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 부 =
박정희 대통령의 안보와 통일관[統一觀]
대통령은 경제단체장들과 기탄없는 의견교환으로 경제문제를 타개했다. 방위산업 기업들은 전적으로 애국심[愛國心]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적자를 보면서도, 눈물겹도록 충직한 애국자들이다. 미군 계속 주둔은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육성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공산진영과 싸우다가도 불리하면 농업 국가는 포기한다. 월남이 그 같은 경우이다. 내우외환 속의 리더십 박 대통령의 통일관[統一觀] 국토의 분단 상태[分斷狀態]를 민주주의의 승리로써 종결시킨다는 문제가 단순한 희망이나 결의만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64 년 12 월 8 일 서독 대통령 리브케와 만찬에서 우리의 경제[經濟] 우리의 자유[自由] 우리의 민주주의[民主主義]가 북한[北韓]으로 넘쳐흐를 때, 그것이 곧 남북통일이다. 67 년 1 월 1 일 연두교서[年頭敎書]에서는 통일을 안 했으면 안 했지, 우리는 공산식[共産式]으로 통일을 못하겠다. 민주통일을 해야겠다. 67 년 4 월 23 일 대구유세. 북한 공산집단의 만행을 분쇄하고 이 땅에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고 국토를 통일을 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즉. 國力을 기르는 일이다. 혼란[混亂] 없는 안정[安定]속에
자립경제[自立經濟]와 자주국방 건설[自主國防 建設]을 중단[中斷]없이 추진[推進]함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고, 발전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71 년 4 월 13 일 칠백의총 보수 정화 준공식 치사에서, 평화통일의 첫 길이라고 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 공산집단으로 하여금 무력통일 야욕[武力統一 野慾]을 완전[完全]히 포기[抛棄]케 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들이 전쟁도발[戰爭挑發]을 하더라도,
충분히 전쟁을 억제할 수 있도록 우리의 힘을 배양하고, 우리의 안보체재[安保體制]를 더욱공고[鞏固]히 해야 되겠다. 72 년 1 월 11 일 기자회견[記者會見]에서, 통일역량[統一力量]의 성장[成長]은 북괴집단[北傀 集團]이 약체화[弱體化]되어 가는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積極的]으로 우리의 국력증강[國力增强]의 과정[過程]에서 추구[追求]해야 한다. 67 년 8 월 15 일.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경제건설은 바로 국력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71 년 1 월 1 일 신년사[新年辭]에서는 우리의 국력을 배양하고
우리의 국력이 빨리 성장해서 모든 면에서, 북한 공산집단을 압도하는 시기가 결국은 평화통일의 길이 트이는 시기다. 71 년 1 월 11 일. 기자회견에서는 통일은 결국 국내외적인 조건의 성숙과 더불어 이에 대비하는 우리의 주체적인 힘의 배양에 의해서만 이룩된다. 우리 자체의 내실을 키워야 하고 객관적인 여건이 성숙되었을 때, 우리가 기민[機敏]하게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통일이 안 된다. 가장 좋은 기회야 8 ․ 15 해방 때였을 것이다. 통일국가를 만들기에,
가장 좋은 기회였는데도 우리가 못했다. 그 때 우리는 내적인 여건조성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에겐 그런 기회를 포착할 능력이 없었다. 그런 좋은 기회는 놓쳤지만, 앞으로도 그런 기회는 또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기에 대비해서 우리는 지금부터 꾸준히 노력을 해 나아가야 한다. 하물며 중구난방으로 무책임한 통일론을 함부로 떠들어서 우리 국론을 혼란하게 만드는 행위는 통일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이다. 72 년 1 월 11 일 기자회견에서는 특히 혁신[革新]을 가장한
용공사상[容共思想]을 민족애[民族愛]로 분장[扮裝]한 희색통일론, 또는 분별[分別]없는 남북교류[南北交流]등은 국민을 현혹하고, 통일을 위한 우리의 노력에 혼란만을 가져올 뿐 아니라,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해 두는 것이다. 66 년 6 월 25 일 담화문 에서는 특히 박 대통령은 통일정책에서 경제를 중시하였던바, 우리는 전쟁을 통한 적침분쇄[敵侵分碎]나 실지회복[失地回復]보다가, 더욱 차원 높은 승리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통일의 기반과 실력을 개척해 나가는 일이다. 주적[主敵]으로 하여금,
감히 우리의 경제력과 군사력 앞에 도전을 꿈꾸지 못하도록 하여 침략의도를 포기하고, 승복하게 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실력의 절대 우위를 확보하여 민주주의 체제와 철학의 실증 앞에 굴복하고 승복하게 하자는 것이다. 평소 내가 경제개발 5 개년 계획을 그대로 조국통일운동[祖國統一 運動]이요. 전쟁[戰爭]을 막는 길이요. 북한 동포를 구출[救出]하여, 우리 민족의 평화와 번영과 복지를 약속하는 길이라고 되풀이 하는 것은 나의 소신[所信]이요. 또한 철학[哲學]이다. 라고 말하면서,
1 ~ 2 차 경제개발 5 개년 계획을 1962 년부터 1971 년까지 적극적으로 밀고 나갔다. 닉슨의 중국 방문 시에 폭탄선언으로 미 ․ 중 접근에 일본과 동남아가 동요하여, 남북교류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자. 1971 년 당시 남북 국력을 비교하면 1960 년대에 북한의 경제력이 우위를 차지하기는 하였으나 큰 차이는 없었지만, 군사력에서는 북한이 월등하게 앞서 있었다. 7 ․ 4 공동성명 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 제안, 이 후락 중정부장은 청산가리를 품고 평양으로 역사적인 7․4 남북 공동성명 ① 외세 의존 없이 평화적으로 통일한다.
