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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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의 제 2 광양 제철의 건설 비화
최종 결정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나는 속이 탔다. 나는 경제논리에는 경제논리로 맞서야 했다. 나는 준비를 하여 오히라 면담을 신청했다. ‘일본은 메이지 30 년에 7 만 톤의 야하타 제철소를 지었고,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제철소를 증설하고 그때 일본 1 인당 국민소득은 현재 가치 100 달러 미만이고, 제철소는 안보 차원의 고려가 더 크게 작용했습니다. 현재 한국은 남북대치 상태이고, 국민소득이 200 달러로 그 때 일본보다 높습니다. 너그러운 일이 벌어진다.
그의 실눈이 커지면서, 자신의 삼촌이 경북 영일군 대송면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나는 인연을 찍어 붙였다. “바로 거기에 포철이 들어 설 장소입니다” “정말 우연의 일치군요!” 그는 반대를 철회하겠다는 신호였다. 정부는 73 년 11 월 포철 산하에 제 2 제철 설립추진위원회를 사기업 형태로 바꾸어 태완선 전 부총리를 사장으로 내려 보냈다. 74 년 9 월 한국종합제철주식회사가 탄생했다. 자본금 4 억 달러, 4 년 동안 28 억 달러 투자 연산 50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만들고,
나중에 1,000 만 톤 규모로 한다는 계획이다. 더구나 U S 스틸과 합작하고, 그 신임도를 이용해 국제금융시장에서 19 억 달러를 조달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제철을 보면서 속이 상했다. 이제 겨우 제철 전문가를 육성하기 시작한 마당에 두 집 살림을 하면, 모두 부실해질 것은 번 한 이치다. 당시 나에게는 시련이 닥쳐왔다. 가택수색을 당했다. 아이들만 있는 집에 마구 들어와 금고에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이다. 후에 금고를 열고 집문서뿐인 것을 보고
미안하게 되었다고 하며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하고 돌아갔다. 여기에는 국제 브로커와 얽힌 권력투쟁 음모가 개입돼 있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포철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불러 호통을 치니, 진정서가 어 쩌 구 하며 우물쭈물한다. 나는 덫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순간이다. 그러나 제 2 제철과 정주영이란 강력한 복병까지 가세했다. 1975 년 한국제철은 스스로 백기를 들었다.
파트너인 유에스 스틸이 투자수익률 20% 를 보장하고, 포철 3 기공사를 80 년까지 연기라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결국 국무회의는 경영난으로 허덕이는 한국제철을 포철이 인수 제 2 제철을 건설할 권리를 인정하게 하였다. 포스코는 복이 굴러온 것이다. 포철은 제 4 기 설비구입 예산이 전액 삭감되자, 나는 씨 티 은행 홍콩에서 정부 보증 없이 1 억 달러를 성사시켰다. 현대가 자본금 2 억 달러로 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현대제철을 설립했다.
나는 현대보다 앞서 제 2 제철 계획서를 선수를 쳐 상공부에 제출했다. 1978 년에 포철이 제 2 제철 사업자로 결정된 것으로 보도가 나왔다. 현대가 인천제철을 인수하여 제 2 제철 경쟁에 불이 붙은 것이다. 나는 대통령을 독대하는 기회가 없었다. 현대가 유리하다는 정보도 나왔다. 포철은 수입 철강에 20 ~ 30% 싸게 공급하였다고 세계 철강 업계는 통합하는 추세였다. 제 2 제철 사업자를 결정하는 운명의 10 월이 다가 오고 있었다.
10 월 초, 청와대에서 월간 경제장관회의에서 상공부장관을 만나기로 했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경제수석은 현대를 상공부, 건설부는 포철을 밀었다. 결국 대통령의 결단만이 남은 것이다. 나는 10 월 초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갔다. “이제는 자네 보기도 힘 드는 군”“현대가 들어오면 기술자 빼내기는 뻔합니다. 공격과 방어에 돈이 개입되고 결국 공멸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포철 하나만을 키운다 해도,
세계 철강의 압력을 막아내기가 어렵 습니다”“정주영 회장도 불도저 같이 일하는 분이지, 공헌도 크고 그러나 철강[鐵鋼]은 역시 박태준이야” 이것이 박 대통령의 마지막 선물이 될 줄은 몰랐다. 제 2 제철소를 어디다 세우느냐가 문제로 등장한다. 광양만이냐! 아산만이냐! 가 문제인 것이다. 78 년 11 월 박 대통령은 나를 헬기에 태워 서해의 가로 림으로 날아갔다. ‘박 사장, 가로 림이 어떠한가? 박 대통령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 2 제철은 아산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1981 년 전두환 대통령이 광양만이 타당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전 대통령은‘나는 철은 몰라도 태안반도는 휴전선과 가깝고, 상동반도 쪽에서 북한 공작선이 침투하는 목표지점입니다’ 결국 제 2 제철소는 광양만으로 최종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1981 년 11 월 6 일. 요미우리신문은 부메랑 현상을 경고하고 나섰다. 일본의 기술협력으로 힘을 얻은 한국철강업계가 이제는 오히려 일본시장을
잠식하고 있다는 기사다. 신일본제철 사이토 사장은 82 년 세계철강협회에서 철은 돈벌이 왕이 된다고 말했다. 나는 사이토 사장과 일본에 대한 기술이전 문제로 날카롭게 언쟁도 벌였다. 한국의 낮은 임금에 무조건 기술이전은 일본이 불리하다는 것이다. 나는 일본이 미 일 경제 관계부터 돌아보라. 일본은 미국의 자본과 기술력으로 산업화에 성공해 결국 미국을 최대시장으로 만들었다. 만약 미국이 일본의 성장을 두려워하고
방해했으면 어떻게 되엇겠나’라고 반박했다. 80 년 초, 이병철 삼성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네 어디 계시나?”유난히 나를 아껴주던, 이 선배가 서울에 있는 나를 일본 가르이자와로 오라고 했다. 가르 이자와는 해발 1800m 의 고지로 일본의 대표적 여름철 휴양지로 유명했다. 포철의 은인인 이나야마 회장이 이 회장과 함께 있었다. 이 회장이 저녁 자리를 만들었다. “박 사장, 조금 더 앉아 있어.
내가 이나야마 회장에게 이런 말을 했어.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잘되는 분야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인데 한국에서 박 회장 포스코가 가장 잘되고 있다고 그랬더니, 그 분은 경제원리든 뭐든 다 떠나서 “일은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해야 한다. 사람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우리 사이토 사장이 협조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곧 협조하게 만들겠다고 했네. 내가 이 선물을 주려고 불렀네.
내일 공을 치러 나가면 다른 말은 말고 감사하다는 말씀만 드리게, 다음 날 나는 필드에서 인생의 황혼기에 든, 두 선배를 모셨다. 노래를 하라고 하면 노래도 하고 스윙자세도 봐 드리고 마냥 즐거운 하루였다. 얼마 후 일본철강업계가 한국 광양만 제철소에 기술협력방식으로 기술협력을 한다고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이나야마 회장은 회의 발언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까지 보내왔다. 1977 년 4 월 초, 포항에서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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