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이면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 져서, 저가 알기 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 27 회 =
대일 청구권으로 포항제철을 건설하다!
실제로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 박 대통령은 온갖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1970 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시켰고, 나는 1973 년 포철 1 기공사를 완성했던 것이다. 공사비가 경부고속도로 공사비의 3 배나 많은 대역사의 규모였다. 1968 년은 북의 124 군 김 신조 등 31 명이 청와대기습사건과 프에블러호 피랍[被拉]사건으로 국민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했던 시기이다. 회사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또한 국영기업으로 할 것인가? 나는 상법상 주식회사를 주장했다. 대통령은 일본을 봐’!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어느 제철소도 30 년 동안 적자를 면치 못했어! 국영으로 해야 적자가 나면, 정부가 책임을 지지. 그래야 자네도 편하지 않겠나? 나는 나의 주장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제 3 의 선택으로 국영기업과 민간기업의 장점을 살린 형태를 택하였다. 37 년 전 이렇게 최고 권력자와 참모들은 사심 없이 격의 없는 토론을 벌이며,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했던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의 젊은이들이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인간 박정희와 인간 박태준은 대체 어떻게 인연을 맺어
그렇게 분에 넘치는 인간관계를 맺으며, 서로가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영혼[靈魂]까지 불사르게 되었단 말인가? 결국[結局]은 국가발전의 역사이며, 핵심은 인간관계[人間關係]이다. 아마도 박 대통령은 육사시절부터 박태준을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74 년 6 월 28 일 대통령과 영부인은 포철을 방문하여 임직원들에게 따뜻한 격려가, 쇳물공장에서 일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8 월 15 일의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64 년 정초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 대통령과 여러 병의 술을 마셨다. 대통령은 ‘여보게, 나를 도와줘!
도망갈 궁리하지 말고 경제개발 하는데 돈이 필요해.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는 것이 급선무야, 공식외교만으로는 안 되겠나? 일본에서 편지가 왔는데 비밀특사를 요구해,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 통역이 필요 없는 사람,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사람 가능하면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야 돼.’나는, 꼼짝없이 발목을 잡혔다. 대통령은 봉투 하나를 내밀면서 ‘자네, 집도 없더군. 내가 부려먹기만 해서 애들 엄마한테 미안하게 됐네.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집이라도 있어야지”
나는 결혼 10 년 동안 15 차례 이사를 했다. 나는 그 돈으로 북아현동에 집을 마련했다. 2000 년에 팔아 10 억은 어느 財團에 기부했다. 박 대통령의 하사금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0 년이 지난 지금 그때 우리를 맹렬히 비난하던 북한이 대일 청구권을 받겠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북한도 기필코 받아 빈곤 극복과 경제건설의 종자돈으로 삼아야 한다. 늙었지만, 나도 도울 일이 있다면 돕고 싶다. 박태준은 박 대통령의 대일 교섭 밀명을 특명 받고, 미 극동군사령관 또는 휴전 회담[會談]시,
미군 통역을 하던 박철언이라는 인물의 라인으로 그는 일본인 야스오카를 만난다. 그는 1904 년 생으로 도쿄 大 재학시절에 「중국의 사상 및 인물 강화」라는 책을 쓴, 명성 있는 인물로 해군 대장 야시로가 26 세의 그와 양명학[陽明學] 토론을 벌이다가 끌어안았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도 있는 인물이다. 야스오카는 한국의 퇴계 선생을 존경하는 친 한파[親韓派]다. 그는 정치적으로 우파이고, 전후 일본 정치 경제 지도자로서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막강한 막후 실력자이다. 박 철언과 야스오카 라인을
대일교섭 막후 인물로 하여,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을 건설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박 철언은 장면 정권시절부터 일본통으로 활약하였다. 나는 대통령에게 독립선언 33 인 중 한 분인 이갑성 선생의 아들인 이 용희 교수를 대일특사로 추천하여 결국 이 교수와 박 철언이 야스오카 라인을 가동시켜, 도쿄 거물들과 줄줄이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이케다 총리 사저로 초청을 받기도 하고, 박정희 ~ 이케다 회담이 성사되게 되는 것이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고 경제개발은 해야 하고
참으로 돈이 절실히 필요한 시절이었다. 나는 다행히 야스오카에게 인정을 받아 뒤에도 많은 도움을 그로부터 받게 되었다. 야스오카는 환갑을 지나고 나는 37 세였다. 우리 두 사람은 세계정세와 동북아 문제를 포함한, 한일관계 현황과 미래에 대한 광범위한 대화를 나누었다. 야스오카와 나는 한일관계를 양국은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관계로 규정한다. 한 가닥의 띠와 같은 좁은 물을 사이에 둔 관계라고 한다. 현해탄을 한 가닥의 띠로 보는 절묘한 표현이다. 64 년의 일본은 활력이 넘쳤다.
