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敎訓 로마史 Digest-39-
*트라지메노의 비극은 계속 이어지다
동해안쪽 리미니에서 대기 중이던 집정관 세르빌리우스가 프라미니우스의 요청으로 먼저 보낸 騎兵 4천기는 트라지메노호반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채 프라미니아街道의 폴리뇨(Foligno) 가까이에 왔다.
여기서 프라미니아가도를 버리고 길을 서북방향으로 돌려 한니발을 추격 중인 프라미니우스 휘하 군과의 합류지점 페루지아로 향하면 되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것은 우군이 아니라 한니발의 누미디아기병이었다.
수적으로나 전투력으로나 열세의 로마 기병대는 순식간에 포위되어 2천을 잃고 2천도 가까운 마을로 도주했으나 싸우지도 못하고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리미니에서 남하 중의 2개 군단의 騎兵戰力은 제로가 된 것이다.
기병 보충이 쉽지 않은 로마로서는 헤아릴 수없는 어려움에 빠졌다.
이렇게해서 로마는 트레비아 패전으로 알프스 남측의 갈리아를 포기한데 이어 트라지메노의 패배로 토스카나地方까지 적의 수중에 떨아지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포江 주변에 퍼져있는 북이탈리아와는 달리 아루노江과 테베레江 사이에 펼쳐지는 토스카나지방은 결코 포기할 수없었다.
오랜 세월 동맹관계에 있는 에토룰리아의 도시들은 한니발의 힘을 목전에 보고도 코르토나(Cortona)를 비롯해서 모든 도시가 한니발에 성문을 굳게닫았다. 북쪽 갈리아인들과는 달리 중부에 사는 에토룰리아인들은 2백년의 로마化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한니발이 프라미니아가도를 따라 로마에 닥칠 것이라 예상했으나 서른살의 카르타고 무장은 5월에 들어서면서 예상밖으로 길을 바꿨다.
로마행 길을 버리고 동쪽 아드리아海로 향하는 길을 택한 한니발에 대해 따르던 병사들은 불만이 많았다.
수도 로마에 가면 널려있을 약탈품을 보고도 손을 못대게된데 대한 불만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주인이 된 토스카나마저 뒤로하고 바다를 끼고 남쪽 이탈리아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직속 장군들에게조차 의중을 털어놓지 않는 한니발에 싸왔다하면 이기는 젊은 총사령관을 따를 수바께 없었다.
로마를 붕괴시키는 한니발의 전략은 곳곳을 다니며 하나하나 싸와 이겨서 얻는 부분 승리보다는 외곽을 무너뜨려서 고립시켜 일시에 얻는 승리에 두었던 것이다.
영향력은 거리에 비례한다는 것을 몰르리 없는 한니발은 로마로부터 가까운 연합도시들보다 로마의 영향력이 비교적 약한 먼곳의 도시들부터 힘의 과시로 끌어드리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로마聯合>의 붕괴전략인 것이다.
불지르고 치고 약탈을 한다.
동맹도시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로마가 아니라면 로마군은 출동할 것이다.
회전을 하면 한니발은 반드시 이긴다.
승리가 거듭될수록 동맹도시들은 로마에 등을 돌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외곽이 문어진 상태에서 로마를 공격해서 궤멸시킨다.
이론상은 나무랄데 없지만 신중하다던 한니발의 예단은 좀 성급했던 것같다.
포로 중 로마시민을 제외한 동맹도시병들은 너그럽게 대해 몸값도 없이 석방해 귀향시키는 심리전술까지 구사해 온 한니발이지만 로마의 植民都市라고해서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간 도시는 많치 않았다.
로마시민병은 공화국 로마 영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 70여 곳에 건설된 식민도시에도 로마가 신뢰할 수있는 시민들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수도 로마를 공격하는 한니발군의 등뒤에 나타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한니발로서는 전투에서는 두번세번 이긴다 하더라도 3일의 행정이라고해서 간단히 로망로 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드리아해로 빠져나간 한니발은 전군에 충분한 휴식시간을 주었다.