② 상호 중상비방을 하지 않고 군사충돌을 적극 방지한다. ③ 다방면적인 제반 교류를 한다. ④ 남북적십자회담이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한다. ⑤ 서울, 평양 상설 직통전화를 설치한다. ⑥ 통일을 위한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한다. ⑦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민족 앞에 약속한다. 북한은 회담 때마다 반공법, 보안법 철폐 주장은 습관성 메뉴이다. 북한 대표들은 박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수첩에 적어 온 것만 앵무새 같이 낭독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박 성철이 인사말까지 수첩대로 낭독하는 것을 보고서
북한 체제의 경직성과 김일성의 유일체제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고 북한 공산체제와 경쟁하기 위하여 국내적 체재정변[國內的 體制改編]의 필요성[必要性]을 관계당국[關係當局]에 의해 제기[提起]하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 소신 민주주의가 발달된 서구 각국에서는 그 제도가 각각 다르며, 더욱이 자유와 민주주의가 꽃피기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과 시행착오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알려 하지 않는 채, 자유와 민주주의가 곧바로 우리 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 인양 착각하고 있었던 점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 교과서에 제 1 장에 나오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명분만으로 여와 야로 갈라서서 협조보다 분열로, 합리적 토론보다 극한 대결로, 나라보다는 파당 우선으로 치달아 혼란과 낭비와 비 능력을 자초하고도, 이것들이 민주주의의 기본 속성인양 착각하고 있었다. 자유외교[自主外交]의 외길 신세를 갚을 줄 아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 박 대통령의 외교의 기본적인 입장은 국가이익, 국제신의[國制信義] 존중, 내정간섭 배제의 자주성 확립으로 미국은 우리를 해방시켰으며, 정부를 수립하게 하고 북의 6․25 남침[南侵]시 참전.
그리고 경제원조 결국 월남전 파병 결정하다. 목전의 작은 이익을 위해 신의[信義]를 저버릴 수 없다. 한일회담에서 무상 3 억 불, 차관 2 억 불, 상업차관 3 억 불 합계 8 억 불을 받았다. 향후 북한이 일본으로부터 100 억 불을 받는다 하여도 당시 8 억 불 보다 효과가 절대 크지 않으리라! 문제는 금액의 과다[過多]가 아니라, 적은 자본이라도 어떻게 탁월한 투자와 경영으로 국민적 저력으로 역동적이고, 집단적 리더십을 발휘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카터는 국내 인권문제를 쟁점으로 제기하였으나, 지금은 북한의
인권문제는 보고도 못 본체 한다. 카터는 인권외교로 미군철수를 압박하였다. 에그 뉴 부통령은 미국 내에서 카터의 인권유린이 비판받고 있다고 하였지만, 카터 회고록에서는 철군정책은 한 줄도 없다. 미 ․ 중 국교정상화, 닉슨 독트린 주한 미 7 사단 철수, 카터 인권빌미로 주한 미군 철수 위협, 북의 계속적인 적화도발, 월남패망 미군 철수, 북한의 땅굴 침투, 특히 러시아 외무부 아주국 제 1 국장이 언급한대로 1975 년 4 월에 북의 김일성은 제 2의 남침 준비 완료하고 중 ․ 소 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양국은 이를 거절하자
좌절되었다고 전언, 이 사실은 1996 년 5 월 23 일 조선일보 주최 국제회의에서 확인되었다. 우리는 미 8 군 참모장 싱글러브 장군이 자기 나라 대통령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고마움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된다. 박 대통령은 앞으로 비서실장이 정치자금을 전담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반대급부가 따르는 돈은 받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정치자금 받고도 부담 느껴 답례품을 보냈다. 나는 스물 대여섯 기업주로부터 협조를 받았으며, 정치자금을 본관 비서실장 사무실에서 받아, 그 때마다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내가 청와대 본관 사무실에서 정치자금을 받은 것은 기업주가 찾아온 시간과 돌아간 시간이 자세히 기록되고 마음만 먹으면 경호실,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가 성금 전달 기업체를 찾아가 확인할 수 있어서, 나는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정확하게 정치자금을 처리하였다. 박 대통령은 직접 정치자금을 받은 적은 없으며, 여야 대표 회담 때 정치자금 전달보도가 수시로 나왔으나 이것은 사실 무근이다. 박 대통령 사후 금고 속에 9 억 원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 노 대통령들이 그만둘 때 2000 억 원 이상 쓰다 남은 돈이 있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 다음에 계속 합니다. =
-- 안동 촌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