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 31 회 =
박태준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아이앰 에프의 외환위기 극복도 힘들었을 것이다.
골라잡는 일만 남았네’ 결국 포철은 유럽, 미국, 일본이 고루 참여하여 최저 최고 품질이라는 소득을 얻었다. 외환위기 전야[外換危機 前夜] 나는 유랑생활을 마치고, 포항 보궐선거에 출마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 나이 70 에 경쟁자 이기택 총재와는 힘든 싸움을 하고 승리하였다. 자민련 총재로 취임한 11 월 22 일 청와대 초청자는 김대중, 이회창, 임 창열 그리고 나다. 내가 주로 부총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외환보유고가 50 억 달러,
연말까지 갚아야 할 것이 200억 달러인데, 내년 1 월까지 100 억 달러가 있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임 부총리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100억 달러 요청하고 G 7 에 부탁해야 한다고 한다. 국가부도나 다름없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종금사 22 개를 늘렸는데, 거기서 외환관리도 하는 거요?” 속에 쌓인 분노[忿怒]가 참기 어려웠다. “보시오. 우리가 경제개발을 시작할 때, 외환관리의 중요성 때문에 외환은행을 따로 만들었소
무역에 절대 의존하는 경제는 외환관리가 핵심이요. 그런데 종금사들에게 그 권한을 주었으니, 무슨 외환관리가 됐겠소” 김영삼이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지금부터 IMF 관리 요청에 관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점잖게 DJ 가 쏘아붙인다. “박 총재가 다 지적했는데, 회의는 무슨 회의입니까?” 절차[節次]는 남겨야 합니다” 그리고 YS 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하자, 이회창 후보가 발끈한다.
무슨 염치로 외유를 하느냐? 하고 반박하니“DJ 가 누구든 어디든지 달러를 구해야 한다” 고 했다. 그러나 김영삼과 임 부총리 모두 헛걸음만 하고 망신만 당하고 말았다. 결국 내가 도쿄로 가야했다. 1997 년 11 월 30 일. 국제 통화기금 IMF는 30개 종금사 중 12개의 즉각 폐쇄를 요구했다. 나는 오후에 도쿄로 날아가 사카키바라 재무관부터 움직여야했다. 대장성에 도착하면, 오후 6 시가 넘을 것이다. 정문이 닫히니까,
후문에 사람을 대기시키겠다고 한다. 사카키바라는 이미 한국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IMF 가 100 억 달러, 나머지 100 억 달러가 문제다. 일본이 G 7 하고 의논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너무 늦어요” “선생님께서는 묘안이 있습니까?”“G 7 만 믿다가는 한국이 먼저 파산[破産]해요. 그러니 일본이 필요자금의 3 분의 1 을 내겠다고 먼저 선언해 주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지요”
사카키바라는 미소를 지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오야붕을 만나 주세요” 나는 다음 날, 오전 10 시에 다케시타를 만났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일본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는 김영삼의 발언의 앙금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런 시각을 돌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급박한 외환위기를 풀기는 쉽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기간 중, 나는 도쿄에서 눈코 뜰 사이 없는 2 박 3 일을 보낸 뒤 귀국했다.
12 월 5 일 나의 제안에 따라 DJ 에게 구미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하라고 한 것이다. DJT 연대를 하면서, 나는 진심으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과 화해, 영남과 호남의 화합을 바랐다. 나는 DJ 에게, 박 대통령 생가에서 고인과 화해하기를 기대했다. 박 대통령 생가방문이 득표에 도움이 될지, 손해가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나의 뜻은 김민석을 통해 DJ 에게 전달됐다. 나는 박지만 씨에게 DJ 와 동행하도록 부탁하여
고맙게도, 그가 용기를 내줬다. DJ 는 나에게 “그 곳에서 무슨 말을 하면 좋겠습니까?”“고인이 경제에 7 할 바치고 민주주의는 3 할을 했다면, 나는 민주주의에 7 할 바치고 경제에 3 할을 썼다. 이제는 그 차이를 넘어 화해[和解]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주문했다. DJ 는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서 ‘한 시대를 경합했던 사람으로서, 이곳을 찾게 돼 감개무량하다. 박 전 대통령은 경제발전을 먼저 생각했고, 나는 민주화를 말했지만
이는 순서의 차이일 뿐이며,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어렵게 생각했다’ 는 연설을 했다. DJ 는 국정슬로건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은 상식 같아도 이처럼 깊은 고뇌의 반영이었다. 고구려 역사까지 넘보는 중국을 보자. 문화혁명 때 고초를 겪었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대해 7 할은 잘했고, 3 할은 못했다고 정리했다. 문화혁명의 참혹한 억압과 폐해만 따졌다면, 마오쩌둥의 사진은 천안문 광장에서 내려졌을 것이다.
이제 2004 년의 한국에는 달라진 리더십이 필요하다. 절대 빈곤과 극단적 냉전체제가 지배하던 1960 년대식 리더십으로는 나라를 이끌기 어렵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한국엔 피차의 겸손이 절실하다. 유신체제까지 포함해, 박 대통령의 재임 18 년 전체의 공과[功過]를 중국처럼, 통쾌하게 정리했으면 좋겠다. 역자 주[譯者 註] 박태준 회장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군 출신으로 5․16 혁명 전야에 박정희 장군으로부터
혁명 실패 후에 한국군을 책임질 사람으로 지목하고 직접참여를 못하게 하였다. 그는 한강의 기적 중에 기적인 무에서 유를 창조한 포항제철의 기적을 창조한 사람이다. 그 기적은 단군역사 5 천 년의 위대한 역사창조였다. 박태준은 혁명과업 수행에 따르는 위험에서 박 대통령은 그를 보호하였다. 마치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하면서도 등소평을 보호하듯 말이다. 그는 조국의 어려운 고비마다 해결사로서 그 역할을 멋지게 하였다.
그가 군에서 혁명과업 수행의 일익을 담당하기 위하여, 군을 떠날 때에 군[軍]의 최고참 군인[軍人] 이종찬 장군은 ‘당신은 군을 지켜야 한다’ 고 당부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박태준은 이종찬 장군, 이 용문 장군, 박정희 장군 그리고, 박태준 순서로 군지도자의 서열을 갖는 것 같다. 박태준 회고록을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은 포항제철을 국영으로 할 것인가? 민영으로 할 것인가? 박 대통령은 일본 명치유신으로 산업근대화 혁명을 추진 시
핵심 산업의 제철산업이 30 년이나 적자에 허덕인 사실을 예로 든 것은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에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영도자적 자질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박태준과 삼성 이병철 회장의 인간적인 관계와 두 사람이 하는 기업 활동은 국가경제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으로 두 분은 일본통으로 그 어려운 기술이전 문제와 투자의 갈등을 해결하고, 특히 엉터리 대통령이 나라를 부도를 낸, IMF 시 문제해결을 위하여,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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