너덜너덜 해진 병사들의 옷도 로마군 전사자들의 옷을 벗겨 가라입혔다.
이것이 뒤에 로마군의 골치거리가 돈다.
적인지 아군인지 분별이 안되었던 것이다.
이후 로마군 병사들은 전원 수염을 깎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한니발측은 카르타고 스페인 누미디아 어디랄 것없이 모두 수염 기르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말까지 포도주로 목욕을 할만큼 충분히 휴양을 한 한니발군은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그리스계가 많이 사는 도시들을 약탈과 폭행과 방화를 자행하며 남하했다. 약탈한 물품이 너무 많아 다 가지고갈 수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로마는 한니발과 회전으로는 승리할 수 있는 무장이 없었다.
32년만에 전권을 행사할 수있는 독재관체제로 전환하여 58세의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독재관에 취임하였으나 이후 한니발을 장기 소모전 전략으로 맞선다.
회전을 피하고 뒷쫓는 추겨작전만을 구사하던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반도의 등뼈 아페닌산맥을 너므려면 피할 수없는 지점에 전군의 3분의 1을 배치하고 적이 계곡에 들어왔을 때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구사하게된다.
*한니발의 기발한 쇠뿔 불꽃작전
그러나 한니발은 정보수집력으로 로마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계곡 입구에 다다르자 병사들에게 마른 나무를 다량 모으게한다.
달구지를 끄는 소 2천마리를 골라 쇠뿔에 마른 나무가지를 붇들어매게했다.
그리고 손으로 가리키며 "한니발은 오늘밤 저 지점을 통과한다>고 말했다.
BC.217년 5월이었다.
해가지고 어둠이 내리자 한니발은 2천마리의 쇠뿔에 붇둘어맨 나무가지에 불을 붙이게 했다.
놀란 소들은 마부병의 채쭉을 맞고 내낟기 시작한다.병사들은 그뒤를 달리고 2천마리의 소들은 불티를 날리며 로마군이 복병중인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매복 중인 로마군은 어둠 속에 능선을 따라 움직이는 불길을 보고 적의 습격으로 생각했다. 횃불을 든 대병력이 일제히 언덕을 뛰어 오르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신중한 파비우스는 야간 전투는 피하고싶었다.
구릉 하나쯤 적이 점령해봤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침 밝고나서 확인 된 것은 한니발군 전원이 로마군의 눈 아래 길을 한명의 손실도 없이 얀탈물 하나 흘리지 않고 방중에 무사히 통과했다는 사실이었다.
한니발군 뒤를 쫓는다해도 후위의 누미디아騎兵에 당할 입장도 아니었다.
파비우스는 神祭를 집전하라는 명분으로 로마에 소환되었으나 독재관 임기 6개월을 다 채우기 전 사실상의 면직이었다.
쇠뿔이 날린 불똥사건의 실패이기보다 동맹도시들이 1년간 당한 피해는 더 묵과할 수없다는 것이 파비우스의 지구전법을 포기케하는 결정적 이유였다. 맹주로서 피해를 방관하는 지구전법으로는 동맹국들의 이반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로마 원로원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침공해온 BC.218년에는 6개 군단, 그 다음 해는 11개 군단이던 로마군단 수가 트라지메노호반전투의 완패 이후 중부 이탈리아 거의 전역을 한니발의 독무대로 허용하고 BC.216년에는 로마군 병역은 2개 군단 증편한 13개 군단이 되였다.
소극적 지구전법에서 적극전법으로 바꿔야한다는 시민집회의 여론은 이해를 한니발과의 결전의 해로 삼자고 했다.
그러나 한니발과의 회전을 승리로 이끌 수있는 무장은 아직 로마군에서 나오지 않는데에 로마의 비극은 이어진다. 다음은 세계전사에 유명한 칸네大會戰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