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日成 의 고백(1)
1. 들어가며
김일성, 민족의 반역자이자 역사의 반역자 김일성이 꿈꾼 것은 진정 무엇이었나?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간된 지도 십 수 년이 흘렀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역사적 진실은 아직도 가려져 있다. 김대중 회고록이 나왔지만 꼭 밝혀져야 할 진실이 대부분 은폐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회고록마저도 살아 생전의 인생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실록처럼 역사를 들여다 보는 진실의 창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꿈꾼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이룬 결과에 대해김일성 자신은 솔직하게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또 역사에 자신이 어떻게 남겨지길 바라고 있었는지 역사적 추리기법으로 김일성의 속내를 추적해보기로 한다. 말이 추리이지 실제는 faction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가 죽은지 20년이 다가오지만 역사적 진실 은폐와 사후 우상화에 여전히 매달리는 조선노동당의 치졸한 행태 때문에 충분한 방증이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2. 나는 항일 빨치산 나부랭이 맞다.
김일성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내노라하는 항일 영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항일무장투쟁 이래봐야 1937년 보천보 전투에서 정규군도 아니고 지서를 지키던 일본 순사 7명을 사살한 것이 고작이다. 그마저도 일본인 요리사와 갓난 아이 등 2명이 죽은 것에 불과하다는 이설이 있을 정도이다.
중국공산당에 배속되어 동북항일 연군이라는 미명하에 무리지어 만주를 떠돌며 보급투쟁을 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독립운동 한답시고 만주국에서 농사짓고 살던 동포들을 뜯어먹고 살면서 일제의 학정에 못이겨 조국을 등지고 만주에서 농사지으며 타고난 부지런함과 명석한 두뇌로 농사깨나 짓던 부농들을 골라 느닷없이 친일인사로 몰아 본보기로 삼아 인민재판을 자행하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당시 만주국과 소련의 국경에는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정규군이 70만명이나 배치되어 있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난처했다. 한가하게 좀도둑에 지나지 않는 도적떼나 잡으러 다닐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시 만주에서의 항일투쟁 공간이었던 것이다. 항일 투쟁이라기 보다 일하지 않고 뜯어먹고 사는 깡패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도망쳐 소련군에 배속되어 국적없는 유랑자 용병집단이 되어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전면에 내세웠다. 왜인가? 그나마 그것말고는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항일투사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항일 경력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노라하는 항일투사들이 대다수 김일성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건 또 왜인가? 그게 바로 볼세비키 혁명전통에 빛나는 붉은 군대의 힘이었던 것이다. 내노라하는 항일투사들 대다수가 민족의 독립적 자주적 운명개척하고는 거리가 먼 기회주의세력이며 從蘇 반역자들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그들의 행태를 낱낱히 지켜보며 속으로 코웃음쳤다. 한마디로 별 것도 아닌 놈들이었던 것이다. 자신감을 가진 김일성은 마수를 남쪽으로 펼쳤다. 박헌영, 여운형, 백남운, 김규식,김구마저도 자신에게 예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진정 조선민족의 영웅이라는 자기확신에 빠지게 되었다.
