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이나, 박정희 시대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현장에서 다 같이 힘들게 조국근대화를 이루신, 육 십 대 이상의 조국근대화 세대들은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 통치 철학 연구소 소장이신, 김세영 선생님이 사실적으로 가감[加減]없이 진실 되게 기록하신 현대사인,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끄신 정치철학과 5,16 혁명으로 민족중흥을 성취[成就]하신,
박정희 대통령님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글을 봐 주시길 부탁 올립니다. 이글은 앞으로 저가 수십 회에 걸쳐서, 여기 논장에 올릴 것입니다. 여기 기록되는 글은, 김세영 선생님께서 직접 장기영 총리의 재경부에서 근무하시면서 쓰신 글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단 한자도 빼지 않고 그대로 기술[記述]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이 쓰여져서, 저가 알기쉽도록 한글로 번역을 하면서, 오타가 있는 글은 저가 수정과 교정을 했음을 말씀드립니다.
= 제 11 부 =
박정희 경제정책에 대한 장기영의 외국 초청 연설
이와 같은 부대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융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유화 론의 배경은 신고전파 경제학으로서 정보[情報]가 완전하고, 모든 제화와 서비스의 시장이 존재하며 그 시장[市場]에서 자유경쟁[自由競爭]이 충분[充分]히 이루어지며, 효율적[效率的]인 자원배분[資源配分]이 달성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은 정보가 완전하지 않으면 시장[市場] 또한 불완전하고 행정역량도 미숙하여 개발도상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행정적[行政的]으로나 정치적[政治的]으로 충격적[衝擊的]인 무조건[無條件]
자유화[自由化] 조치[措置]를 감내할 수 없는 개도국들은 세계은행의 구조조정[構造調整] 융자는 엄두도 못 내고 빈곤[貧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만다. 산업정책과 정책금융 등을 활용해서, 세계 굴지의 경제대국이 된 일본은 1980 년대에 들어와서 개발도상국의 실수요자에게 대외협력기금 또는 일본 수출입은행의 전대차관을 통해, 장기 저리의 자금을 공급했다. 이는 금리 자유화를 부대조건으로 하여, 실세 금리로 융자해야 한다는 세계은행의 전래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시장에서 효율적[效率的] 개입[介入]을 주장한
일본대표[日本代表]들은 특히 세계은행과 일본 측과 공공자금을 합쳐 공동 융자 시[公同 融資 時] 일본정부는 세계은행의 부대조건에는 구애받지 않고, 정책적으로 장기적으로 융자하였다. 두 자금의 금리와 조건이 상이하게 됨으로, 세계은행 이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중국과 인도 개발도상국은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고 미국, 영국 등 선진국들은 반대[反對]한다. 1991 년 일본정부는 공식으로 그 견해를 공개하였다. 교의[敎義]에 대한 회의 [일본은 세계은행의 정통파적 관행에 도전하다] 1991 년 태국 방콕에서
세계은행과 I M F 의 합동연차 총회에서 일본대표인 일본은행 총재는 산업정책[産業政策]과 정책금융[政策金融] 같은 정부개입[政府介入]은 자유 시장[自由 市場]이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시장[市場]을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세계은행의 무차별적[無差別的]인 규제철폐[規制撤廢]및 자유화 처방[自由化 處方]을 비판[批判]하였다. 이에 세계은행[世界銀行] 총재[總裁]는 개발경제이론[開發經濟理論] 담당 부총재를 통해 동[東]아세아 경제성장[經濟成長]과 공공정책[公共政策]에 관한 국가 간[國家間]
비교연구[比較硏究]에 착수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은 이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대기로 약속했다. 이로서 동아시아의 기적과 경제성장과 공공정책, 정책금융의 유효성 등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 해 일본 대표가 한국, 인도네시아, 인도의 산업정책에 대한 연구를 끝내고 결론으로 3 개국 특히 한국의 정부개입이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은행[世界銀行]은 개발정책[開發政策]을 기안할 때, 이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세계은행이 가격의 자유화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으며, 유치산업의 육성에는 전혀
무관심[無關心]하다고 지적하고 시장에 보다 효율적으로 개입하여 경제를 개발하는 제도적 기술적 능력을 증대시키는 데 집중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시아의 성공사례가 다른 개도국에 적용될 수 없다. 세계은행의 직원들은 중남미 아프리카의 정부들이 그들 경제에 개입할 제도적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며, 만일 이들 정부에 보다 많은 자유재량권이 부여된다면 이들 지역은 부패로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해 하반기에 세계은행[世界銀行]으로서 규제철폐[規制撤廢]와 자유화[自由化]라는
종래의 정책을 답습할 것이냐, 또는 유효[有效] 적절한 정부의 개입을 용인할 것이냐의 문제를 검증하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총재 특명으로 구성되어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해산하게 되었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세계은행은 1993 년에 들어와 정부 주도로 고도성장을 이룩한 한국과 일본을 주 의제[主 議題]로‘동아시아로부터의 교훈’이라는 간담회를 열게 되었다. 여기에 한국을 대표하여 나를 초청하고 일본대표로 하버드 객원 교수 겸, 동경은행 회장을 초청하였다.
