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 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 올림니다.
= 66 =
정치 지도자는 사심을 버려야 한다. 박정희 처럼,
블러그에 들어가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한인이 이곳에 처음으로 이주한 것은 1863 년이다. 조선말의 정치 불안과 빈곤으로 1870 년대에 8,400 명, 1923 년에는 1 만 2,000 명이 이주했다는 러시아의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23 만 명이 이주해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1937 년 중일전쟁 시에 스탈린은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이 일본을 지원할지 모른다는 망상으로 17 만 명의 한인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동아일보가 2007 년 1 월 1 일부터 게재한‘카레이스키 강제이주 70 년’ 시리즈 기사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연해주는 원래 간도의 일부였고 간도는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영토였으나, 926 년 발해가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에 멸망하면서 영토를 잃게 됐다. 그 후 930 여 년이 지나, 1860 년 베이징(北京)조약에 따라,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됐다. 1905 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은 1909 년 9 월 4 일 청일 간도협약을 통해 남만주 철도부설권과 탄광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청나라에 연해주를 제외한 간도 땅을 넘겨줬다. 이로 인해 조선과 청의 국경을 지금과 같은 두만강과 압록강 경계선으로 확정해 버렸다. <73> 동북아개발은행을 설립하라! 北 - 中서부 - 시베리아 등 개발 촉진, 동북아개발은행 설립,
1990 년 제안, 한중일 정상회의 정례화도 필요, 동북아 안보협의기구 N A S O 를 창설하라! 한반도 평화통일. 다자협상 불가피. 6 자회담, 안보협의체로 선진화 운동 한국, 선진국 문턱서 여러 난관 봉착‘자유롭고, 살기 좋고, 평등사회’지향. 선진화포럼 발족. 다양한 논의 수렴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朴 대통령 경제입국 보좌한 관료로 개발시대 경제정책 이해 도움 되길 … 高 인플레 - 부동산 투기 등 아쉬움도
이제 필자가 걸어온 이야기를 마감할 때가 왔다. 돌이켜보면 필자는 성공한 정책가도 아니고, 성공한 경제학자도 아니었다. 경제 전문가로서 자기의 주견이 있었으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행정적 수완이 모자라서 주위 환경과 타협하는 정부 관료에 불과했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정책의지를 시장경제 이론의 틀 안에서 소화하려고 안간힘을 다한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나는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개발연대의 경제정책의 명암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 회고록이 지난날의 경제정책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후대들이 선대들의 공과를 거울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거의 경제 운영에서 아쉬웠던 점, 몇 가지를 적어둔다. 첫째, 후진국에서는 정부가 경제개발을 주도하지 않으면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개발정책으로 경제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복잡해진 경제구조를 정부가 관리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경제발전에 시동이 걸리면 점진적으로 정부 역할을 시장경제의 자율기능으로 넘겨야 한다. 둘째, 인플레이션을 수반한 고도성장이 1970 년대 경제발전의 특징이다. 여기에는 두 차례의 오일 파동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수입이 개방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화와 총수요가 팽창하면 인플레이션이 따르기 마련임을 알면서도, 당시의 여러 사정으로
개발수요, 유치산업 보호를 위한 수입 통제, 물가 사이의 상충관계를 적절히 조정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셋째, 토지정책을 수립하지 않고, 개발정책을 추진한 결과 부동산 투기와 땅값 상승이 언제나 정부를 괴롭혀 왔고,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토지의 사유권은 인정하되, 이용권을 사회화[社會化]하는 방향으로 토지정책을 확립했어야 했다. 넷째, 건전한 경제운영에 필수적인 정책은 장기에 걸쳐,
일관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정치 경제 환경이 어렵다 하여, 1972 ∼ 74 년에 시행한 기업공개와 기업집중 및 부실화 방지정책을 일관적으로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에, 1997 년의 외환위기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 다섯째, 대내적 구조조정을 통해 금융업체 및 기업의 경영 방식과 정부 정책 관행을 어느 정도 국제기준에 맞추어 놓지 않고 국내 경제를 개방하면 외환위기와 금융파탄이 올 수 있다. 여섯째, 정부가 대대적인
경기부양 정책을 실시하고자 할 때에는 사전에 주요 원자재의 공급능력과 고용효과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물가상승과 같은 의외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일곱째, 정치적 국면 전환을 위해 빈번히 경제장관을 바꾸는 것은 대통령 자신에게 확고한 목적의식이나 경륜이 없거나,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책의 일관성이 없다면 그것은 장관보다 대통령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다.
끝으로, 국민에 대한 경제교육이 부족했다. 천연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수출로 먹고살아야 한다. 그러자면, 노동과 머리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노동으로 경쟁하자면, 노사(勞使)가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하고 머리로 경쟁하자면, 과학 기술과 사회 각 분야의 문화수준을 높여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잘살 수 있게 되려면, 경제성장과 공정분배의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가치관을 심어주도록,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 에필로그 - 우리의 가치 = 1994 년과 똑같은 한반도 위기상황“국민통합”내세우면서도 싸우기만 … 구심점 없는 국민통합은 가능할까? 지금 북한의 핵실험을 둘러싸고, 남북 간의 긴장상태가 재연되고 있다. 1994 년에도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이 있었다. 1992 년 5 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에 대한 임시 사찰을 실시하게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북한은 두 곳의 핵 시설을 신고하지 않았다.
I A E A 가 두 시설의 특별 사찰을 수락하라고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 북한은 1993 년 3 월 핵확산금지조약(N P T)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1993 년 5 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은 N P T 탈퇴를 철회하고, N P T 의무를 이행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 북한은 1994 년 6 월에 I A E A 를 공식 탈퇴하고, 영변에 있는 원자로를 재가동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윌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은 비밀리에, = 다음에 계속 됩니다 =
-- 안동 촌노 --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소음 없이 실내를 쾌적하게 만드는 환풍기로 변신하는 마술
게시물 삭제요청방법
Copyright(c) www.nongak.net
tapng97@hanmail.net
연락처 : 010-4696-7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