3. 나는 이승만에게 결코 꿀리지 않는다
문제는 이승만이었다. 김일성은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이해할만한 식견과 소양이 없었다. 김일성은 자신과 이승만은 처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소련의 꼭두각시인 자신이나 미국의 꼭두각시인 이승만이나 무슨 차이가 있냐는 것이다.한마디로 이승만한테 자기가 꿀릴 게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독립운동 경력을 내세우지만 목숨을 내놓고 하는 항일무장투쟁도 아니고 미국에서 외교적 영향력을 통하여 독립을 이뤄보려는 운동노선인데 영향력, 인지도는 몰라도 피장파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는 내가 훨씬 더 젊으니 역동적이고 미래가 창창하다. 시간도 내 편이다. 더구나 나는 소련뿐만 아니라 모택동의 지원도 얻어낼 수 있는 처지이고 직접 군사작전을 해본 경험도 있다. 이승만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나는 많이 가지고 있다. 내가 반드시 이긴다. 이승만은 또 항일세력들로부터도 고립돼가고 있다. 노회한 늙은 노인네가 미국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내 비록 반란세력의 수장에 지나지 않지만 머잖아 곧 역사는 나를 조선반도의 유일한 독립영웅, 건국자, 아버지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말 것이다. 말이 필요없다 내 전공분야인 군사작전으로 총대로 인민해방군으로 증명하겠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이승만보다 훨씬 훌륭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불을 내뿜는 나의 총구에 머리를 조아려야만 살 수 있다는 숨길 수 없는 생존논리의 진실을”
느닷없는 6.25남침과 서울점령 후 폭풍남진 모두 김일성의 전격결정으로 이루어진 이유이다. 김일성은 이승만이 만든 대한민국을 비웃으며 총대로 본때를 보여주고자 했다. 김일성은 붓이 칼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文이 武보다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민에게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나라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병정놀이 깡통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육성된 15만 병력의 군대를 갖게 되자 김일성은 만주시절을 떠올리며 감격해서 반드시 무력을 사용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키고도 진지한 인간적 민족적 고민의 흔적이 전혀 없는 인면수심의 철면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그의 삶속에서 자유와 인권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게된 경험이나 역사적 흔적이 전혀 없다. 동시에 자신의 항일투쟁 경력이 다른 이에게는 자유와 인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라는 것을 성찰할만한 소양도 전혀 없는 일종의 깡패두목으로 살았던 것이다. 오늘날 북한의 인권문제는 김일성으로부터 배태된 것이다.
나라의 민족적 정통성, 국민적 정당성, 국제법적 합법성 갖은 것은 개나 줘버리고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약연기만이 권력을, 정통성을 보장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인민에게 자유나 인권 따위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민에게 필요한 것은 쌀과 고깃국이면 되고 나머지는 필요 없다. 오히려 그 대가로 자기는 인민에게 무한 충성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거나 동의하지 않을 염려가 되는 집단에게 관용은 필요 없다. 자신이 추구하는 혁명의 적이기 때문이다. 1958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정치범 수용소를 통하여 가차없는 숙청과 강제노역이 이루어진 이유이다.
변절했던 조봉암이 충성의 편지를 보내오고 양명산을 통해 지금지원을 했더니 진보당을 만들자 마자 발각되어 마침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뭔 일을 그렇게 허술하게 한단 말인가. 해방공간의 성시백처럼 다부지게 일하는 솜씨있는 놈이 그렇게도 드물단 말인가? 1960년 4.19로 이승만이 민주화시위에 무릎을 꿇고 퇴진하자 김일성은 역시 이승만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며 의기양양했다. 이제 한반도에서 수령님을 대적할 자가 감히 누구냐며 수령님이야말로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칭송을 받자 몰래 화장실에서 낄낄거렸던 것이다.” 박헌영도, 여운형도, 김구도, 조봉암도, 이승만까지도 동시대에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지는 노을과 함께 어둠속으로 다 사라져가는 구나. 오직 나의 시대만이 여전히 푸르구나. 나는 아직도 이렇게 팔팔한데. 전쟁중에는 포탄도 나를 비껴가 터졌고 총알도 나를 피해갔다. 이것이 역사인가 운명인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참으로 신기하고도 신나는 일이었다.
3. 내가 박정희를 가장 두려워한 이유는…
4.19이후 극도의 분열과 혼란 속에 갈 길 몰라하던 남쪽 정세를 즐기며 돈 좀 풀어 남로당 잔당 등 우수마발 혁신세력 다 동원하여 남북 평화통일(무저항 적화통일)쪽으로 물꼬를 틀려고 하였더니 느닷없이 5.16이 일어나고만 것이었다. 소련공산당이 제3세계 신생독립국의 갈 길이라며 내걸었던 민족민주혁명론(NDR)의 구호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걸고 말이다. 반공을 내세우긴 했지만 남로당 군사총책 출신 박정희가 주도했다니 한 번 머리에 박힌 사상이 어디로 갈 데가 있나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일단 말이 잘 통할 상대인 것은 분명했다.