나의 기조연설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 1961~1979 년으로 45 분간 발표하고 질의, 응답으로 진행되었다. 왜 ? 한국정부가 경제개발 초기 단계부터 강력한 지도를 필요로 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60 년 초반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환경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1 차 경제계획 수립 당시 우리나라 기술자는 태부족이다. 전문대학 이상 졸업 기술자가 1. 600 명 정도이고, 외환부족이 심각하고 국민은 고사하고 일반 관료, 은행원, 기술자 등이 선진국 산업시설을 구경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모든
제조업의 공장 시설의 규모와 특허권 등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통계가 없는 나라가 한국이었다. 모든 것이 주먹구구식으로 작성될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과의 제 1 차 회담 시 미국 고위 당국자는 경제개발계획이 아니라, 공장의‘쇼핑 리스트’라 평하여 순조로운 진행이 어려웠다. 국내 저축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 외자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당시 한국기업주로서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차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은 정부가 지급보증 한다는
외국에 그 예가 없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외국의 직접투자는 경제식민지가 될 염려가 있다는 반대를 극복하고, 외국기업의 국내 진출과 기술 이전, 경영기법 습득 및 해외시장 진출 등을 위해 강력하게 실행하였다. 특히 우방대기업의 직접투자가 국가안보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5 개년 계획 집행에서는 계획경제 성격도 띄어 정부는 외국차관 도입을 효율적으로 건전하게 관리했으며, 외채관리도 매우 잘했으므로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국내 자본의 해외도피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모든 공공, 민간 진척상황을 직접 점검했다. 분기별 국가주요사업 심사 분석[審査分析]을 직접 주재[直接 主宰]했다. 매년 심시분석[審査分析]은 수정되었으며, 각 부처는 자기 부의 목표달성을 위하여 매진하였다. 대통령은 관계감독기관으로부터도 심사분석 보고를 받았다. 주요 경제시책은 수출의 적극적인 진흥, 중화학공업의 건설, 방위산업 육성, 농업개발, 새마을운동, 개발도상국의 종합제철 건설을 반대한 세계은행의 지원 없이 건설한 포항종합제철[浦港綜合製鐵]의 성공사례를 소개했다. 적정규모가 300 만 톤으로
100 만 톤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고 차관도입을 거부당했다. 한국의 제철[製鐵]건설은 무모[無謀]하다고 무시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성공한 것이다. 물론 포항종합제철의 사령관은 그 유명한 박태준이다. 참으로 하늘이 점지한 리더이다. 박 대통령의 등장은 역사적 다행이다. 박 대통령과 하늘과 백성과 애국심에 열정에 불타는 관료들, 그리고 명콤비인 김 정렴 비서실장과 정주영 왕회장과 삼성 이병철 회장의 등장이다. 종합제철[綜合製鐵]은 이익이 나더라도 주주인 정부, 산업은행,
시중은행, 대한중석에 배당을 하지 않고 사내 유보하여 시설확장과 재무구조 건전화를 도모하도록 하였다. 1972 년부터 이익을 올렸으나 1982 년까지 주주배당을 못하게 하였다. 한국산업 정책의 성공사례는 박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이 성공의 근본이었다 할 것이다. 미국은 1965 년에 원조를 중지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과중[過重]한 방위비[防衛費]와 전력부족[電力不足]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6 ․ 25 남침의 민족상잔[民族相爭]으로, 모든 산업시설은 모두 파괴되고 휴전 후에도 간단없는 도발은 계속되고 특히 = 다음에 계속됩니다. =
-- 안동 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