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180 억 건설부 650 억 육군공병대 490 억. 현대 건설 280 억. 서울시 180억 + 건설부 650 억. 중간 315 억에 현대 280 억 = 300 억 1967 년 12 월 15 일. 안 경모 교통부 장관을, 고속도로 건설 본부장으로 임명, 1968 년 2 월 5 일 재원확보 의결로 휘발류 세 139 억. 통행세 60 억. 양곡판매 대금 84 억. 대일청구권자금 27 억. 통행세 15 억. 예산 6 억. 합계 331 억을 일주일 내에 박 대통령은 토지 보상 문제를 사전에, 모 은행장에게 별도 감정을 완료하여, 대통령은 반드시 감정가를 고집하지 말고서 융통성[融通性]을 발휘하라!
현지지시를 최대한 빨리 완료하라! 분명한 것은 1 일내에 매수 보상을 완료하라는 특별 언명을 하달, 빠를수록 좋다. 각시도지사들은 일주일내에 완료했다. 1968 년 1 월 12 일 서울 - 대전 노선 확정. 1968 년 1 월 29 일 서울 - 부산 건설사무소 설치, 소장에 공병 출신 예비역 소장 허 필은 을 임명, 감독관 육사 공병장교 독신 22 명, ROTC 출신 12 명을 선발 배치하고 준공식에서 공로훈장을 받은 장교들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건설비는 K M 당 1 억 원으로 일본의 8 분지 1 이다. 경부고속도로는 하나의 거대한
대합창이나 교향곡[交響曲]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작곡 작사 지휘로 이루어진 불멸의 작품이다. 땀과 눈물과 민족중흥[民族中興]의 대 서사시[大敍事詩]다. 고속도로의 비화에는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2011 년 국토해양부 발행 국책사업 갈등사례 분석 및 시사점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일본 도메이 고속도로 자금데이터를 참고하였고, 부지 매수는 서울 부산 땅 값이 M 2 당 170 - 180 원 대통령은 m 2 당 300 원으로 매수 지시했다. 대통령은 몇 월 며칠까지 완료하라 못하면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다짐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기간 2 년 5 개월 중, 매달 비서관들로 하여금, 450 명의 감독관들에게 2 만원 씩 (주사 월급 22.000) 지급했다. 공사 중 희생자가 77 명이었다. 박대통령은 위령탑 앞에서 묵념을 올렸다. 아시아 개발은행에서 600 만 달러 차입 세계은행에서 5000 만 달러, 고속도로 건설에 투입할 중장비 구입비 당초에는 1 차 간설 규모를 서울 대전까지 안을 대통령이 이왕이면, 서울 부산까지 하시오! 428 K M 를 확정지었다. 추풍령 위령탑에는 서울 - 부산 고속도로는 조국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
1970 년 7 월 7 일 대통령 박정희는 호남고속도로 1970 년 4 월 15 일 - 73 년 11 월 완공, 영동고속도로 1971 년 3 월 24 - 1975 년 완공, 동해 고속도로 1974 년 3 월 - 1975 년 완공, 구마고속도로 1976 년 5 월 - 1977 년 완공, 부마고속도로 1978 년 5 월 - 1981 년 12 월 준공( 대통령 서거 후) 남해 고속도로 1973 년 11 월 완공, 남해, 호남 고속도로 곡창지대 남해[南海]를 거쳐, 제일항구도시 부산을 연결. 영호남을 향후 일일 생활권으로 연결 전주, 광주의 공업단지. 이리 수출단지 자유지역 군산항 개발 여수, 광양만
중화학공업단지 옥포, 죽도의 대단위 조선소 창원기계공업단지 낙동강 유역개발 영호남 고속도로 437 K M 전체고속도로 3 분의 1 이다. 1973 년 11 월 14 일 호남고속, 남해 고속도로 준공식에서, 이 고속도로는 비단 물량의 수송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총화단결의 동맥입니다. 고속도로는 모든 지역의 융화와 국민총화를 경고이 해 나간데 크게 기여할 것을 확신합니다. 박대통령은 경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동해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 언양 - 울산, 등 8 개
고속도로를 1967 년 5 월 1 일 착수, 1977 년 12 월 14 일에 10 년 만에 완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 년 대통령 선거 공약이었다. 대한민국은 5 천년 동안, 동맥 없는 국토에 국민의 의지와 선진국을 행한 강력한 열정의 대동맥의 관통이다. 특히 정주영 회장의 이해타산을 초월한 국가적 차원에서 고속도로 건설에 많은 협조를 제시하고, 박대통령의 국토개발, 중화학공업, 중동진출, 많은 창의와 조언을 많이 했다. 박대통령에게 경제개발에 특급 경제 참모였다. 특히 두 분이 막걸리를 마시면서, 경제 현안을 논의 하는
