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립니다.
= 42 회 =
전자 공업의 육성을 위해서 카이스트[kIST]를 만들다.
한 번쯤은 흉내라도 내야 할 교훈적[教訓的]이다. 김 박사는 대통령에게 KIST 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전자공업의 이해 없이는 첨단기술의 발전이 불가능함을 역설하고 정책을 주도하는 인재들을 세계시장에서 선점 리드하는 기술을 습득하여야 하며, 우리는 지금 막차 맨 끝의 칸을 타려고 합니다. 지금은 제품이 시장에 나오면, 3 개월이면 다른 제품이 나옵니다. 변화의 경쟁은 너무나 빨라졌습니다. 후진국은 제아무리 흉내를 내어도
불가능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박정희란 대통령을 만난 것은 한국 국민에게 행운[幸運]이다. 김 박사의 회고다.‘청와대 보고를 끝내고 떠나는데, 대통령이 현관까지 배웅하러 나오셨지요. 그 분은 밤하늘의 별과 한참이나 대화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는 외로워 보였지요.’1968 년 8 월 1 일. 청와대에서 김 박사가 보고를 끝내고, 식사를 하는데 김 정렴 장관이“김 박사, 축전기와 축전지는 어떻게 다릅니까?”
이때 대통령이“이 사람아, 축전기는 콘덴서고 축전지는 배터리야. 그런데 누가 이것을 추진하지요? 누가 전자진흥원을 책임지지. 김 박사, 돌아오겠소?”“콜롬비아 대학 박사과정 교수로 어렵습니다.” “그러면 기구를 따로 만들 필요 없이 지금 있는 것을 활용합시다.” 결국 5 년 동안 적임자를 못 찾아 전자공업진흥원은 대통령 서랍 속에서 잠을 자야 했다. 이때에 콤비의 역할이 변한다. 대통령, 김 박사, 오 원철이다.
박 대통령과 김 박사와 주고받은 서신이 130 여 통이다. 큰딸 근혜 양이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다닌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영부인이 돌아가신 후, 대통령은 공식행사에 잘 안 가는데 전자전에는 반드시 나갔다. 1979 년 9 월 24 일 한국 전자 전람회[電子展覽會]가 열렸다. 이때 참석한 대통령에게 김 박사는 컬러 TV 시판을 강조했다. 당시에는 금성, 삼성, 대우들이 상당한 컬러 TV를 해외에 수출하고 있을 때이다.
물론 국내 방송사들도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물론 국내시판의 당위성을 누누이 설명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완강했다.“김 박사, 내가 대통령으로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정부가 잘 사는 사람만 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거들 떠 보지 않는다는 것이오. 흑백 TV 도 없는데 훨씬 비싼 컬러 TV 가 나오면, 없는 사람들은 비참한 생각이 들 것이오. 나도 청계천 밑에 사는 사람들을 다 잘되게 할 수는 없어도 못사는 사람들에게
더 초라한 생각이 들게 할 수 없는 것이오” 휴게실에서 “김 박사, 이제 뭔가 좀 돼가는 거요? 전시품은 모두 외국산이고.”“10년 전에 전자육성 방안을 만들어 이제 직접 진두지휘하니 5 년 안에 1 억 달러 수출을 목표로 했는데, 3 년 만에 달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표정은 피곤해 보였다. 김 박사는 10 월 26 일 대통령에게 서신을 썼다. 다음날 대통령 서거[逝去] 소식을 들었다.
김 박사 편지를 대통령은 보지 못했다. 김 박사는 눈물이 쏟아진다. 온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미 대학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 영전에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전자산업을 세계에서 제일로 만드는 것이다. 대통령이 나를 필요로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것을 해야 한다. 김 박사는 대통령을 잃은 것은 콜롬비아대학을 잃은 것이다. 그는 한국으로 귀국해
전자공업진흥회 회장으로 전자신문을 창간하고, 다양한 전자산업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김 박사는 박 대통령과의 무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국 전자공업에 도움 되는 일을 평생 찾아서 할 것이다. 진정으로 박 대통령, 김 박사 그 당시 한국인들은 행복하였구나 생각한다. 대통령은 식사를 하면서, 김 박사 숟가락 위에 깻잎을 얹어주며‘이것 알지. 당신이 온다니 집사람이 준비한 것이야.’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은
장군답게 참모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형이다. ‘임자, 나를 도와줘’아니면‘같이 고생 좀 합시다’ 그러나 결단의 순간에는 혁명가답게 하였다. 때로는 인간답게 때로는 무서운 호랑이 같이 결단의 연속이었다. 역자 註 5 ․ 16 혁명 당시, 우리나라 인재들의 집단이 군에 상당수 있었던 것이 혁명과업 수행에 인재[人才]플 공급처였다. 특이한 것은 8 기생들 중에 능력 있는 인물들의 존재이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당시 우리 관료사회에서
박 대통령의 조국근대화의 혁명과업 수행이 그렇게 콤비를 이루어 실행되었는지, 아마도 대통령의 복이요. 이 나라 역사와 백성들의 홍복[洪福]이였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당시 YS, DJ, 전통, 노[盧]통이 혁명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역사는 천만의 일일 것이다. 아니 천만의 말씀이다. 이들은 박 대통령이 이룩한 업적수행에, 단 한 번도 기분 좋게 찬성한 적이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은 능력위주의 적재적소이다. 자기가 혁명을 한 지도자로서 국가가 필요로 한 결정은 주저 없이 실행한다. 고속도로 실행과 향토예비군 창군, 월남 참전, 조국근대화에 필요한 조건은 어떤 장애라도 적극적으로 극복하였다. 중화학공업 실행은 조국근대화의 핵심이다. 포항제철 박태준 특히 정주영 회장과 삼성 이병철 회장은 조국근대화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우리가 지금 년 간 수백만 대의
자동차를 수출하고, 중공업의 핵심인 조선[造船産業]이 세계 1, 2 위를 다투는 것은 과연 누구의 창조물인가? 물론 이 나라 노동자들의 피와 땀의 결실임을 누가 부인하겠는? 문제는 무조건 피와 땀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리더십의 결정체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마도 전생에 어떤 인연[因縁]이 있었던 것이리라. 박 대통령의 통치철학의 핵심은 “가난은 나의 스승이다”고 한 것처럼, 부정부패를 증오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장기집권을 그리고 인권탄압의 독재성을 성토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나라가 위기나 어려움에 처하면, 더욱 그렇다. 박정희 대통령의 농촌개발의 새마을 사업은 참으로 그의 멋진 창조물이다. 어느 나라 대통령이 농촌 개혁을 추진하면서 노래까지 작사한 일이 있는가? 그가 민족[民族]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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