경북 상주 출신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자 상업성 부상까지 지낸 인물을 남파시켰다. 1961년 6월 25일, 황태성은 당시 대남공작 총책 이효순(李孝淳)의 소환을 받고 다음과 같은 지령을 띠고 남파되었다. ① 남한의 고위 지도층 가족을 포섭하여 고위 지도층과 직접 접촉할 것, ② 앞의 사명을 수행하기 어려우면 경상북도에 가서 대구시를 중심으로 당의 기반을 구축하고 신분을 합법화할 것, ③ 남한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조성하여 4·19혁명 재판과 같은 혁명의 계기를 만들 것, ④ 평화통일 선동 및 미군 축출을 위한 반미사상을 고취시킬 것 등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김종필, 박정희 등과 접촉하여 5.16 주체세력들의 진의를 파악하라는 임무를 띠고 남파된 일종의 김일성이 보낸 밀사라고 볼 수 있으나 김종필, 박정희와 접촉도 못해보고 사법당국에 체포되어 그 뒤 황태성은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어 1963년 12월 14일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광복 후 처음으로 현 고위 지도층의 가족을 통하여 고위 지도층과 직 접 접촉하기 위해 부상까지 지낸 거물급 인사를 남파했다는 점에서 정부 고위층 과의 관련설로 인하여 한 때 정계는 물론, 세인의 의혹과 물의를 일으켰다.
이때 김일성은 적잖이 당황했다. 박정희를 아랫사람 정도로 내려다보다 한방 크 게 먹은 꼴이다. 자기가 보낸 사실상의 밀사를 만나보지도 않고 제대로된 항변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단호하게 간첩죄로 사형시켜 버렸으니 말이다.
게다가 박정희는 나랏일 하는 자세부터가 남달랐다. 개발원조에 기대 근근히 연 명하던 이승만 정부와 달리 경제개발을 하겠다며 돈을 꾸러 외국을 나다니고 국교정상화를 추진하지 않나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지 않나 젊어서 그런 지 뭐 든지 용의 주도하고 의욕적이었다. 박정희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큰 화근이 될 판 이었다. 황태성을 죽인 것도 그렇고 통혁당, 인혁당을 시작단계부터 찾아내 발본 색원하고 밟아 뭉개버리는 걸 보니 잘못하다간 평양까지 거덜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 정도였다. 이북지역은 4대군사노선으로 대응하고 우선 전력을 다해 박정희를 제거하기로 하고 김신조를 내려 보냈으나 실패했다. 울진삼척지구 무장 공비 침투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민정이양 이후 벌써 2차례나 대통령을 해 처먹고도 도무지 물러날 생각을 안하 니 이걸 어쩌면 좋은 지 참으로 갑갑하다. 쟤들도 민주주의 가짜야. 그나저나 박정희 이놈은 오래 집권하면 할수록 우리가 불리하다. 최악의 경우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앉아서 고사될 위험이 있다. 민주주의라면 응당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닌가? 이승만도 장기집권 획책 하다 민심 잃고 부정선거로 퇴진했는데 청년 학생들은 입만 나불대고 힘을 못쓰니 도대체 막을 도리가 없다. 인혁당, 통혁당 남은 애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대남공작 담당자들 업무추진현황 다 가져와 보라고 해야지 이제부터 내가 직접 챙겨야겠어.”
71년 대선은 김일성에게 답을 줬다. 거침없이 용공노선을 내걸었던 김대중이 박 정희와 박빙의 승부를 펼친 것이었다. 김일성의 고민이었던 박정희의 대항마가 드디어 출현한 것이었다. 김대중이 바로 자신이 찾고 출현하길 기대했던 진보적 대중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다. 통혁당 친구들이 조직은 깨졌지만 진정한 대어급 대중정치인을 발굴했으니 커다란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이 있으면 이제 남조선 혁명운동이 탄력을 받고 박정희 정권을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다는 자신 감이 생겼다. 사형당한 통혁당 당수 김종태에게 영웅칭호를 부여하고 해주사범 대학교를 김종태 사범 대학교로 개칭해 그의 업적을 기리고 대대로 기념하라고 시켰다.
