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 30 회 =
포항 제철 박태준과 삼성 이병철의 만남과 친분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박 사장, 내일 뭐 특별한 약속이 있나?”“아닙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 회장은 1910 년 한일합병이 닥친 시기에 태어났다. 나보다 17 세 연상이다. 대학은 나와 같이 와세다 중퇴이다. 이튿날 안양 골프장에서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과 합류했다. 과거의 일로 다툰 적도 있고, 그로 인해 해임당하기도 하였다. 며칠 뒤에 그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나는 이병철 회장을 최고회의 시절 만났다.
61 년 6 월 혁명 직후, 박 정희 최고회의시절 모두 기가 죽어 있는데, 이병철 회장 그는 당당히 자기 소신을 주장하였다. 그의 소신은 박 부의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병철 회장은‘혁명은 빈곤을 추방하고 경제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무엇보다, 경제성장의 추진력인 기업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국민의 일시적 환심을 사기 위해 기업인을 죄인 취급하는 풍토에선 경제발전이 불가능 합니다.
나는 34 세의 젊은 나이에 이병철 회장의 당당함에 감명을 받았다. 이병철 회장은 나에게“일하지 않는 사람이 뒤에서 손가락질이나 하고 쓸데없는 일을 꾸미는 법이다” 나의 휘어질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오해와 모함을 받는 나에게 격려해 준 말씀이다. 이병철 회장은“영일만의 기적이라는데, 나한테도 한번 보여줘”1977 년 6 월 포철현황의 브리핑을 듣고는“박 사장, 경영에 대한 이런 걸 다 어디서 배웠나?
재무구조가 어떻게 되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포철은 세계에서 어느 기업에 지지 않는 재무구조를 갖고 있다. 포철은 수익으로 차관을 앞당겨 갚아 나갔다. 이 회장은“이런 공기업은 처음 보았다. 내가 선물을 주고 싶은데 무엇을 주면 좋겠나?”“장학금이나 보태 주십시오.” 나는 이 회장을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모셨고, 이 회장도 나를 무척이나 아꼈다. 이병철 회장은 나를 삼성 임원회의에 부르기도 하였다.
박 사장, 나라 일은 그만 하면 많이 했어. 삼성중공업이 계속 적자덩어리야. 매년 300 억 씩 5 년간 도와줄 테니 자네가 아예 가져가게” 눈시울이 찡해졌다. 노선배의 마음이 나를 감동시켰다. “마음만은 너무 감사합니다. 하지만, 광양을 시작했습니다. 광양까지 완수하는 것이 국가에 대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참 아름다운 대답이다. 그래 자네답다. 자네가 고맙다” 그러던 이 병철 회장은 87 년 11 월 눈을 감으셨다.
삼성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이란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경제의 기둥이자 대들보가 되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사랑하는 후배에게 준 선물은 회갑기념문집에서‘박태준은 살아있는 경영 교재’라고 과분한 덕담을 하여주셨다. 이병철 회장은 내 인생에 스승이시다. 삼가 옷깃을 여미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막막한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모든 포철 맨 들에게 고맙기 한이 없다. 모든 공로는 초지일관되게 지원하여 주신
박 정회 대통령과 포철 임직원들이다. 자금이 모자랄 때 기술이 부족할 때, 우리는 할 수 있다. 포철은 반드시 된다, 라는 신념[信念]을 불어넣으면서 반드시 우리 손으로 운영하여야 한다는 각오로 장기적으로 기술식민지를 극복하고, 세계 최고기술을 보유하자는 것이 우리 포철의 지상목표였다. 나는 72 년까지 600 명을 일본, 서독 철강 선진국에 500 만 달러를 들여 연수를 시켰다. 나는 그들에게 당부하기를 무슨 수를 쓰든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배워오라 ! 연수규정에 어긋나는 일이라도 규정까지 어겨도 좋다’ 연수생들에게 일화[逸話]가 많았다. 이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산업스파이 같은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뜨거운 애국심이요, 애사심의 발로였다. 지금은 추억담으로 이야기 하지만, 사실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었다. 돈도 기술도 경험도 없었지만, 가슴만은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나는 목욕 론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나의 청결은 공장의 청결이고, 공장의 청결은 제품의 완벽성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이야기를 귀가 아프도록 강조했다. 모든 현장마다 최신 샤워시설을 갖추도록 했다. 기술력이 쌓이고, 제품의 질이 높아지자 포철엔 자신감[自信感]이 붙었다. 이게 미래를 위한 얼마나 큰 재산인가? 광양 제철소는 레이아웃부터, 포철의 기술력이 집대성되었다. 내가 물러난 12 년 동안 신[新]공법 개발에 매달리고, 마침내 2004 년 8 월
포스코는 최초로 포항에다 150 만 톤 생산규모의 파이넥스 설비공사에 들어갔다. 기술 우선 포스코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후배들의 노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1970 년 5 월. 중국 총리 주은래가 4 원칙을 선언, 한국과 대만과 경제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외국기업과는 경제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중공에 공을 들인 일본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나는 즉시 동경으로 날아갔다. 신일본제철 이나야마 사장은 나의 태산 같은 걱정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포철에 대한 기술원조는 상품거래가 아닌 만큼, 예외라는 단서를 붙여 4 원칙을 인정한다는 것을 중공에 통보하였으나, 중공은 강경하게 4 원칙 수락여부를 명백하게 밝히라고 요구하였다. 신일본제철[新日本製鐵]이 굴복하면 포철은 착공하자마자, 휴업에 들어갈 처지였다. 이나야마는 우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하여 중국 측 요구를 들어 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창업기[創業期] 포철의 최대 은인은 누가 뭐래도 이나야마 사장이다. 나는 도쿄에 가면 반드시 고인의 묘소를 참배한다. 김대중 사건이 일어날 때도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여야만 했다. 일본정부는 한국경협을 전면 중단하였다. 나는 위기감을 직감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노 중열 부장을 대동하고 성탄절도 무시한 채 독일로 날아갔다. 우리는 최고급 호텔 로얄 스위트룸을 잡고, 철강업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도 사업에는 성탄절도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포철은 2 기공사부터 유럽업체도 기회를 주겠다. 1 월 5 일 견적 서류를 준비해 포항으로 모이라고 선언하였다. 나는 포항 영일만 일대 주변에 불을 환하게 밝히도록 했다. 일본 기술자들을 자극하려는 계략이다. 이틀 후 일본대사관에서 일본 업체에도 기회를 줄 수 있느냐고 사정하기에 기회는 균등하다’ 즉시 일본 업체들이 몰려왔다. 나는 노 중열에게 이제 싸고 좋은 쪽으로, = 다음에 계속 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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