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 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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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높은 긴축정책으로 고도 성장을 이루다.
석유 파동 와중에 부총리 임명 저성장 - 물가고 - 수지악화 3 중고 성장기조 유지로 위기 정면 돌파 1973 ~ 74 년은 석유파동으로, 한국 경제가 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던 시기다. 석유가격이 일시에 4배나 오른 것이다. 당시 제조업의 에너지 비용이 제조 원가의 약 36% 를 차지하게 됐고, 제조업은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됐다. 물가 상승도 불가피하게 됐다. 1974 년 9월 태완선 부총리가 과로로 쓰러졌다.
9 월 18 일 김종필 국무총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부총리로 임명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만 학교로 돌아갔으면 했는데, 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을 잘못 고르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4 년 11 개월 만에 재무부를 떠나게 됐는데, 길고도 짧은 기간이었다. 후임자인 김 용환 장관이 고맙게도 나의 임기에 해당하는‘재무행정 5 년사’라는 책자를 간행해 줬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실로 다사다난한 세월이었다는 감회에 젖게 되었다. 기획원으로 자리를 옮기자, 경제운영의 기본 방향에 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저성장, 물가고, 국제수지 악화의 3 중고(苦)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물가안정에 우선순위를 두면, 무자비하게 통화긴축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미 벌여놓은 중화학공업 건설은 어떻게 되고, 대량실업과 그에 따르는 정치사회적 불안정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대통령이 과연 그런 정책방향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밀어줄 것인가. 어차피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펴 봤자, 고도의 물가상승은 불가피하고, 국제수지가 악화되는 것도 번한 일이다. 그렇다면, 성장기조만이라도 유지해야 하지 않는가. 나는 일본의 대응방향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역시 긴축과 안정화가 강조되고 있었다. 하기야, 한국이 일본과 같은 경제 기반과 깊이가 있었다면, 우리도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택하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겨우 발전의 시동이 걸린 초기 단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이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견뎌낼 것 같지도 않았다. 12.7 조치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 어느 날 나는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생각을 솔직히 고백하고 안정화 일변도의 정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런 내 시각이 12·7 조치에 반영됐는데, 조치의 내용을 보면 성장, 물가, 국제수지 등 3 면의 대책이 고루 나와 있지만,
결국“성장 기조”를 유지한다는 의미의“안정화 정책”이었다. 한편 중화학공업 계획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기도 했다. 포항제철의 제 2 기 확장공사를 뒤로 미루고, 새마을 주택사업을 축소하는 한편 미착수 사업을 연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진행 중인 사업들은 적극적으로 완공을 서두르고 외자유치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1977 년 17 년 만에, 최초로 1,200 만 달러 흑자 달성, 대통령으로부터 격려와 축화를 받았다.
다행히 비가 오면 개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그 후 1976, 77 년 세계 경제가 호황으로 돌아서자, 우리 경제는 고도성장 (1976 년 경제성장률 14.3 %, 1977 년 10.7 %, 1978 년 11.0 %)을 이뤘다. 1977 년에는 중화학 제품의 수출이 증가하고, 중동 진출이 가세해 1960 년 이후 17 년 만에 국제수지가 1,200 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월례경제동향 보고회의에서 이 사실을 보고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무척 기뻐했고“남 부총리 영도 하에
경제 각료들이 수고한 결과”라고 치하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위험수위에 달했으니 결국 성장, 국제수지, 물가의 세 마리 토끼 중 두 마리를 잡고, 한 마리는 거의 죽이고 만 꼴이 됐다. 중동진출 건설업 78 년 30 억불 당시, 국제수지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건설업의 중동진출[中東 進出]이었다. 우리의 용역수입은 1975 년 4 억 500만 달러 수준에서, 1976 년 9 억 4,400 만 달러, 197 7년 약 20 억 달러,
그 후부터는 연간 30 억 달러로 늘어났다. 외자 도입과 인권 문제 고도성장 위해 외자도입 전념. 세계은행 총재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인권문제 지적에 정부 위해 변명, 박 정권 외자유치 총액 151 억불 중, 112 억불(74%)유치 1970 년부터 1979 년까지 10 년간 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9.3% 이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투자율(총투자÷GNP)은 28.1% 였다. 국내 저축률은 22.9% 에 불과했으므로,
그 차액 (투자율 ― 국내저축률) 5.4% 는 외국차관, 외국인투자와 같은‘해외저축’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됐다. 특히 1970 년대에 정부가 외자 도입에 박차를 가한 것은 중화학공업 건설과 사회간접 자본(SOC) 확충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재무부에서 내자 조달을 고민하다가“국민투자기금”을 만들었는데, 1974 년 경제기획원으로 온 다음에는 외자 조달에 전념해야 했다. 부총리 임기(1974∼79년) 중
112 억 달러의 차관이 도입됐는데 이는 박정희 정부 시대의 총 도입액 151 억 달러의 74% 에 해당한다. 이로 인해 국회에 나가면 야당으로부터 ‘외채 망국’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고도 성장과 수출의 밑거름이 돼, 마침내 우리나라를 순 채무국에서 순 채권국으로 만든 것이다. 차관을 도입하자니 세계은행은 물론 미국과 유럽공동체(EC)의 정부와 금융기관을 돌아다녀야 했다. 다행히 1970년대 전반기까지는
국제환경이 매우 유리했고, 그에 더해 해마다 고도성장을 기록하는 한국의 위상과 신용도는 날로 높아갔다. 이 무렵 세계은행 로버트 맥나마라 총재로부터 각별한 지원을 받게 된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새마을사업, 교육과 기술개발, SOC 확충에 필요한 차관 요청들을 너그럽게 받아줬고 심지어 상업적 성격의 차관(현대양행의 창원 중기공장과 같은) 신청까지도 받아줬다. 나는 알겠다고 하면서도 정부를 위해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빵과 자유가 양립할 수 없으므로 민주화를 바랄 수 없지만, 남한과 같은 자유경제 체제하에서는 경제가 성장해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필연적으로 민주화 세력이 자생하고 결국에는 정치적 민주화가 실현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民主化의 경제적 기초[經濟的 基礎]를 만드는 중이니 인내[忍耐]를 갖고 계속 도와달라고 나는 간청했다. 방위세와 자주국방 美 7 사단 철수 등,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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