느닷없이 박정희가 사람을 보내겠다고 연락이 왔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평양 으로 직접 보내겠다는 것이다. 남북대화를 갖고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을 논의 하자는 것이었다.
“박정희 이놈 대체 무슨 속셈인가? 김대중을 보고 불안을 느낀 것인가? 미군철수 한다고 하니까 벌써부터 겁을 잔뜩 집어먹고 항복이라도 하겠 다는 것인가? 아무튼 보통내기가 아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자세히 알아 보고 대처해야 겠다. 사실상 나의 주장인 고려연방제 평화통일론은 김대중이 내세운 4대국 보장 중립화 통일론 (공화국 연방제 통일론)과 맥락을 갖이하는데 또 무슨 개 수작을 부리려는 것인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라도 이어받겠다는 심산인가?
이후락이 직접 평양으로 왔다. 이후락 동무 유엔군 벙거지를 뒤집어 쓰고 들어온 남조선의 미군은 왜 아직도 철수하지 않고 있는 거요? 라고 물어보니 이놈봐라 철수한 미군을 다시 끌어들인 것은 바로 김주석 아닙니까? 라고 되묻지 않는가?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천정을 바라보며 크게 웃고 말았다. 생각보다 다부진 놈 들이네. 여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내 말에 거침없이 되받아치고 있네.
그건 그렇고 박정희가 왜 이후락 동무를 평양으로 보냈소?.라고 물으니 이산가족 상봉도 논의하고 남북교류도 논의하고 민족의 숙원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 문제도 논의 하자고 보냈단다. 무엇보다 나의 진의를 알아보고 오라고 했단다. 이산가족 상봉이나 남북교류문제는 어려운 문제 아니니까 당국자끼리 잘 협의해서 하면 되는 문제이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문제는 외세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문제인데 그렇다면 주한미군 철수에 동의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무력남침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원칙적으로 자주적 통일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거참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내가 반드시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전쟁준비에 일로 매진해온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무력남침 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주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내가 내세우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원칙이라고 말하니 박정희에게 전하고 최종 타결해서 공동성명으로 발표하자며 돌아갔다. 거참 박정희 이놈은 주한미군이 나가고서도 그와 상관없이 나하고 붙어 해볼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감히 나를 뭘로 보고 이 따위 개수작질인가?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박정희 이놈 내가 본때를 보여주마. 내가 바로 총대사상의 김일성이야. 내가 유일하게 믿는 것은 인민군 이고 총구에서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화약냄새야. 너도 군인 출신이지. 하지만 너는 실전으로 군대를 총 지휘한 경력은 없잖아. 나한테 상대가 안돼. 그걸 알아야지. 평화통일은 개뿔 그게 바로 무력통일이야. 그 정도는 잘 알텐데. 이제 서서히 통일대전의 막이 또다시 오르는 구만.”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대남사업팀과 미팅을 갖고 7.4남북 공동성명이 마련해준 대화공간을 조국통일 혁명공간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전면적인 평화공세 와 민간차원의 다각적 교류를 통한 핵심인사 포섭공작 방침에 대해 지시를 하달 했다. 박정희가 심복을 보내 제발로 무력남침 적화통일 올가미에 들어오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아무래도 박정희가 미군철수 문제도 불거지고 삼선개헌의 내부적 압박과 김대중의 용공노선에 대한 국민들의 열화 같은 지지에 충격을 받고 급격히 자신감을 상실하게 된 것은 아닌 지 의심하고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건 적화통일 무력남침의 엄청난 호기임에 틀림없었다. 싸우기 전에 이미 반쯤은 이기고 시작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金日成의 고백(2)에서 이어집니다.
201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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