아들을 두지못한 아우구스투스는 후처 리비아가 데리고 들어온 아들 형제 중 맏이
티베리우스(Tiberius)를 후계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게르만족과 대치하는 지정학적으로 가장 취약한 라인강과 도나우강 방위선을 두 아들에 각각 전담시킨 것이다.
아그리파 존명 중에 이미 그의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수있을만큼 성장한 장남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의 전처의 딸과 결혼해서 BC.12년에 벌써 한 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었다.
차남 도울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낳은 안토니아와 결홀해서 두 아들과 달 하나를 낳아 행복하게 살고있었다. 안토니아는 아우구스투스가 누이를 협력자였을 때의 안토니우스와 정략결혼을 시켜 낳은 혈연의 소산이다.
아우구스투스가 권력투쟁에서 敗死로 몰고간 라이벌 안토니우스에 누이동생을 보내 혈연을 맺은 그의 혈통관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런 혈통관의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의 죽음으로 재차 미망인이된 무남독녀 유리아의 세 번째 결혼상대로, 자기 조카와 결혼하고 있는 도울수스보다도 아그리파의 딸이지만 자기와는 인연 없는 여자를 처로 삼은 티베리우스를 골랐다.
티베리우스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든, 한 살짜리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든 그런 것은 혈통 계승에 집착하는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30세와 27세의 결혼이라면 자식도 많이 낳을 것이 틀림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자기의 핏줄을 잇는 사내아이를 되도록 많이 낳아주기만을 바랬다.
최고권력자 아우구스투스의 강제와 어머니 유리아의 종용으로 티베리우스는 꼼짝못하고 사랑하는 처,옛 카에사르의 교우 아티쿠스의 손녀 비부사니아와 이혼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딸 유리아와 재혼한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이혼 후 거리에서 비부사니아의 지나가는 뒷모습을 딱 한번 보았다.
사랑하는 그녀가 혼잡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뒷모습만 쫓을 수밖에 없었던 티베리우스는 이후 제위에 오른 뒤 카프리섬에 은둔생활로 세월을 보내게된다.
타인의 사생활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았던 카에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이점에서도 달랐다.
그러나 혈통의 계승에는 집착했더라도 아우구스투스의 뛰어난 점은 공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사적 감정을 추호도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하 장군이나 행정관료들 아무도 아우구스투스가 내리는 평가의 객관성을
믿지 않은 사람 없었다. 믿으면 열심히 따르기 마련이다.
죽은 아그리파를 대신해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 된 티베리우스와 도울수스 형제도 각기 담당임무에 전념하여 형은 도나우강 방위선 확립을, 동생은 라인강에서 더 북동쪽엘베강으로 방위선을 옭기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후세 사가들은 로마사에서 건국왕 로무루스 이래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카에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주저 없이 꼽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