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올립니다.
= 40 회 =
박정희는 경제의 성공만이 공산주의를 이긴다고 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박정희는 이병철과 남궁련 등 재계 실력자들을 만나, 기간산업계획안[基幹産業計劃案]을 협의하고, 제철공장 하나 건설하는데 1 억 3 천만 달러로 정부 보유 달러를 다 투입해도 부족함을 알고 해결책으로 이병철이 외자도입으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박 의장을 설득하여 1961 년 도미하기도 하였다. 경제정책이 성공하기 위하여, 때로는
선의의 정경유착이 필요하다. 정책정경유착은 바람직한 것이다. 후진국의 경우 권력자와 기업경제인들과의 격의 없는 협의는 참으로 값진 것이다. 1963 년 이병철은 중농정책에서 중공정책[重工政策]으로의 전환을 주장하면서, 국민소득 178 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 년간 21 ~ 23 억 달러의 외자도입으로, 공장건설[工場建設]을 하여, 그 곳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매년 2 억 달러를 재투자하면,
10 년간 15 ~ 20 억 달러의 공장신설 자금을 마련하게 된다. 40 억 달러면, 400 만 달러 규모의 공장 1,000개를 지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총 투자액의 70% 에 해당하는 28 억 달러의 연간 생산 증가가 가능하여, 1 인당 100 달러 소득이 증가하고, 공장마다 평균 500 명씩 고용하면 50 만 명과 그 가족을 계산하면 250 만 명에 달하고, 그 하청업체와 관련 중소기업까지 합치면, 500 만 명이 고용되고 농촌인구를 공업에 흡수 할 수 있게 된다.
1 인당 국민소득 178 달러는 3 년 빠르게 이루어졌다. 혁명 직후 경제개발에 착수할 때 박정희는‘아무래도 내가 쿠데타를 잘못 한 것 같소! 우리나라가 도둑맞은 초가집인 것을 알았소!’해방 후 15 년이 흘렀는데 말이다. 정말 우리나라는 가망이 없는 것인가? 해방 후, 미국원조가 40 억 불이 넘는데 국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혁명 후, 친일외교라는 반대를 극복하고 경제개발 투자 금이 일본의 유 무상[有 無償] 8 억 불이다.
포항제철 건설비도 그 중 일부이다. 만약에 미국의 원조 40 억 불을 잘 썼다면, 우리도 지금은 자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성공은 그 동안 만났던 사람들 중, 그 능력을 눈여겨보았던 사람들에게‘여보, 나를 도와 달라’고 하는 사람관리이다. 권력자들이 대개의 경우 앞에서 알짱대는 사람들을 골라 쓰는 법인데, 그는 인재를 찾아 나서는 스타일이다. 그는 의장 시절 10 원짜리 우동으로 점심을 먹었다.
김종필이 대만을 방문하여 장개석 총통을 만났다. ‘젊은 여러분을 보니 혁명동지 같은 느낌이 듭니다. 혁명을 해 본 노인으로 충고를 할까 합니다. 혁명을 한 사람은 대개 불행해집니다. 혁명을 한 사람은 하루에 한 번씩 자신을 혁명하지 않으면, 안 되니 이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혁명 직후 사상계[思想界]의 대표인 장준하는 군사혁명을 지지했다. 4 ․ 19 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이라면, 5 ․ 16 혁명은 부패와 무능,
무질서와 공산주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 잡으려는 민족주의[民族主義] 군사혁명[軍事革命]이라고 했다. 혁명정권에 권력이 집중되면, 권력남용을 막기 위하여 만전을 기하라고 주장하였다. 혁명정부는 민주주의를 새로운 정신과 내용에서 복구시킬 일련의 방안을 준비하라고 권고했다.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수상 에르하르트는 박 대통령에게“경제발전에는 도로, 항만, 기간시설의 정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비록 나치가 한 일이지만, 아우토반을 건설한 일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히틀러가 백 년 앞을 내다 본, 거대한 사업은 마땅히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나는 평소 아우토반을 진입할 때 경례를 합니다” 자기가 1963 년까지 경제장관으로 경제부흥을 한 몇 가지 요인을 설명했다.“정부가 기본공업 투자를 선행했습니다.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했습니다. 시장경제체제를 빨리 복구시켰습니다.
각하, 분단국으로서는 경제번영만이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입니다”박 대통령은“우리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우리는 라인강의 기적을 배우러왔습니다. 돈을 빌려주십시오. 한국은 가난한 나라입니다.”에르하르트 수상은“각하, 일본과 손을 잡으십시오. 각하! 독일은 프랑스와 역사상 42 번이나 전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데나워 수상과 드골이 악수를 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한국도 일본[日本]과 손을 잡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서독은 4,700 만 달러 원조를 약속했다. 서독 방문 중, 박 대통령과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상면은 너무나 진실 그 자체이다.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만나니 감개무량합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대통령 부부나 광부들, 간호사들은 흐느끼면서 말문이 막혔다. “각하, 우리를 두고 그냥 떠나시렵니까.”서독 대통령도 영부인도 모든 수행원도 모두가 설움에 북받쳤다.
그 설움은 어떤 설움이었을까! “만세! 만세! 대통령 각하 만세! 각하, 우리를 잘살게 도와주십시오!” 40 년 전인 1965 년 10 월 12 일. 맹호부대 월남파병 5 만 명 파월을 단행했다. 단군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 전쟁터에 우리의 국군을 파견할 때, 대통령으로서 얼마나 고뇌를 하였을까? 후세 역사에 평가를 맡기자.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용단[勇断]이다. 월남파병은 우리나라 통치자들 중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정이었다.
위대함에는 위험이 따른다. 월남파병의 가장 큰 수확은 우리 국군의 전투력의 향상이다. 이것은 군사전문가가 아니면 알지 못할 일이다. 당시에 미국 존슨 대통령의 지원으로 양국이 천만 불씩 2 천만 불 합작으로 설립한 KIST 설립은 참으로 멋진 작품이었다. 특히 초대 최 형섭 소장 발탁은 참으로 최고의 인사였다. KIST는 국가지도자와 정책과 인재의 3 위 일체의 앙상블이다. 최 형섭의 13 년간 중용은
우리나라 인사 역사상 드문 일이었다. 박 대통령이 JP 에게 ‘앞으로 내가 물러나면, 내 뒤를 맡아야 하니까 몸조심해! 지금은 내가 있으니 그냥 넘어가지만, 모두들 당신을 헐뜯어. 그러니 상처를 받지 말라! 첫째, 돈 문제에 개입하지 마! 둘째, 인사문제에 자기 사람을 보내지 말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에게 이야기하라’ 그러나 왜?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을까? 두 사람 사이는 혁명동지였는데 말이다.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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