광경은 어느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인 광경이었다. 사채동결[私債凍結] 금융위기극복[金融危機 克服]의 대 영단[大英斷] 8 . 3 긴급조치의 경제적 배경. 고도성장으로, 자기 자본보다 타인 자본의 의존도가 높은 기업재무구조의 취약성, 통화량 증가, 물가 상승, 환률 인상, 악순환 등 고도성장에 따른 부작용이 70 년대 불황국면을 당하여 장기영 부총리가 금융현실화[金利 現實化]로 인플레 방어수단으로, 실물 투자 사채 시장으로 몰리는 자금을 은행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정기예금 1 년 만기 15% 에서 30% 로 인상하는
금융개혁[金融改革]조치를 단행 후에 4 년 - 5 년간에 한국경제 경제실적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즉, 한국경제 위기를 사전에 예방한 긴급처방[緊急處方]이었다. 8.3 조치 후에 G D P 평균 10% 이상 경제성장 1969 sis 13.8%. 1970 년 7,6% 1971 년 5.7% 떨어지고 부실기업 속출, 경제, 정치 사회문제 가 제기 되어, 정부는 1969 년 재정비가 불가피하다고 결정, 적극적인 대책을 강수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부실기업 정리 시작, 천우 사 계열 등 30 개 정리를 2 단계로 56 개를 정리 착수, 8 월 14 일 구체적인 정리대책을 확정.
부실기업정리 원칙으로 거대한 빚보증은 운행을 구제하고, 차관기업은 정부 차원으로 육성하고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을 망하지 않는다는 풍토를 불식하고, 기업인 재산을 경매처분 하였다. 소생된 기업이 한국비료, 인천제철, 한영공영, 조선공사, 한국 전기치금, 대림산업 등이다. 8 . 3 조치 배경에는 전경련 의 건의를 받고 결정, 당초에는 사채업자들이 동양시멘트 등 사채 차입기업들의 경영 상태를 체크 하고 시작했다. 김용 완 회장이 대통령에게 직소하기로 결정, 김 용완 전경련회장은 매월 열리는 수출 확대회의에서
대통령에게, 사채 이자가 너무 높아 부실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사채는 은행이 맞고, 세금을 감면하고 금리를 내리고 긴축정책을 완화 하고, 정부예산[政府豫算]을 반[半]감론 을 주장, 이것은 결국 세금 반으로 줄이라는 것은 대정부 폭탄선언[對政府爆彈宣言]이다. 대통령은 우선 100 억을 배정할 것이나, 전경련에서 급한 것을 처리하라고 하니, 김 회장은 전경련에서 아무리 공정하게 하여도 믿지 않을 것이니 정부가 직접 할 것을 요구, 대통령은 김 종완 회장과 단독 면담으로 기탄없는 건의를 받아들였다. 고리사채로 기업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비상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기업은 모두 망 할 것입니다. 대통령은 김 회장에게 해결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하면서 대통령 비서실장은 화폐개혁을 두 번씩이나 한, 김 정렴 실장이 있으니 실장이 개혁 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사채에 대하여도 강력한 조치를 요구한다. 대통령으로부터, 김 회장의 건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어, 다음 날 보고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보고서 첫째, 기업들이 80% 의 외부차입으로 외국에 50% 를 넘는 문제.
둘째, 기업의 사채를 대불 할 것. 셋째, 사채를 일정기간 동결해 주는 것만이 기업의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대량해고(大量解雇)와 대량실업[大量失業]을 예방[豫防]할 수 있다. 모든 사채[私債]는 무효화[無效化]하고 새로운 계약[契約]으로 대체한다. 넷째, 사채권자의 희생 위에 기업이 소생되면 대기업으로부터 공개를 단행시켜 자기 자본을 증강시킨다. 종업원 지주제를 강화한다. 선량한 중산층[中産層]에 사채권의 희생은 마음이 아프지만 불가피[不可避]하다. 김 정렴 실장은 대통령에게 보고를 마친 후에 세계 역사상,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