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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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부하 사랑하는 마음과 용인술
어느 정도 단순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변한 것은 1980 년대 초에 가서나 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 재무부는 금리 차를 적게 하고 적용범위를 확대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다시 미국으로‘학자의 길’찾아 미국행 결심 朴대통령이 靑 초대 여비 건네“가족 생계비 도와주라”는 지시로 교수의 길을 결심 신변을 정리하고 학자로 돌아가자. 그것이 나의 천직이 아니더냐.’ 마침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교수 초청 프로그램이 있어 이승윤 교수가 다녀왔는데, 그 뒤를 이어 나도 그곳에 가기로 했다. 서울대 연세대 경희대 등 각 대학 출강을 모조리 정리하고 평사교수단[評價敎授團]을 비롯한 각종 위원회에도 사표를 내고 나니 홀가분했다. 이제부터 새 생활이 시작된다는 감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평가교수회의에 참석했을 때, 뜻밖의 일이 생겼다. 회의가 끝나고 박정희 대통령이 교수들과 악수를 하는 자리에서
내 차례가 오자 최 주철 기획조정실장이“남 교수는 공부하러 다시 미국에 다녀온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멈칫하더니, 물었다. “그래요. 언제 떠나시죠? “일주일 후입니다.” 대통령은 “이따가 내 방에 좀 들르시죠.”나는“네” 하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에 택시를 타고 난생 처음 청와대로 갔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을 때, 우선 그 방의 검소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 집무실이니까 굉장한 방이겠지’하고 들어섰는데, 책상이 하나 있고 그 앞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한 세트의 소파가 있을 뿐이었다. 대통령은 나를 소파로 안내한 뒤 의자에 앉자,“아주 가는 것은 아니지요?” 하고 물었다.“아닙니다. 1 년 기한으로 대학에서 휴직을 허가받았습니다.”“혼자 가나요?”(박 대통령)“내자와 어린 놈 하나를 데리고 갔다 올까 합니다.
집에는 어머니와 두 아이를 두고 갑니다.”이런 대화가 있은 후에 잠시 평가교수단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대통령은 준비해둔 자색 봉투 하나를 건넸다. “그동안 수고가 많으셨소. 약소하지만 여비에 보태 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책상 옆에 붙은 벨을 눌렀다. 몇 분 후 이 후락 비서실장이 들어 왔다. 박 대통령이 “남 교수가 1년 동안 집을 비우고 미국에 공부하러 간다는데, 집에 없는 동안
가족들의 생계비를 도와주도록 하세요,”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⑤ 운명의 갈림길 귀국 1 년 만 에 재무장관 임명‘14 년 관료의 길’ 접어들어 대통령 “이제 맛 좀 봐!”농담 1 년간의 스탠퍼드대 생활을 마치고, 1968 년 7 월 귀국길에 올랐다. 그 후 1 년이 지나 1969 년 10 월 어느 날, 느닷없이 이승윤 교수가 지프를 타고 달려왔다. 청와대에서 급히 들어오라는 전갈이 대학으로 와서 달려왔는데
곧 개각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정부에 들어오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라고 물었더니, 이 교수는“할 수 없지요. 가야하지요”라고 대답했다. 지프를 타고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김 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부총리는 나를 찾느라고 무척 애가 탔던 모양이었다. 재무장관으로 임명됐으니 빨리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명령조 말투였다. “운명이다, 할 수 없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타이르며 납덩이같이 가라앉은 마음으로 청와대로 향했다. 공사판에서 흙이 묻은 구두를 신은 채, 청와대 접견실로 들어갔는데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축하[祝賀]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하지만 이런 인사는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와서, 신임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주고 나서 정렬이 흐트러질 때, 박 대통령은 나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이제 맛 좀 봐!”주위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그 후 나는 14 년 동안 정부 관료의 쓴맛 단맛을 톡톡히 본 셈이다. ⑥ 재무부에 들어와 보니, 취임[就任]초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막막했다. 통화긴축 강력히 밀어붙이자“현실 무시한 정책”비난 일어도 나에게는 재정금융정책이 생소한 분야는 아니었다. 실무자들의 브리핑을 들어보니, 과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금융[金融]과 세정[稅政] 분야의 부정부패[不正腐敗]를 척결[剔抉]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각별한 노력을 해달라고 당부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과잉 팽창된 통화량을 수축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는 동시에 환율을 현실화하고 금융질서를 쇄신하는 한편 세무, 관세 행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나는 취임하자마자 관세청, 세무 공무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肅正作業]에 착수하고, 공무원의 숙정도 단행했다. 금융 부문의 문제는 더 심각했다. 한국에서는 자고로 선거 때만 되면, 통화량이 급팽창했다. 정부의 선심 행정으로 예산이 팽창하고 금융이 방만해지기 때문이었다. 1969 년 이른바 3 선 개헌을 치른 직후 취임한 나는 통화관리 상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년 국제 통화 기금(IMF)과 재정안정계획을 약정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한데 집행 실적을 보니, 통화량이 약정 액[約定額]을 크게 초과 했는데도 계수[計數]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분식돼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재무부가 국민과 국제기관을 속인 결과가 됐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물론 계수를 현실화할 수밖에 없는데, 언론과 국회, I M F 가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다. 결국 정면 돌파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어느 날 출입기자들을 불러놓고 사태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며, 국제기관의 눈도 있으니 과대보도를 삼가달라고 간청했다. 다행히 출입기자들은 나의 충정을 이해했는지 크게 보도하지 않았고, 일단 불은 끈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던 중, 각 신문이 내가 이전에 보도 자제를 부탁했던 통화량 계수 조작 건을 터뜨렸다. 초긴축이라며 언론이 떠들고 은행과 기업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금융계, 정당 일각에서는 철없는 교수가 현실을 무시한 정책을 강행한다며,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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