올림픽 개최를 준비하는 도쿄는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패전의 참혹한 폐허는 찾을 수 없었고, 그들은 시속 250km의 신칸센 부설공사를 한다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나의 일본에서의 행동은 경시청의 카메라가 주시하고 있어서, 어떤 경우에도 국가의 체면과 개인적으로도 품위를 강조하였다. 그로부터 30 년 후, 93 년 국내정치에 휘말려 망명생활시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다케시다 전 총리가 찾아와 ‘일본 경시청 내각 조사실에서 다 조사했는데, 일본금융기관에 당신 통장이 안 나오고 있다. 64 년의 행적도 깨끗하고
정치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일본기업과 거래하면서 통장하나 만들지 못 했는가’ 하면서, 그는 일본 몇몇 정치가가 뜻을 모아 당신에게 매월 일정한 생계비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나는 대일 막후 협상을 하는 동안 일본 전국을 시찰하면서 조국으로 돌아가 경제 쪽에서 일할 기회가 온다면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64 년 귀국하니, 나는 대한중석 사장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김종필은 나를 이 후락과 교체하여 비서실장으로 밀었던 것이다. 나는 52 년 6 월 중석불 부정사건을 생각하였다.
당시 한국 수출 총액이 4 천만 달러였는데, 중석 텅스텐 수출액이 1 천 5 백만 달러였다. 그러고도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있어, 대통령은 대한중석의 개혁을 나에게 맡긴 것이다. 나는 대한중석의 대수술을 위해 메스를 준비하였다. 나는 몇 가지 타협불가 원칙을 세웠다. 이 원칙은 포철에서도 적용되었다. 대한중석에서 나는 몇 명의 인재들을 발견하였다. 고 준식, 안 병화, 장 경환, 곽 증, 주 영석, 최 영춘, 심 인보, 홍 건유, 이 원희, 현 영환, 도재한, 이 영직, 김완규, 박 종태 등이다. 특히 황 경노, 노 중열은
미 육군 경리학교를 수료, 대학에서 회계학 강의도 하는 육사시절부터 눈여겨본 인물이다. 나는 그들을 같이 일하자고 하여 동의를 얻었다. 그들이 나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대한중석의 개혁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포항제철의 성공도 그들의 힘이 있었기에, 성공한 것이다. 3 년 4 개월 대한중석 사장으로서의 경험은 우리 멤버가 국가적 사명인 포철건설을 위한 팀워크를 다지면서, 회사 경영의 노하우를 익혔던 시기였다. 치열한 경영수업 기간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들과 그 시절을 함께 보낸 것은 나와
포스코와 국가의 복[福]이었다. 대한중석의 인사는 절대 공정을 기하고, 능력에 따라 승진과 보상을 결정 하였다. 그리고 나는 누구의 경영간섭도 받지 않는다. 청와대 고위 인사의 인사 청탁도 거절했다. 나는 그 사원을 해고하였다. 그의 홀어머니가 부산에서 올라와 남편은 전쟁에서 전사하고 어렵게 자식을 키웠다는 것이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고 거절했다. 나는 후에 그를 포스코에 불렀다. 전쟁미망인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장 부임 후 강원도 상동광산을 찾았다.
-- 안동 촌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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